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 出玄菟 從諸道討之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宮軍破走
검은 현도를 나와 모든 길을 따라 토벌하였다. 비류수를 거스러 올라온 궁과 량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궁의 군대가 패하여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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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가령(趙哥嶺)
두류산 남쪽에 있는 조가령은 압록강의 지류인 허천강과 동해로 흘러가는 대천이 갈라지는 곳이다. 고대인들은 맥고려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이곳까지 온 다음 다시 대천을 따라 내려가 옥저를 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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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6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편안케 하였다.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단지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 압록강 유역은 -75년부터 이미 한나라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244년에 조위의 침공을 받았을 때 동천왕이 도주했다는 鴨渌原이 이곳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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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영흥만
지형상 영흥만은 하나의 문화권으로 보이는데 별개의 종족인 예와 옥저에 의해 양분되어 점유되는 것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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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不耐縣
245년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도읍을 점령하고 현도태수 왕기로 하여금 도주하는 동천왕을 쯫게 하였는데, 왕기는 옥저를 파괴하고 숙신까지 쫓다가 돌아갔다. 같은 해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군대를 일으켜 단단대령 동쪽의 예를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만약, 옥저와 예가 모두 영흥만에 있었다면 왕기는 옥저를 정벌하고 인접한 예는 먼 낙랑과 대방에서 군대를 보내 정벌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매우 어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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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三國志(289) 毌丘儉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世語曰 頎字孔碩 東萊人 晉永嘉中大賊王弥 頎之孫)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245년에 다시 정벌하니 궁은 매구(북옥저)로 도망갔다. 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쫓게 했는데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바위에 공을 새기고 또 환도산에 새기기를 불내성이라 명명하였다. 죽이고 사로잡은 게 모두 8천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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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4 三國志(289) 毌丘儉 04
宮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궁은 처자식만 데리고 도망갔고 검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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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4 三國志(289) 毌丘儉 03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臣松之案東夷傳 沛者 句驪國之官名) 宮不從其言 得來歎曰 立見此地將生蓬蒿 遂不食而死 舉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구려의 패자는 이름이 득래인데 궁에게 수차례 간하였으나 궁은 듣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이 땅에 장차 쑥이 자라는 걸 보게 되리라'며 굶어 죽었다. 검이 군사들에게 그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며 잡힌 그의 처자식은 풀어 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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