Silla > 신라민족론 > 8. 遼黑史 > BC 0108 낙랑

낙랑은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후 313년까지 400여년간 대동강 유역에 존속하였다. 644년에 당태종이 낙랑고려에 대한 침공을 준비하면서 '요동은 옛 중국 땅(遼東故中國地)'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BC 0109 ᑅ 한사군 이전의 동변
● 연나라는 동호를 몰아낸 후 양평까지 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조선과 진번을 침공하여 복속시키고 패수 바깥에 관리를 두어 보루와 요새를 쌓았다. 이때는 요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장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없다. 진나라는 요동까지 장성을 쌓고 패수 바깥은 요동 외요에 소속시켰다. 한나라는 이곳이 멀어 지키기 어렵다고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까지만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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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109 ~ 0108 한(漢), 조선 침공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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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109 漢의 衛滿朝鮮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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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107 한(漢), 현도군 설치
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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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82 후한서(445)
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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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75 현도군 이전, 동부도위 설치
이전에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를 낙랑군에 소속시켰었는데, 다시 단단대령 동쪽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불내성에 치소를 두어 영동 7현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에 옥저도 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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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朝鮮(조선) 䛁邯(남감) 增地(증지) 黏蟬(점제) 駟望(사망) 屯有(둔유) 帶方(대방) 列口(열구) 長岑(장잠) 海冥(해명) 昭明(소명) 提奚(제해) 含資(함자) 遂成(수성) 鏤方(누방) 渾彌(혼미) 浿水(패수) 吞列(탄열, 원문에는 吞에 초두가 붙어 있다.) 東暆(동이) 蠶台(잠태) 不而(불이) 華麗(화려) 邪頭昧(사두매) 前莫(전막) 夫租(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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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45 낙랑 인구의 14%인 4만 명이 漢族
조선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학술지 '력사과학' 최근호에 게재된 손영종의 논문에는 총 인구의 14%인 4만 명이 漢族이며, 86%는 土着民으로 구분되어 있다. ● 1934년 서울시 인구 39만여명 중 일본인은 11만여명으로 비율이 28%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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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8 삼국사기(1145)
(신라)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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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15 삼국사기(1145)
(백제)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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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11 삼국사기(1145)
(백제)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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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08 삼국사기(1145)
(백제)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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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08 삼국사기(1145)
(백제)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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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06 삼국사기(1145)
(백제)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漢水)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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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02 삼국사기(1145)
(백제)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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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01 삼국사기(1145)
(백제)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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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 삼국사기(1145)
(신라)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이 우리가 국상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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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燕地尾箕分野也 武王定殷 封召公於燕 其後三十六世與六國俱稱王 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 西有上谷代郡雁門 南得涿郡之易容城范陽北新城故安涿縣良鄉新昌 及勃海之安次 皆燕分也 樂浪玄菟亦宜屬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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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燕은 尾星과 箕星의 분야다. 무왕이 殷을 평정하고 소공을 燕에 봉했다. 그후 36세가 지나 다른 6국과 함께 왕을 칭했다. 동부에는 어양, 우북평, 요서 그리고 요동이 있고 서부에는 상곡, 대군 그리고 안문이 있다. 남쪽으로는 탁군의 역, 용성, 범양, 北新城, 고안, 탁현, 양향, 新昌 그리고 발해의 안차까지 모두 燕이다. 낙랑과 현도 또한 燕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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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上谷郡
上谷郡 縣十五 沮陽 泉上 潘 軍都 居庸 雊瞀 夷輿 寧 昌平 廣寧 涿鹿 且居 茹 女祈 下落 상곡군(36008호,15현) - 저양,천상,번,군도,거용,구무,이여,녕,창평,광녕,탁록,차거,여,여기,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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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中山國
中山國 縣十四 盧奴 北平 北新成 唐 深澤 苦陘 安國 曲逆 望都 新市 新處 毋極 陸成 安險 중산국(160873호,14현) - 노노,북평,북신성,당,심택,고경,안국,곡역,망도,신시,신처,모극,육성,안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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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右北平郡
右北平郡 縣十六 平剛 無終 石成 廷陵 俊靡 薋 徐無 字 土垠 白狼 夕陽 昌城 驪成 廣成 聚陽 平明 우북평군(66689호,16현) - 평강,무종,석성,연릉,준미,자,서무,자,토은,백랑,석양,창성,려성,광성,취양,평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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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樂浪郡
樂浪郡 縣二十五 朝鮮 俨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 東傥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낙랑군(62812호,25현) - 조선,남감,패수,함자,점제,수성,증지,대방,사망,해명,열구,장잠,둔유,소명,누방,제해,혼미,탄열,동당,불이,잠태,화려,사두매,전막,부조 ● 대동강 남쪽의 정백동에서 출토된 낙랑호구부와 일치한다. 몇몇 한자 표기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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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玄菟郡
玄菟郡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현토군 현은 고구려, 상은태 그리고 서개마가 있다.
2688#11087
 
0008 ᑅ 한서(82) 遼東郡
遼東郡 縣十八 襄平 新昌 無慮 望平 房 候城 遼隊 遼陽 險瀆 居就 高顯 安市 武次 平郭 西安平 文 番汗 沓氏 요동군(55972호,18현) - 양평,신창,무려,망평,방,후성,요대,요양,험독,거취,고현,안시,무차,평곽,서안평,문,번한,답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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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遼西郡
遼西郡 縣十四 且慮 海陽 新安平 柳城 令支 肥如 賓從 交黎 陽樂 狐蘇 徒河 文成 臨渝 絫 요서군(72654호,14현) - 차노,해양,신안평,유성,영지,비여,빈종,교려,양락,호소,도하,문성,임유,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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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4 삼국사기(1145) 신라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으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생각하기를 '나라 안이 비었을 것이다.' 하고 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몹시 급박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가 알천 가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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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023 위략(265±)
염사착이 진한의 우거수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 군에서는 염사착의 공과 의를 표창하고, 관직과 밭 그리고 집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125년에 이르러서는 그로 인하여 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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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023 위략(265±)
● 낙랑에서 큰 배로 진한에 들어가 포로를 구출했다는 부분은 삼국지에 있는 진한의 위치 설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삼국지에는 대방의 남쪽에 한이 있고 그 중 진한은 마한의 동쪽이자 예의 남쪽에 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대방은 낙랑의 남부를 갈라서 만들었고 예는 조선의 동쪽에 있었는데 조선은 한나라가 점령하고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낙랑에서 진한까지 배로 가려면 대동강에서 나와 한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한이라면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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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0030 왕조의 난
토착인 왕조가 낙랑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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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동부도위 폐지
변경의 郡을 줄이면서 도위도 폐지하였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우두머리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불내·화려·옥저 등의 제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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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0037 삼국사기(1145) 고구려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 우리 병력이 갑자기 성 밑에 도달한 연후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왕 최리는 낙랑예후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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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0037 낙랑예후설(樂浪濊侯說) 1
삼국사기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1) 낙랑군은 30년에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보내 왕조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게 했는데, 32년에 최리의 낙랑국이 되어 있을 수 있나? (2) 낙랑군은 치소가 대동강 유역에 있었는데, 그 수장이 옥저까지 행차할 수 있었나? (3) 낙랑군은 44년에 韓의 일부가 스스로 복속해 올 정도로 강성한 상태였는데, 37년에 고려에 병합될 수 있었나?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낙랑국은 낙랑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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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6 삼국사기(1145) 신라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최리의 낙랑예후국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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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삼국사기(1145) 고구려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최리의 낙랑예후국으로 보아야 한다. 낙랑왕 최리는 32년에 고려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가 고려의 침공을 받아 망하게 되는데, 그 사건이 이 37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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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삼국사기(1145) 신라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최리의 낙랑예후국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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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삼국사기(1145) 고구려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이 기록은 중국의 기록에는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가 후한서의 30년 기록과 삼국지의 237~239년 기록 그리고 최씨 낙랑국에 관한 토착 기록을 잘못 종합하여 적어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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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낙랑예후설(樂浪濊侯說) 2
삼국사기(1145)에는 44년에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고 군현으로 삼아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은 군대가 동원된 중요한 사건인데도 중국의 사서에 대응하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후한서(445)에는 30년에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낙랑에 파견하여 왕조의 난을 진압하고 통치를 회복했다는, 삼국사기와 어울리지 않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또 삼국사기에는 37년에 고려가 낙랑국을 병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중국의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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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후한서(445)
建武二十年韓人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使屬樂浪郡四時朝謁 한(韓)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漢)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위략의 염사착 이야기(20~23)와 후한서의 염사 사람 이야기(44)는 廉斯라는 명칭과 韓에서 낙랑으로 귀순한다는 이야기가 유사하므로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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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후한서(445)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가을에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거느리고 낙랑에 내부하였다. ▶염사 사람들의 귀부를 말하는 듯하다. 삼국사기가 후한서에서 30년에 발생했다고 하는 사건을 44년으로 옮긴 근거가 이 사건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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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7 후한서(445)
겨울에 구려 잠지락의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 낙랑에 투항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만여 가(家)라고 되어 있으나 오기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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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 고려, 한(漢) 침공
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은의와 신의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이 기록의 구려는 오환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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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6-07 삼국사기(1145) 고구려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넓혀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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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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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0125 삼국지(289)
구려왕 궁(宮)이 자주 요동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과 현도태수 요광은 궁이 두 군(郡)의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은 몰래 군대를 파견하여 현도군을 공격해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벼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다가 패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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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 후한서(445)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귀부하였다. ● 낙랑은 현도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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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 후한서(445)
궁(宮, 태조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현도에 예속되기를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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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8 후한서(445)
(고려가)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략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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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후한서(445)
봄에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과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宮)은 이에 사자(세자) 수성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은 험요지를 점거하여 대군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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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후한서(445)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예맥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그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유주·현도군과 함께 힘을 합하여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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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2 후한서(445)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를 송환하고 현도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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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 후한서(445)
順帝 陽嘉 元年(A.D.132) 에 玄菟郡에 屯田 六部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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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 후한서(445)
현도군에 둔전 6부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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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6 고려, 서안평 공격
0146 삼국사기(1145) 고려   0146 삼국지(289)   0146 후한서(445)  
 
0169 삼국지(289)
현도태수 경림이 그들(고려)을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신대왕)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후한서(後漢書 445): 현도태수 경림이 (고려를) 토벌하여 수백명을 죽이니 백고(신대왕)가 항복하여 현도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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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2-177 삼국지(289)
희평 연간에 백고(신대왕)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 등을 파견하여 탁(度)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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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4 후한서(445)
부여가 다시 표장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부여는 본래 현도에 예속되었으나 헌제 때에 그 나라의 왕이 요동에 예속되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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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9ᑅ 삼국지(289)
환제(146-167)·영제(168-189) 말기에는 韓과 濊가 강성하여 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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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9ᑅ 후한서(445)
韓과 濊가 모두 강성해져 군현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韓으로 도망하여 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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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0-204 삼국지(289)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탁이 해동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들을 위력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는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탁(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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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20 삼국지(289)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가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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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20 삼국지(289)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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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20 삼국지(289)
● 한서에 나오는 25개 현에는 단단대령 동쪽의 7개 현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18개 현 중 둔유현 이남의 7개 현은 이때 대방군으로 분리되었다. 이 7개 현이 과거 진번군의 15개 현 중 일부였다가 폐지되지 않고 낙랑군에 합쳐진 7개 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번군은 대방군 남쪽에 대방군만한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었던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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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 ᑅ 후한서(445) 幽州
涿郡(涿 逎 故安 范阳 良乡 北新城 方城) 上谷郡(沮阳 潘 甯 广甯 居庸 雊瞀 涿鹿 下落) 右北平郡(土垠 徐无 俊靡 无终) 辽西郡(阳乐 海阳 令支有孤竹城 肥如 临渝) 辽东郡(襄平 新昌 无虑 望平 候城 安市 平郭有铁 西安平 汶 番汗 沓氏) 玄菟郡(高句骊 西盖马 上殷台 高显 候城 辽阳) 樂浪郡(朝鮮 䛁邯 淇水 貪資 占蟬 遂城 増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樂都)
3722
 
0220ᑅ 삼국지(289)
漢末更屬句麗 예는 한나라 말기에 다시 구려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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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7-239 삼국지(289)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淵 공손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수습하였다. 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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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7-239 삼국지(289)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의 臣智에게는 邑君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邑長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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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8 - 0245
漢 왕조를 이은 위(曹魏)는 238년에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을 토벌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통치도 회복하였다. 이어 위는 244년과 245년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고 낙랑군과 대방군도 고려에 복속했던 濊를 침공하여 다시 복종을 받아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韓도 침공하여 복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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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8 삼국지(289)
태위 사마선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궁(宮, 동천왕)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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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9_ 진서(648)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 선제(사마의)가 공손씨를 평정하자 (倭의) 여왕이 사신을 대방에 파견하여 조알하였다. 그 뒤에도 조빙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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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0 삼국지(289)
대방 태수 궁준이 건충교위 제준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어 왜국에 이르게 했다. 왜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가져온 금, 비단, 융단, 칼, 거울, 채물을 하사했다. 이에 왜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은조에 사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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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0246 위(曺魏)의 고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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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삼국지(289)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령 동쪽의 濊가 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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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ᑀ 삼국지(289)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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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ᑀ 진한8국 진번8폐현설
辰韓八國 眞番八廢縣說. 삼국지에 나오는 진한 8국이 진번의 15현이었다가 진번이 폐지될 때 낙랑에 통합되지 않고 빠진 8현이었다는 주장이다.
9945
 
0245 삼국지(289)
조서를 내려 왜의 난승미에게 황당을 하사했는데 군(郡)으로 보내 수여토록 했다.
5901 COMMENT
 
0246-08 삼국사기(1145) 백제
위(魏)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삭방태수(대방태수의 오기)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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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6-08 삼국사기(1145)
● 이 기록은 한인들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는 삼국지(289)의 245년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삼국지에도 당시 대방태수가 궁준이고 낙랑태수는 유무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당시 백제가 마한 50여국의 하나에 불과했다고 되어 있어 이 기록과 어울리지 않는다. 진서(648)에도 이 당시 조공의 주체로 백제왕이 나오지 않고 마한왕이 나와서 삼국지의 정황과 어울린다. 이 기록에서처럼 백제가 낙랑을 공격하는 일은 304년 즈음에나 가능했다.
1962
 
0247 삼국지(289)
예가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불내예왕으로 봉하였다.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군에 와서 조알하였다. 2군에 전역이 있어 조세를 거둘 일이 있으면 공급케 하고 사역을 시켜 마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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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7 삼국지(289)
태수 왕기가 관부에 도착하였다. 倭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 비미궁호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 오월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파견해 가져간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게 하사하고 격문으로 이를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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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진서(648) 幽州
郡國七 縣三十四 戶五萬九千二十 范陽國(涿 良鄉 方城 長鄉 遒 故安 范陽 容城) 燕國(薊 安次 昌平 軍都 廣陽 潞 安樂 泉州 雍奴 狐奴) 北平郡(徐無 土垠 俊靡 無終) 上谷郡(沮陽 居庸) 廣甯郡(下洛 潘 涿鹿) 代郡(代 廣昌 平舒 當城) 遼西郡(陽樂 肥如 海陽)
11623
 
0265~0316 진(西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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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진서(648) 平州
案禹貢冀州之域於周爲幽州界漢屬右北平郡後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東夷九種皆服事焉魏置東夷校尉居襄平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爲平州後還合爲幽州及文懿滅後有護東夷校尉居襄平咸寧二年十月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統縣二十六戶一萬八千一百 昌黎郡 昌黎 賓徒 遼東國 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樂浪郡 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 玄菟郡 高句麗 望平 高顯 帶方郡 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5862 COMMENT
 
0276 진서(648) 平州
우임금 시절을 상고해 보면 기주 지역은 周의 유주가 되었고 漢의 우북평군과 접하였다. 後漢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하였고 그의 아들 강, 강의 아들 문의가 멋대로 요동을 점거하고 동이 9종을 모두 복종시켰다. 曹魏가 동이교위를 양평에 두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을 갈라 평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를 만들었다. 문의가 죽자 나중에 호동이교위를 양평에 두었다. 276년 10월에 평주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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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진서(648) 平州
縣二十六戶一萬八千一百 昌黎郡 昌黎 賓徒 遼東國 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樂浪郡 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 玄菟郡 高句麗 望平 高顯 帶方郡 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평주(5군국,26현,18100호) - 창려군(창려,빈도), 요동국(양평,문,거취,낙취,안시,서안평,신창,역성), 낙랑군(조선,둔유,혼미,수성,누방,사망), 현토군(고구려,망평,고현), 대방군(대방,열구,남신,장잠,제해,함자,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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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진서(648) 平州
● 낙랑군은 후한서의 유주 낙랑군 18성에서 䛁邯 淇水 占蟬 増地 昭明 樂都가 빠지고 南新이 들어가 13현이 되었는데, 여기서 7현을 대방군으로 분리하여 낙랑군은 6현이 되었다. 요동군은 후한서의 유주 요동군 11성에서 无虑 望平 候城 平郭 番汗 沓氏가 빠지고 居就 樂就 力城이 들어가 8현이 되었다.
11615
 
0285 진서(648)
태강 6년에 이르러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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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요약 1
扶餘의 북쪽에는 弱水가 있고 서쪽에는 鮮卑가 있으며 동쪽에는 挹婁가 있고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다. 高句麗의 북쪽에는 扶餘가 있고 동쪽에는 沃沮가 있으며 남쪽에는 朝鮮과 濊가 있다. 朝鮮의 동쪽이 다 濊다. 沃沮의 북쪽에는 扶餘와 挹婁가 있고 서쪽에는 高句麗가 있으며 남쪽에는 濊가 있다.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고 남쪽에는 辰韓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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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요약 2
朝鮮을 멸하고 樂浪郡, 真藩郡 그리고 臨屯郡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에는 沃沮에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얼마 후 真藩과 臨屯을 폐하여 樂浪에 합쳤다. 玄菟는 高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沃沮는 樂浪에 소속시켰다. 다시 樂浪의 단단대령 동쪽을 갈라 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가 濊人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樂浪郡의 남쪽은 분할하여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馬韓, 辰韓 그리고 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馬韓은 서쪽에 있고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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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樂浪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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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03 삼국사기(1145) 신라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 낙랑은 313년에, 대방은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었다. 이때는 단지 망하기 직전에 있던 낙랑과 대방의 난민들이 신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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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02 삼국사기(1145) 백제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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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10 삼국사기(1145) 백제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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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08 삼국사기(1145) 고려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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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자치통감(1084)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 이 낙랑군은 탁발위의 영주 낙랑군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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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10 삼국사기(1145) 고려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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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
6420 COMMENT
 
0313↝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
기원전 108년에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은 서진 때까지 존속하다 313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다. 그러자 모용 선비가 그 유민을 받아 자신의 영토 내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모용 선비의 연나라를 흡수한 북위 때에는 낙랑군이 요서의 영주에 있었는데 다시 하북의 남영주로 옮겨졌다. 대방은 낙랑과 이동 경로가 같고 조선은 북위 때 산해관 서쪽에 있었다. 313년 이후 옮겨간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의 위치를 가지고 원래 위치라 주장하는 오류가 있다.
2688#11611
 
0314-09 삼국사기(1145) 고려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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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 삼국사기(1145) 고려
현도성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571
 
0337~0370 연(前燕)
요서 일대에 살던 모용(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조(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업(鄴)으로 옮겼다. 370년 진(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龍城-營州-柳城-朝陽
11600
 
0350~0394 진(前秦)
11604
 
0355-12 삼국사기(1145) 고려
王遣使詣燕 納質修貢 以請其母 燕王雋許之 遣殿中將軍刀龕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史 封樂浪公 王如故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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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4~0407 연(後燕)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나라다.
11598
 
0386~0534 위(拓跋魏,北魏)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나라다.
11597
 
0407~0436 연(北燕)
선비족이 건국한 후연의 군주 모용희는 폭군이었다. 선비족화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은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설득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운은 천왕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이 함락되자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북연은 멸망하였다.
11385
 
0413 삼국사기(1145) 고려
遣長史髙翼 入晉奉表 獻赭白馬 安帝封王髙句麗王樂安郡公 장사 고익을 진(東晉)나라에 보내 표를 올리고, 붉은 무늬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가 왕(장수왕)을 고구려왕 낙랑군공으로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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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6 위서(554) 平州
平州領郡二縣五遼西郡領縣三肥如陽樂海陽北平郡領縣二朝鮮昌新 평주(2군,5현) - 요서군(537호,비여,양악,해양), 북평군(430호,조선,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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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4 위서(554) 營州
營州領郡六縣十四昌黎郡領縣三龍城廣興定荒建德郡領縣三石城廣都陽武遼東郡領縣二襄平新昌樂良郡領縣二永洛帶方冀陽郡領縣二平剛柳城營丘郡領縣二富平永安 영주(6군,14현) - 창려군(201호,용성,광흥,정황), 건덕군(200호,석성,광도,양무), 요동군(131호,양평,신창), 낙랑군(219호,영락,대방), 기양군(89호,평강,유성), 영구군(182호,부평,영안).
3599
 
0494 삼국사기(1145) 고려
齊帝䇿王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제(南齊)나라 황제가 왕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이주 정동대장군 낙랑공으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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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삼국사기(1145) 고려
梁髙祖下詔曰 髙句麗王樂浪郡公某 乃誠款著 貢驛相尋 冝豊秩命 式弘朝典 可撫軍 一作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 양(梁)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구려왕 낙랑군공 모는 정성이 두드러지고 조공하는 길이 서로 이어졌으므로, 마땅히 관작을 후하게 주고 조정의 의전을 넓혀 무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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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0539 梁職貢圖(唐閻立本王會圖)
왼쪽으로부터 신라, 고려 그리고 백제의 사신이고 그 다음이 양나라 황제다. 옷은 신라, 고려 그리고 백제가 거의 동일하고 양나라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비슷한 편이다. 특히 목 아래가 쐐기 모양으로 파여 있는 모양은 그 부분을 둥글게 감싸는 중앙아 사신들의 옷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네 나라의 옷이 비슷해진 이유는 한반도에 400여년이나 존재했던 낙랑군을 통해 중국 문화가 고려와 한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11523
 
0533 위서(554) 南營州
南營州領郡五縣十一昌黎郡領縣龍城廣興定荒遼東郡領縣二太平新昌建德郡領縣石城廣都營丘郡領縣三富平永安帶方樂良郡領縣一永樂 남영주(5군,11현) - 창려군(509호,용성,광흥,정황), 요동군(565호,태평,新昌), 건덕군(178호,석성,광도), 영구군(512호,부평,영안,대방), 낙랑군(49호,영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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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 0577 제(高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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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577 수서(636) 上谷郡
後齊唯留昌黎一郡領永樂新昌二縣餘並省 창려군을 남겨 영락, 신창 두 현을 다스리게 하고 남영주의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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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577 수서(636) 北平郡
北平郡舊置平州統縣一戶二千二百六十九 북평군은 예전에 평주를 설치했던 곳이다. 1현이다. 盧龍舊置北平郡領新昌朝鮮二縣 노룡은 이전에 북평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신창과 조선 두 현이 있었다. 後齊省朝鮮入新昌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 조선을 신창에 합치고, 요서군을 폐지하여 해양을 비여에 합친 후 북평군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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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577 수서(636) 北平郡
● 위서에는 평주에 2군 5현이 있다고 했다. 요서군(비여,양악,해양), 북평군(조선,창신). 여기서 조선은 신창에 합쳐졌고 해양은 비여에 합쳐져 북평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요서군은 폐지되었다. 따라서 북평군에는 신창과 비여 두 현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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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삼국사기(1145)
봄 2월에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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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 ~ 0618 수(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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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 수서(636) 上谷郡
上谷郡開皇元年置易州 상곡군은 개황 원년에 역주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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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 수서(636) 上谷郡
開皇元年州移 남영주를 옮겼다. -- 역주의 설치와 남영주의 이동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남영주가 역주로 변한 듯하다. 영락과 신창을 포함하는 창려군의 소속도 남영주에서 역주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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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0618 수서(636) 上谷郡 요약
● 拓跋魏(386~534)가 남영주를 설치하여 5군 11현을 두었다. 창려군(용성,광흥,정황), 건덕군(석성,광도), 요동군(양평,신창), 낙랑군(영락), 영구군(부평,대방,영안).  高齊(550~577)가 창려군을 남겨 영락, 신창 두 현을 다스리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隋가 581년에 남영주를 옮겼고 583년에는 창려군을 폐지하였으며 598년에는 신창을 수성으로 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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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0618 수서(636) 北平郡
北平郡舊置平州統縣一戶二千二百六十九盧龍舊置北平郡領新昌朝鮮二縣後齊省朝鮮入新昌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盧龍大業初置北平郡有長城有關官有臨渝宮有覆舟山有碣石有玄水盧水溫水閏水龍鮮水巨梁水有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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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0618 수서(636) 北平郡
북평군은 옛날에 평주를 설치한 곳이다. 거느리는 현이 하나이고 호수는 2,269호다. 노룡은 옛날에 북평군을 설치한 곳이다. 신창, 조선 2현을 거느렸었다. 고제가 조선을 신창에 넣고 또 요서군을 폐지하여 해양현을 비여에 넣어 함께 거느렸다. 개황 6년에 또 비여를 폐지하고 신창에 넣었다. 개황 18년에 노룡으로 개명하였다. 대업초에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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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0618 수서(636) 北平郡
장성이 있고 관관이 있으며 임유궁이 있고 복주산이 있으며 갈석이 있고 현수, 노수, 온수, 윤수, 용선수, 거량수가 있으며 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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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0618 수서(636) 北平郡 요약
● 위서의 평주에는 2군 5현이 있었다. 요서군(비여,양악,해양), 북평군(조선,신창). 高齊가 조선을 신창에 합치고, 요서군을 폐지하면서 해양을 비여에 합친 후 북평군에 넣어, 북평군에는 신창과 비여 두 현이 있게 되었다. 隋는 586년에 비여를 신창에 합쳐, 북평군에는 신창 하나만 남게 되었다. 隋는 598년에 신창을 노룡으로 개명하였다. 隋는 605년 이후 다시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마침내 북평군에는 노룡현 하나만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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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삼국사기(1145)
수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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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 0907 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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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구당서(945) 易州
易州中隋上穀郡武德四年討平竇建德改為易州領易淶水永樂遂城乃五縣五年割乃縣置北義州州廢以乃來屬開元二十三年分置五回樓亭板城三縣天寶元年改為上穀郡復隋舊名乾元元年復為易州舊領縣五戶一萬二千八百二十口六萬三千四百五十七天寶領縣八戶四萬四千二百三十口二十五萬八千七百七十九今領縣六在京師東北二千三百三十四里至東都一千四百六十三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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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구당서(945) 易州
역주(상곡군)에는 易 淶水 永樂 遂城 乃 5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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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구당서(945) 易州
易漢故安縣屬涿郡隋為易縣 容城漢縣屬涿郡改為乃縣武德五年置北義州領乃又割幽州之固安歸義屬之貞觀元年廢北義州三縣各還本屬聖曆二年契丹入寇固守得全因改名全忠縣天寶元年改為容城 遂城漢北新城縣屬中山國後魏改為新昌隋末為遂城 淶水漢乃縣屬涿郡隋屬上穀郡 滿城漢北平縣地後魏置永樂縣隋不改天寶元年改為滿城五回開元二十三年剌史盧暉奏分易縣置城於五回山下因名之二十四年遷於五公城暉又奏置樓亭板城二縣天寶後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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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구당서(945) 易州
수성은 漢의 북신성현이다. 중산국에 속했다. 拓跋魏가 신창으로 개명하였고 隋 말에 수성으로 개명하였다. 만성은 漢의 북평현이다. 拓跋魏가 영락현을 설치했다. 隋도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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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신당서(1060) 平州 北平郡
平州北平郡下初治臨渝武德元年徙治盧龍土貢熊郭蔓荊實人戶三千一百一十三口二萬五千八十六縣三有府一曰盧龍有盧龍軍天寶二載置又有柳城軍永泰元年置有溫溝白望西狹石東狹石綠疇米磚長楊黃花紫蒙白狼昌黎遼西等十二戍愛川周夔二鎮城東北有明垤關鶻湖城牛毛城盧龍中本肥如武德二年更名又置撫寧縣七年省石城中本臨渝武德七年省貞觀十五年復置萬歲通天二年更名有臨渝關一名臨閭關有大海關有碣石山有溫昌鎮馬城中古海陽城也開元二十八年置以通水運東北有千金冶城東有茂鄉鎮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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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신당서(1060) 平州 北平郡
평주 북평군은 처음에 임유에 설치했다가 618년에 노룡으로 옮겼다. 특산물에는 곰, 곽, 만형자 그리고 사람이 있다. 3,113호 25,086구 3현이다. 부가 하나 있는데 노룡이라고 한다. 노룡군이 있는데 743년에 설치했다. 또 유성군이 있는데 765년에 설치했다. 온강, 백망, 서협석, 동협석, 녹수, 미박, 장양, 황화, 자몽, 백랑, 창려, 요서 등 12 수자리가 있다. 애천과 주기 두 진성이 있다. 동북쪽에 명질관, 골호성, 우모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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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신당서(1060) 易州 上穀郡
易州上穀郡上土貢綿墨戶四萬四千二百三十口二十五萬八千七百七十九縣六有府九曰遂城安義脩武德行新安古亭武遂長樂龍水有高陽軍易上容城上本遒武德五年以容城及幽州之固安歸義置北義州貞觀元年州廢縣還故屬聖曆二年以拒契丹更名全忠神龍三年復故名天寶元年又更名遂城上淶水上滿城中本永樂天寶元年更名有郎山有永清軍貞元十五年置五回中下開元二十三年析易置並置樓亭板城二縣天寶後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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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32 史記索隱(司马贞)
大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又水經云在遼西臨逾縣南水中葢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태강지리지에는 '낙랑 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시작된다'고 되어 있고 수경에는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갈석산이 있다'고 되어 있어 두 개의 갈석이 있다. 오른쪽에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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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古冀州上
22군부 127현이 나와 있다. 上谷易八縣易遂城淶水容城滿城五迴樓亭阪城 상곡 8현 - 역, 수성, 내수, 용성, 만성, 오회, 누정, 판성 遂城古武遂也 秦築長城之所起 수성은 옛 무성이다. 秦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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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上谷郡 1
東至范陽郡二百十四里。南至文安郡一百八十里。西至安邊郡飛狐縣一百四十里。北至媯川郡懷戎縣南界廢固城鎮……東南到文安郡一百八十里。西南到博陵郡北平縣一百四十里。西北到安邊郡三百二十里。東北到范陽郡良鄉縣界八十里。去西京二千二百九十七里,去東京一千四百六十二里。戶四萬四千九百十二,口二十四萬五千八百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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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上谷郡 2
동쪽 214리에 범양군이 있고 남쪽 180리에 문안군이 있으며 서쪽 140리에 안변군 비호현이 있고 북쪽으로 규천군 회융현 남쪽에 있는 폐쇄한 성과 진에 이른다. 동남쪽 180리에 문안군에 이르고 서남쪽 140리에 박릉군 북평현에 이르며 서북쪽 320리에 안변군에 이르고 동북쪽 80리에 밤양군 양향현의 경계에 이른다. 서경까지 2297리고 동경까지 1462리이며 44912호에 245807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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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上谷郡 3
易州今理易縣春秋至戰國屬燕秦置上谷郡晉書曰在谷之上頭故曰上谷漢屬涿郡後漢因之晉為范陽國後魏亦為上谷郡隋初置昌黎郡後兼置易州煬帝初州廢置上谷郡大唐因之領縣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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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上谷郡 4
역주는 지금의 역현을 관할하였다.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燕에 속했는데 秦은 상곡군을 설치했다. 진서에는 '골짜기의 꼭대기에 있어 상곡이라 불렀다'고 되어 있다. 漢은 탁군에 소속시켰고 後漢도 그것을 이었다. 晉 때는 범양국이 되었고 拓跋魏 때는 다시 상곡군이 되었다. 隋 초기에 창려군을 설치한 후 역주도 함께 설치했으나 양제 초기에 폐하고 상곡군을 설치했다. 唐도 그것을 이었다. 8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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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上谷郡 5
易漢故安縣故城在今縣南有淶易二水有燕臺昭王求仙處又有漢范陽縣故城在縣東南 遂城古武遂也秦築長城之所起 淶水漢之遒縣遒即由反 容城漢舊縣 滿城 五迴 樓亭 阪城 -- 易 遂城 淶水 容城 滿城 五迴 樓亭 阪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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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上谷郡 6
역현은 漢의 옛 안현이다. 옛 성이 지금 역현의 남쪽에 있다. 내수와 역수 두 강이 있다. 燕의 건물이 있는데 소왕이 신선을 찾던 곳이다. 漢의 범양현 옛 성도 현의 동남쪽에 있다. 수성은 옛 무수다. 秦이 장성을 쌓기 시작한 곳이다. 내수는 漢의 주현이다. 遒는 닥친다는 뜻이다. 용성은 漢의 옛 현이다. 만성. 오회. 누정. 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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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北平郡 1
東至柳城郡七百里南至海二百里西至漁陽郡三百里北至上洽口八十里東南到臨榆關一百八十里西南到馬城縣一百八十里西北到石城縣一百四十里東北到柳城郡七百里去西京四千三百二十里去東京三千五百二十里戶三千三十一口一萬三千七百七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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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北平郡 2
동쪽 7백리에 유성군이 있고 남쪽 2백리에 바다가 있으며 서쪽 3백리에 어양군이 있고 북쪽 8십리에 상합구가 있다. 동남쪽 180리에 임유관이 있고 서남쪽 180리에 마성현이 있으며 서북쪽 140리에 석성현이 있고 동북쪽 700리에 유성군이 있다. 서경까지 4320리고 동경까지 3520리며 3031호에 13775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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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北平郡 3
平州今理盧龍縣殷時孤竹國春秋山戎肥子二國地也今盧龍縣有古孤竹城伯夷叔齊之國也戰國時屬燕秦為右北平及遼西二郡之境二漢因之晉屬遼西郡後魏亦曰遼西郡隋初置平州煬帝初州廢復置北平郡大唐因之領縣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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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北平郡 4
평주는 지금의 노룡현을 관할했다. 殷의 시기에는 고죽국이었다. 춘추시대에는 산융이었고 비자 2국의 땅이었다. 지금은 노룡현이다. 옛 고죽성이 있고 백이 숙제의 나라다. 전국시대에는 燕에 속했다. 秦때는 우북평이 되어 요서 2군의 경내에 들어갔다. 漢이 이를 이었다. 晉은 요서군에 소속시켰고 拓跋魏도 요서군이라 했다. 隋 초기에 평주를 설치했다가 양제 초기에 폐하고 다시 북평군을 설치했다. 唐이 이를 이었다. 3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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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北平郡 5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晉太康地志云秦築長城所起自碣石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也漢遼西郡故城在今郡東又有漢令支縣城臨閭關今名臨榆關在縣城東一百八十里盧龍塞在城西北二百里石城漢舊縣馬城 -- 盧龍 石城 馬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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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北平郡 6
노룡현은 漢의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는데 돌비석처럼 해변에 우뚝 솟아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 晉의 태강지지에 '秦이 갈석에서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의 옛 경계에 있고 이 갈석이 아니다. 漢의 요서군 옛 성이 지금 북평군의 동쪽에 있다. 漢 영지현의 성도 있다. 임려관은 지금의 임유관인데 노룡현 성의 동쪽 180리에 있다. 노룡의 요새는 성의 서북 200리에 있다. 석성현은 漢의 옛 현이다. 마성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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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高句麗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石 갈석산은 낙랑군 遂成縣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남아있다. 상서에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 강으로 들어간다'고 되어있는 우갈석은 강 너머 바다 근처에 있는데 지금의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이므로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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帶方
BC 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BC 0018 삼국사기(1145)   0019 삼국사기(1145)   0020-0023 위략(魏略 265?)   0044 후한서(445)   0082 한서(漢書)   0204-0220 삼국지(289)   0289 삼국지(三國志)   0348 장무이묘   0445 후한서(後漢書)   0648 진서(晉書)   1145 삼국사기(三國史記)   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1909-1921 야쓰이 비망록   대방   봉산대방토성   부귀명전(富貴銘塼)   장무이묘 위성지도   지탑리토성 위성지도   한서보주(漢書補注)   황해도 신천군 새날리  
 
樂浪
BC 045 새로 발견된 樂浪木簡 - 尹龍九   0289 삼국지(三國志)   1909-1921 야쓰이 비망록   1909-1921 야쓰이 비망록   1934년 서울 호구   낙랑   낙랑구역   낙랑대윤장봉니(樂浪大尹章封泥)   낙랑부귀명와당(樂琅富貴銘瓦當)   낙랑예관명와당(樂浪禮官銘瓦當)   낙랑태수장봉니(樂浪太守章封泥)   낙랑토성(樂浪土城)   남사리 154호분   남정리   남정리116호   도제리   석암리   일조시대 평양지도   장진리45호   정백리   조선우위봉니(朝鮮右尉封泥)   토성동45호   한겨레신문: 목간에 새겨진 낙랑군의 실체는?  
 
樂浪公
高句麗의 長壽王과 文咨明王이 樂浪公이라는 封爵을 받고 있으며, 新羅의 경우 眞興王이후 眞智王과 武烈王, 孝昭王을 제외하고는 聖德王까지의 7王이 樂浪郡公 혹은 樂浪郡王이라는 封爵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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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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遂成
0509 魏 給事君夫人 王氏의 墓誌   0513 大魏 給事君夫人 韓氏의 墓誌   0514 魏 故 恒州治中 晉陽男 王君 墓誌銘   0522 魏 故 處士 王君 墓誌銘   0522 魏 故 處士 王君 墓誌銘   0612 삼국사기(1145)   0662 삼국사기(1145)   0667 삼국사기(1145)   0672 삼국사기(1145)   114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삼국사기(三國史記)   1861 대동여지도   遂城 新昌 碣石山  
 
위만조선과 한의 동방침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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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樂浪 金石文   고고학사전 - 벽돌무덤   낙랑군의 문화   낙랑예관명와당(樂浪禮官銘瓦當)   낙랑토성(樂浪土城)   소라리토성( 所羅里土城)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 위성지도   운성리토성(雲城里土城)   장무이묘(張撫夷墓)   장무이묘(張撫夷墓) 위성지도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 위성지도   조선고적도보 1   조선고적도보 2   중국계 토성   지탑리토성(智塔里土城)   지탑리토성(智塔里土城) 위성지도   청산리토성(靑山里土城)   한나라의 무덤문화를 들여온 낙랑   황해도 신천군 새날리  
 
점제 -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성현리에 있는 낙랑 고비. 낙랑군 여러 현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 비의 발견으로 점제현의 위치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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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지 - 한서보주(漢書補注)
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樂鮮亭) 패수는 물이 서쪽으로 흘러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왕망은 낙선정이라 했다. -- 패수가 청천강이라면 증지는 청천강 하구가 될 것이고 패수는 증지보다 조금 더 상류에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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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0265 - 317 진솔선예백장동인(晉率善穢佰長銅印)   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1909-1921 야쓰이 비망록   낙랑군 호구부 연구 - 동북아역사재단   동방변군 각 현의 위치 비정   야쓰이 비망록   왕경   위키백과: 낙랑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참고지도 1   참고지도 2   참고지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임둔군  
 
탄열 - 한서보주(漢書補注)
呑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 분려산에서 열수가 시작되는데 서쪽으로 흘러 점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820리다. -- 열수가 대동강이라면 탄열은 대동강의 발원지가 된다.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된 곳은 대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가까우므로 역시 열수가 대동강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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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낙도(樂都)   남감(□邯)   누방(鏤方)   동이(東暆)   둔유(屯有)   부조(夫租)   불이(不而)   사두매(邪頭昧)   사망(駟望)   소명(昭明) 남신(南新)   열구(列口)   잠태(蠶台)   장잠(長岑)   전막(前莫)   점제(黏蟬)   제해(提奚)   조선(朝鮮)   증지(增地)   탄열(吞列)   패수(浿水)   함자(含資)   해명(海冥)   혼미(渾彌)   화려(華麗)  
 
함자 - 한서보주(漢書補注)
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 함자는 대수가 서쪽으로 흘러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대방이 봉산이라면 대수는 서흥강이 된다. 재령평야는 2천년 전에 바다였으니 대수는 대방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함자는 서흥강의 상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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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을 병합한 漢은 이 지역에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縣으로 만들어 소속시켰다. 서기전 82년 漢은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각각 낙랑군과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이후 현도군이 지속적인 침공을 받자 고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와 濊는 동부도위로 묶어 낙랑에 예속시켰다. 30년에는 동부도위도 폐지하고 토착세력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복잡한 변천과정을 거쳐갔던 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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