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012 高句麗 > 0918 왕씨고려 > (6) 이성계

全州의 李安社는 170여 집을 이끌고 三陟을 거쳐 宜州로 가 살았는데 왕고는 그를 宜州兵馬使로 삼아 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散吉大王이 雙城에 주둔하자 그는 1천여 집과 함께 항복하고 종친의 딸을 散吉에게 시집보낸 뒤, 時利를 거쳐 斡東으로 옮겨갔다. 이때가 1254년이었다. 1255년에 원나라는 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그를 南京 등처 五千戶所의 首千戶로 삼고 達魯花赤을 겸하게 하였다. 1274년에 李安社가 죽자 이듬해에 아들 李行里가 이었다.
 
  李安社 → 李行里 → 李椿 → 李子春 → 李成桂
李安社 → 李行里 → 李椿 → 李子春 → 李成桂
李行里는 1281년에 본소 사람들을 뽑아 일본 정벌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진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자 1290년에 宜州로 옮겨오니 孔州의 백성들이 따라왔다. 1300년에 원나라는 李行里를 承仕郞으로 제수하고 雙城 등지의 고려인을 다스리는 達魯花赤의 일을 맡겼다. 李椿이 아버지 李行里의 관직을 이었다가 1342년에 죽자 그 아들 李子興이 이었고 이듬해에 李子興이 죽자 그 동생인 李子春이 이었다. 그가 李成桂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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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조선왕조실록: 태조 이성계 선대의 가계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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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다루가치가 된 이안사
원나라에서 〈목조(穆祖)를 위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금패(金牌)를 내려 주어 남경(南京) 등처(等處)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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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11.29 명나라에 국호에 대한 재가요청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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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02.15 명나라 홍무제의 회보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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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03.09 국호를 승인한 은혜에 사례
옛날 기자(箕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朝鮮)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陳述)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유음(兪音)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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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02.19 명나라에 보낸 이성계의 해명
念臣先世 本朝鮮遺種 至臣二十二代祖翰 仕新羅爲司空 及新羅亡 翰六代孫兢休入高麗 兢休十三代孫安社仕于前原 是臣高祖 신의 선대는 본디 조선의 유종인데, 신의 22대 조상 이한에 이르러 신라에 벼슬하여 사공이 되었으며, 신라가 망하자 이한의 6대 손인 이긍휴가 고려에 들어와 벼슬하였으며, 이긍휴의 13대 손인 이안사가 전대의 원나라에 벼슬했으니, 이 분이 신의 고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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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17> 전주이씨(全州李氏)
전주이씨에 대해선 외래 성씨라는 주장과 토착 성씨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즉,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에 대해 ‘당나라 도래설’과 ‘경주이씨 분적설’이 공존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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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하여 신라 문성왕(839-857)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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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정도전(鄭道傳)이 쓴 《고려사》의 고려 말엽에 대한 왜곡된 기록은 단번에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선(朝鮮)이 건국할 때 하늘과 사람이 귀의(歸依)하였습니다.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이 왕씨(王氏)였느냐 신씨(辛氏)였느냐를 분변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 무리들이 기어코 옛날의 신하들을 넘어뜨리려고 이 의논을 제창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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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멸족
1392.08.07 왕요를 공양군으로 봉하다1394.01.17일 왕씨를 거제도로 이배1394.03.14 공양군 3부자 삼척안치1394.04.14일 왕씨일족 제거결정1394.04.15 강화도 왕씨일족 수장1394.04.17 공양군과 두 아들 교살1394.04.20 중앙과 지방의 왕씨제거1394.04.20일 거제도 왕씨일족 수장주간조선: 그 많던 왕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이성계
이성계는 스스로 조선의 후예를 자처했으나 전주이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당나라에서 왔다는 주장과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주장도 있어 명확하지 않다. 시조 이한은 신라 문성왕(재위 839-857)때 사공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이한의 18세손 이안사는 전주에 살았는데, 산성 별감이 객관에 들었을 때 관기의 문제로 인하여 주관과 틈이 생겼다. 주관이 안렴사와 함께 군사를 내어 해치려 하므로 삼척현으로 피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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