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安社 → 李行里 → 李椿 → 李子春 → 李成桂
李行里는 1281년에 본소 사람들을 뽑아 일본 정벌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진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자 1290년에 宜州로 옮겨오니 孔州의 백성들이 따라왔다. 1300년에 원나라는 李行里를 承仕郞으로 제수하고 雙城 등지의 고려인을 다스리는 達魯花赤의 일을 맡겼다. 李椿이 아버지 李行里의 관직을 이었다가 1342년에 죽자 그 아들 李子興이 이었고 이듬해에 李子興이 죽자 그 동생인 李子春이 이었다. 그가 李成桂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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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명교체기
고대 예가 있던 곳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고 고대 조선과 낙랑이 있던 곳에 동녕부가 설치되었다. 요동에서 압록강 유역을 가로질러 예에 이르던 길은 쌍성총관부가 원나라의 개원로와 교통하는 길이 되었고 명나라가 철령을 설치하러 오는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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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8~1356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는 몽골의 직할지였다. 한사군에 한족이 이주해왔던 것처럼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도 달단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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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9~1290 동녕부
몽골은 왕씨고려를 존속시켜 주었지만 수탈은 일본통치기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심했다. 위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몽골은 왕고의 북부 지역을 한때 자신의 직할지로 편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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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9 쌍성총관부는 화령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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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0¦
▐ 동녕부는 1290년에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겨갔다. 황성, 압록강, 황해 그리고 동녕부로 둘러싸인 지역은 옛 맥의 영역이다. 이오로첩목아가 말하는 고려는 왕씨고려가 아니라 맥고려를 뜻하는 듯하다. 낙랑고려가 망한 뒤에도 貊은 발해 시기의 압록부와 요나라 시기의 정안국으로 이어졌으며 14세기에도 왕고에서 북방의 한 종족으로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貊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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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0¦@쌍성총관부와 @우라산성
1356년에 쌍성총관부를 되찾은 데 이어 1370년에는 압록강 건너 우라산성을 정벌하였다. 이때 동쪽으로는 황성, 북쪽으로는 동녕부, 서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의 주민들이 대거 왕고로 귀순하여 이 지역은 텅 비게 되었다. 적어도 1370년 직전에는 동녕부와 압록강 사이의 지역이 왕고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는 광개토왕릉비를 지날 때 금황제의 비로 인식했고 우라산성은 이성계에게 투항할 때 고려의 후손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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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7 @철령위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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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2 이씨왕조의 뿌리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전주의 토착 세력이었는데 관기의 문제로 다툼이 생기자 함경도로 도피하였다. 이후 그곳이 원나라의 통치 하에 들어가자 원나라에 부역하였다. 이안사가 원나라로부터 받은 벼슬은 이행리와 이춘 그리고 이자춘으로 세습되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퇴하자 이자춘은 왕씨고려의 편에 붙어 원나라의 잔당을 퇴치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그 이자춘의 아들이 이성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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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4.15 복기대 비판 ②
▐ 명나라가 설치한 철령위는 철령에 있지 않을 수 있다. 1388년 2월에 명나라가 철령 이북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고 했을 때, 우왕이 표문을 올려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원래 왕고의 땅이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다툼의 대상이 된 지역은 영흥만이 분명하다.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강계에까지 이르렀으나 강한 반발에 부딪히자 집안에 머무르며 그곳에 임시로 철령위를 설치했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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