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년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245년 한국의 기리영 공격┆311년 미천왕의 서안평 공격┆598년 영양왕의 요서 공격
▐ 모두 중국의 엄청난 반격을 불러와 민중들만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우왕의 요동정벌 또한 실현되었다면 같은 결과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왕의 명을 받아 정벌에 나섰다가 군대를 되돌려 왕을 쫓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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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 梁書(636)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위궁(位宮, 동천왕)을 공격하였다. 위궁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관구검의 군대를 역습하여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싸움에 져 달아나니, 검(儉)의 군대는 추격하여 현(峴)에 이르러 수레를 달아 매고 말을 묶어 환도산에 올라 그 나라의 왕도를 격파하고 1만여명을 목베어 죽이니, 위궁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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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誤記 三國志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馬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마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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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 三國史記(1145)
(수나라의 고려 침공)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 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3대·5성·9시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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