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5 三國史記(1145)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雞林으로 고치고 국호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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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4 魏書 高麗朱蒙說話
▐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그 국호에서 왕성을 따왔다(號曰高句麗 因以為氏焉)는 이야기는 광개토왕릉비(414)에 없는 이야기다. 한서(82)에 현도군의 현으로 高句驪가 나타나기 때문에 국호는 거기에서 나왔을 것이고 高氏 왕성은 407년 즈음에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그때쯤 국호에서 따와서 썼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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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81 匈奴 → 新羅 ✘
훗날 金氏 성을 쓰게 되는 斯盧의 한 가문은 마한이 망한 뒤 처음으로 왕을 배출하였는데, 가문을 신성화하기 위해 閼智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국명을 雞林으로 바꾸었다. 이 가문은 원래 성이 없었는데, 임나를 병합한 뒤 金氏 성을 쓰고 閼智의 아들 勢漢을 太祖로 숭상하기 시작했다. 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閼智 대신 匈奴 왕자 金日磾와 삼황오제의 少皥金天을 먼 조상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중국의 명문가에 기대어 가문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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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01 通典 高麗朱蒙說話
▐ 고려가 後漢에 알려준 이야기라고 하나 고려의 왕성은 407년 즈음에야 처음 나타나고 건국설화 또한 중국에서는 魏書(554)에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後漢은 後魏의 오기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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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0065 三國史記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雞林으로 고치고 국호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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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姓氏
한국 성씨의 특징은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남 지역에서 출발한 신라가 반도를 통일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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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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