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 "고려의 시조는 동명이 아니다."
▐ 고려의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모두루묘지명,광개토왕릉비),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등으로 나타난다. 騶(한서,후한서)와 騊(삼국지)도 鄒牟의 다른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 東明은 부여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부여의 시조다.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고려의 시조 鄒牟를 東明이라 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현재까지는 삼국사기가 오류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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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7 ± 고려 건국 설화
騶(한서,후한서)┆騊(삼국지)┆鄒牟(광개토왕릉비,모두루묘지명,삼국사기)┆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고을덕묘지명,천남산묘지명,통전,古記,삼국사기)┆仲牟(일본서기)┆都慕(속일본기)┆中牟(안승 책문)┆衆解(삼국사기)┆東明(삼국사기) ▐ 고구려 벽비에는 鄒牟王이 세 차례 언급되는데 鄒牟란 표기는 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명 그리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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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7 夫餘 → 百濟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고려 주몽설화는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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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7 부여·고려 건국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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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7± 부여·고려·百濟 건국설화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고려 주몽설화는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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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7± 부여·고려·百濟 건국설화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고려 주몽설화는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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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고려의 시조는 동명이 아니다
고려의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모두루묘지명,광개토왕릉비),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衆解(삼국사기) 등으로 나타난다. 騶(한서,후한서)와 騊(삼국지)도 鄒牟의 다른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 東明은 부여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부여의 시조다.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고려의 시조 鄒牟를 東明이라 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현재까지는 삼국사기가 오류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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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41+ 奉使高麗記 (翰苑 0660±)
▐ 고려기는 또 압록강을 고려건국설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 淹水로도 인식했는데, 이는 당시 고려의 도읍이 압록강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착각인 듯하다. 건국설화에 고려 건국자가 넘은 강은 광개토왕릉비(414)에 奄利大水라 되어 있고 삼국사기(1145)에는 淹㴲水라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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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三國史記 東明
▐ 삼국사기 이전에 주몽을 동명이라 칭한 사례는 없다. 삼국사기가 인용한 사서에도 부여 동명설화와 고려 주몽설화가 별개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삼국사기는 주몽을 동명이라 칭했다. 그렇게 하면 주몽설화가 동명설화를 베낀 사실이 가려지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이전부터 왕고에서는 주몽을 동명으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또한 왕고가 고려를 실질적으로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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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三國史記 高句麗 3
▐ 扶餘에서 동해에 이르는 길은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가장 자연스럽다. 따라서 東扶餘는 두만강 하류에 있었던 듯하다. 이곳은 삼국지(289)에서 北沃沮로 불리던 지역으로 광개토왕릉비(414)에는 東夫餘로 나타난다. 추모왕 시기에는 동부여가 없었고 광개토왕릉비(414)부터 삼국사기(1145) 이전의 기록에 실려있는 어떤 추모설화에도 동부여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추모설화에 나오는 동부여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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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홍원탁 (4)
▶맥고려의 건국 설화는 대화왜의 건국 설화와 전혀 다르다. 맥고려의 건국 설화는 하늘이 햇볕으로 지상의 여성을 임신시킨다는 이야기로 Perseus나 Jesus 설화와 유사하다. 대화의 건국 설화는 하늘의 자손이 산 위로 내려온다는 이야기로 수로 설화나 단군 설화와 유사하다. 맥고려와 대화왜의 건국 설화는 근본적으로 계통이 다른 설화라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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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❶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한서(82)의 騶와 광개토왕릉비(414)의 鄒牟는 발음이 비슷하다. 鄒牟의 다른 표기와 비교해 보면 이것을 실감할 수 있다. ┆騶(한서,후한서)┆騊(삼국지)┆鄒牟(광개토왕릉비,모두루묘지명,삼국사기)┆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고을덕묘지명,천남산묘지명,통전,古記,삼국사기)┆仲牟(일본서기)┆都慕(속일본기)┆中牟(안승 책문)┆衆解(삼국사기)┆東明(삼국사기)┆ 모두루묘지명(450±)에는 冉牟라는 명칭이 나오므로 牟가 이름에 접미사처럼 붙는 말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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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檀君朝鮮 04
비서갑 신녀를 맞아 왕후로 삼았다(혹은 河伯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고도 한다.) ▐ 河伯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는 이야기는 고려 건국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천제와 하백의 딸 사이에서 고려 건국자 추모가 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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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건국 설화
통전(801)에는 고구려가 후한에 와서 號曰句麗以髙為氏라고 소개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위서(554), 주서(636), 수서(636), 북사(659) 그리고 삼국사기(1145)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모두 이를 계승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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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건국 설화
고려의 건국 장소는 사서에 따라 紇升骨城(위서,북사,통전,삼국사기), 紇斗骨城(주서), 卒本(古記,삼국사기), 忽本(광개토왕릉비) 등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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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건국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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