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州의 李安社는 170여 집을 이끌고 三陟을 거쳐 宜州로 가 살았는데 왕고는 그를 宜州兵馬使로 삼아 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散吉大王이 雙城에 주둔하자 그는 1천여 집과 함께 항복하고 종친의 딸을 散吉에게 시집보낸 뒤, 時利를 거쳐 斡東으로 옮겨갔다. 이때가 1254년이었다.
1255년에 원나라는 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그를 南京 등처 五千戶所의 首千戶로 삼고 達魯花赤을 겸하게 하였다.
1274년에 李安社가 죽자 이듬해에 아들 李行里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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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安社 → 李行里 → 李椿 → 李子春 → 李成桂
李行里는 1281년에 본소 사람들을 뽑아 일본 정벌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진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자 1290년에 宜州로 옮겨오니 孔州의 백성들이 따라왔다.
1300년에 원나라는 李行里를 承仕郞으로 제수하고 雙城 등지의 고려인을 다스리는 達魯花赤의 일을 맡겼다.
李椿이 아버지 李行里의 관직을 이었다가 1342년에 죽자 그 아들 李子興이 이었고 이듬해에 李子興이 죽자 그 동생인 李子春이 이었다.
그가 李成桂의 아버지다.
1960#8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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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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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정도전(鄭道傳)이 쓴 《고려사》의 고려 말엽에 대한 왜곡된 기록은 단번에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선(朝鮮)이 건국할 때 하늘과 사람이 귀의(歸依)하였습니다.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이 왕씨(王氏)였느냐 신씨(辛氏)였느냐를 분변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 무리들이 기어코 옛날의 신하들을 넘어뜨리려고 이 의논을 제창하였던 것입니다.
1960#40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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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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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이성계는 스스로 조선의 후예를 자처했으나 전주이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당나라에서 왔다는 주장과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주장도 있어 명확하지 않다. 시조 이한은 신라 문성왕(재위 839-857)때 사공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이한의 18세손 이안사는 전주에 살았는데, 산성 별감이 객관에 들었을 때 관기의 문제로 인하여 주관과 틈이 생겼다. 주관이 안렴사와 함께 군사를 내어 해치려 하므로 삼척현으로 피해 갔다 ...
1960#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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