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5. 고려는 우리 역사인가? > (2) 백제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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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백제의 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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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0 후한서(445)
부여가 사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서 조공을 바치므로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채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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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0 요흑사
요동태수 공손탁(공손도)이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을 칭하며 한(漢)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부여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 들였다. 그의 아들 공손강에 이르러서는 고려를 침공하고 낙랑군에서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떼어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던 한(漢)의 유민을 모으고 한(韓)과 예(濊)를 침공하여 대방에 복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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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0~0204 삼국지(289)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탁(공손도)이 해동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들을 위력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탁(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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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20 삼국지(289)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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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ᑀ 삼국지(三國志 289) 동이 설명 시점
공손연까지 3대가 계속 요동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역을 포기하고 해외를 맡겼다. 그 결과 동이와의 관계가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경초 연간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되찾았다. 그러자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므로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 매우 먼 지방까지 쫓으니 오환과 골도를 넘고 옥저를 거쳐 숙신의 왕정을 짓밟고 동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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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ᑀ 삼국지(三國志 289) 동이 설명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 바다가 경계이고 남으로 倭와 접한다.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伯濟國을 비롯한 54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 천 집인데 합하면 10여만 집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斯盧國을 비롯한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변한도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큰 나라는 4-5천 집이고 작은 나라는 6-7백 집이어서 합하면 4-5만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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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라고 하였다.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忽本)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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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고려 건국 설화
부여 건국 설화를 본떠 고려 건국 설화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부여 건국 설화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후 두 설화가 공존하게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와서는 고려 건국 설화의 추모가 부여 건국 설화에 나오는 이름인 동명으로도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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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위서(554)
"신(臣, 개로왕)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쇠(釗 고국원왕)가 이웃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인 수(須 근초고왕)가 쇠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으니,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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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8 삼국사기(1145)
서울을 사비(다른 이름은 소부리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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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 일본서기(720)
"성(姓)은 (고려 왕실과)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간솔이며 나이는 29세이다." -- 위덕왕이 왕자 시절에 고려 장수에게 한 말이다. 당시 백제는 여(餘)씨 성을 사용하였고 고려는 고(髙)씨 성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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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위서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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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주서
百濟者其先蓋馬韓之屬國夫餘之別種有仇台者始國於帶方故其地界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하다.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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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구태설 (1) - 주서
(1)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요동의 공손도가 딸을 부여왕 위구태와 결혼시켜 부여를 자신의 영향권에 묶어 두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2)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은 낙랑의 남쪽을 떼어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3) 백제는 472년에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부여의 후손을 자처하였고 538년에는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결합하여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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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 - 고려
부여왕이 하백의 딸을 방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볕에 감응하여 알을 낳았다.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자라서 사냥을 잘 하자 신하들이 죽일 것을 왕에게 권했다. 어머니가 이를 알려주니 주몽은 동남쪽으로 달아나다 강을 만나 '나는 하백의 외손이요 태양의 아들이다'고 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 올라 건너갔다. 스스로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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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 - 백제 1
백제의 선대는 고려국에서 나왔다. 왕의 한 시녀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어 왕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달걀같이 생긴 물건이 나에게 내려와 닿으면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고 하자 놓아 주었다. 뒤에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뒷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신령스럽게 여겨 기르도록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장성하자 왕이 시기를 하므로 동명은 도망가서 엄수(淹水)에 이르렀는데 부여 사람들이 그를 모두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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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 - 백제 2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爲東夷强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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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 - 백제 2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가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백제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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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 - 백제 3
백제는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도성 안에 세워 놓고, 해마다 네번씩 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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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구태설 (2) - 수서
수서에는 주서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 (1) 주서에는 백제가 부여의 별종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수서에는 부여의 건국 설화인 동명 설화를 소개해 놓고 구태가 그 동명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2) 삼국지에는 부여왕 위구태가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수서에는 백제의 시조 구태가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되어 있다. (3) 백가가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4) 구태의 사당을 도성에 지어놓고 해마다 제사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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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북사 - 고려
부여왕이 하백의 딸을 방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볕에 감응하여 알을 낳았다.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자라서 활을 잘 쏘자 신하들이 죽일 것을 왕에게 권했다. 어머니가 이를 알려주니 주몽은 동남쪽으로 달아나다 강을 만나 '나는 하백의 외손이요 태양의 아들이다'고 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 올라 건너갔다.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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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북사 - 백제 1
백제국은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 출행 중에 시녀가 임신하자 죽이려고 하였다. 시녀는 “하늘에서 달걀만한 기운이 내려 와 임신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아들을 낳으매 돼지 우리와 마굿간에 버렸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주었다. 기르도록 하고 동명이라 불렀다. 활을 잘 쏘자 꺼려서 다시 죽이려 하였다. 도망하여 남쪽의 엄체수(淹滯水)에 다다라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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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북사 - 백제 2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건너 왔다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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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북사 - 백제 3
백제는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도성 안에 건립해 놓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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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9 속일본기(797)
그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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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0 속일본기(797)
백제왕인정, 백제왕원신, 백제왕충신, 진련진도 등이 표를 올려, “저희들은 본계가 백제국 귀수왕에서 나왔습니다. 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대 왕입니다. 대저 백제의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천제가 녹을 주어 모든 한(韓)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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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0¦속일본기 분석
하백의 딸 이야기는 동명 설화에는 나오지 않고 추모 설화에만 나온다. 따라서 속일본기에서 말하는 도모는 동명이 아니라 추모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 후손들의 이야기는 백제가 그 추모를 시조로 여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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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1) 주몽설 1
동부여왕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정을 통했다는 하백의 딸을 가두었는데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추어 알을 낳게 했다. 알에서 나온 주몽은 활을 잘 쏘아 왕자들의 시기를 받고 도망가게 되었다. 엄사수에 이르러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추격자를 따돌리고 건너갔다.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고 성도 고씨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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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1) 주몽설 1
금와가 태백산 남쪽에서 한 여자를 만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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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2) 주몽설 2
북부여의 주몽(朱蒙)이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와 부여왕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는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두 사람은 남쪽으로 가서 미추홀과 위례성에 각각 나라를 세웠다. 나중에 합쳐서 백제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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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3) 우태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자인 우태(優台)는 졸본 사람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가 죽고 나서 소서노는 부여에서 도망온 주몽에게 시집을 가서 고구려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유류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남쪽의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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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3) 우태설
살펴보건데 (백제 시조에 대해서) 海東古記에는 혹은 시조 동명(東明)이라 하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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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3) 우태설
-- 해동고기에 우태(優台)라는 표기가 등장하면서 구태(仇台)와 다른 별개의 인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부여와 남부여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오류도 깨닫기 어렵게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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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4) 구태설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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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4) 구태설
책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늘 4계절의 중간 월마다 왕이 하늘 및 5제의 신을 제사지낸다. 그 시조 구태(仇台)의 묘를 국성에 세우고 해마다 4번 제사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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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 동명 (1)
살펴보건데 (백제 시조에 대해서) 海東古記에는 혹은 시조 동명(東明)이라 하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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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 동명 (2)
(백제) 온조왕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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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 동명 (3)
(백제) 다루왕 2년 봄 정월에 시조 동명의 묘에 아뢰었다. 책계왕 2년 봄 정월·분서왕 2년 봄 정월·계왕 2년 여름 4월·아신왕 2년 봄 정월·전지왕 2년 봄 정월에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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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 동명 (4)
(고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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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의 동명
해동고기에 백제의 시조를 동명이라 했는데, 삼국사기 편찬자가 해동고기가 말한 백제의 시조를 추모로 착각하면서, 삼국사기에서 추모를 동명으로 표기한 게 아닐까? 백제는 온조왕 원년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온조는 추모가 왕위에 있을 때 고려에서 나와 백제를 세웠으므로 원년에 추모의 사당을 세우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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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
북사와 통전에 모두, “백제가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국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우태의 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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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
옛 사책(통전 및 책부원구, 북사, 수서 등 사책을 가리킨다)에 분명히 시조 우태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지냈다고 썼으니, 동사(東史)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사씨(史氏)가 기록에 빠뜨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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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의 오류
동사강목은 우태설을 역사적 사실로 보고 구태설은 우태를 구태로 착각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우태설과 구태설은 이름만 다른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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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水/漢城/漢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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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5#1905 COMMENT
 
¦백제의 기원
부여에서 나온 추모가 고려 왕조를 세웠고 그 아들이 갈라져 나가 백제 왕조를 세웠다. 따라서 두 왕조의 건립 시기는 한 세대 차이가 난다. 추모가 서기 12년에 살해되었으니 백제 왕조의 건립도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기원전 18년에서 크게 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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