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012 貊·樂浪高麗史 > 0668 고려의 해체

왕조, 백성 그리고 영토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고려가 망한 후 고려 왕조를 구성했던 지배세력은 대부분 당나라의 귀족이나 관리로 편입되었고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 일반 사람들도 대부분 당나라로 사민을 당했다. 그러나 맥, 예, 옥저, 부여 등 대부분의 고려 영토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0501 三國史記(1145) 三韓
三韓古記 無牟都爲王之事 삼한고기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1940#33496 SIBLINGS CHILDREN 33496
 
0611 三國史記(1145) 三國
노인이 이에 “자네는 어리지만 삼국을 병합할 마음(并三國之心)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장하지 아니한가?”라고 하며 곧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게. 만약 의롭지 못한 데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네.”라고 말하였다. 말을 끝마치고 작별하였는데 2리 정도 갔을 때 쫓아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있어 오색과 같이 찬란하였다.
1940#5607 SIBLINGS CHILDREN COMMENT 5607
 
0643 三國史記(1145) 三國
我實哀爾爲二國所侵 所以頻遣使人 和爾三國 나는 너희가 두 나라로부터 침략당하는 것을 매우 가엾게 여겨서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1940#5609 SIBLINGS CHILDREN 5609
 
0651 舊唐書(945) 三國
(백제 의자왕에게 보내는 당 고종의 조서) 海東三國은 개국한지 오래이며, 국토가 나란히 있어 실로 개의 이빨처럼 국경이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소. 근래에 와서 드디어 국경을 다투고 침공을 하여 조금도 편안할 해가 없었소.
1940#5586 SIBLINGS CHILDREN 5586
 
0651 舊唐書(945) 三韓
마침내 三韓之氓으로 하여금 목숨이 도마 위에 놓이게 하고, 창을 찾아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거듭되니, 짐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 깊이 안타까워하는 바이오.
1940#33523 SIBLINGS CHILDREN 33523
 
0668 舊唐書(945)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即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고려는 부여의 별종에서 나왔다. 도읍은 평양성인데 한나라 낙랑군 옛 땅이다. 장안에서 5100리다.
1940#15992 SIBLINGS CHILDREN 15992
 
0668.09 新唐書(1060)
장(藏 보장왕)과 남건 등을 사로잡고 5부의 176성과 69만호를 몰수하였다. 조서를 내려 적(勣)에게 지름길을 택하여 소릉(당태종의 무덤)에 헌부하고 개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1940#39630 SIBLINGS CHILDREN COMMENT 39630
 
0668.09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總章元年九月 司空李勣平高麗
1940#39629 SIBLINGS CHILDREN COMMENT 39629
 
0668.09.21 三國史記(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1940#4513 SIBLINGS CHILDREN COMMENT 4513
 
0668.12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高麗本五部 一百七十六城 戶六十九萬七千 其年十二月 分高麗地為九都督府 四十二州 一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統之 用其酋渠為都督刺史縣令 令將軍薛仁貴以兵二萬鎮安東府 고려는 본래 5부 176성 697,000호다. 그해 12월에 고려 땅을 갈라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만들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 우두머리를 도독, 자사 그리고 현령으로 기용하고 령장군 설인귀로 하여금 2만 병력으로 안동부를 뒷받침하게 하였다.
1940#20393 SIBLINGS CHILDREN 20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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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0668.12 新唐書(1060)
그 나라의 땅을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분할하였다.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추거(추장)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독, 자사, 령에 각각 제수하여 화관(華官)과 더불어 참치하게 하였다. 설인귀를 도호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케 하였다.
1940#39631 SIBLINGS CHILDREN COMMENT 39631
 
0669 新唐書(1060)
고려민 3만명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고려의 대장 겸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보장왕의 외손 안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주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에서 쳐부수고 신라의 원병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은 그들을 발로하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한 수가 1만에 이르렀다. 평양의 패잔병들은 신라로 망명하였다.
1940#26575 SIBLINGS CHILDREN COMMENT 26575
 
0669.05 舊唐書(945)
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車一千八十乘,牛三千三百頭,馬二千九百匹,駝六十頭,將入內地,萊、營二州般次發遣,量配于江、淮以南及山南、並、涼以西諸州空閒處安置。고려의 2만 8천호와 수레 1천 80승, 소 3천 3백두, 말 2천 9백필, 낙타 60두를 내지로 끌고 왔다. 내주, 영주 2주 백성을 보내어 강회 이남과 산남에 병주, 양주의 서쪽 빈터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1940#34917 SIBLINGS CHILDREN COMMENT 34917
 
0670.04 三國史記(1145)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인 대형(大兄) 모잠(牟岑)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 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大臣)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보고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1940#26574 SIBLINGS CHILDREN COMMENT 26574
 
0673 三國史記(1145) 三韓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大平 亦可謂小康 삼한이 한 집안을 이루었으니 백성들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또한 세상이 안정되었다고는 할 만하옵니다.
1940#1173 SIBLINGS CHILDREN COMMENT 1173
 
0676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上元三年二月 移安東府於遼東郡故城置 요동군 옛 성으로 안동부의 치소를 옮겼다.
1940#15079 SIBLINGS CHILDREN 15079
 
0676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去京師四千六百二十五里 至東都三千八百二十里 장안에서 4625리고 낙양에서 3820리다. ▐ 동일 사서에서 장안에서 평양까지 거리가 5100리라 하였으므로 장안에서 4625리는 분명 평양까지가 아니다. 신당서(1060)에서 양평을 안동도호부의 대표 치소로 여긴 것으로 보아 이 4625리도 양평까지의 거리인 듯하다. 후한서(445)에서 낙양에서 양평까지 3600리라 되어 있어 여기에 나오는 3820리와 비슷하므로 이를 뒷받침한다.
1940#33539 SIBLINGS CHILDREN 33539
 
0676~0686 舊唐書(945) 高氏君長
儀鳳中 高宗授高藏開府儀同三司遼東都督 封朝鮮王 居安東 鎮本蕃為主 高藏至安東 潛與靺鞨相通謀叛 事覺 召還 配流邛州 並分徙其人 散向河南隴右諸州 其貧弱者留在安東城傍
1940#33551 SIBLINGS CHILDREN 33551
 
0676~0686 舊唐書(945) 高氏君長
676년과 678년 사이에 보장왕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서 살며 본번을 진무하는 주로 삼았다. 보장왕은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소환하여 공주로 유배시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과 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1940#33552 SIBLINGS CHILDREN 33552
 
0676년 전후
0676년 전후
당이 물러간 676년의 상황을 보면, 신라의 북쪽 경계는 고려가 존재할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진흥왕때 차지했던 예는 오히려 잃었다. 이후 신라는 조금씩 영토를 넓혀나가 762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대방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공고히 할 수 있었다.
1940#5588 SIBLINGS CHILDREN COMMENT 5588
 
0677 新唐書(1060)
儀鳳二年 授藏遼東都督 封朝鮮郡王 還遼東以安餘民 先編僑內州者皆原遣 徙安東都護府於新城 藏與靺鞨謀反 未及發 召還放邛州 廝其人於河南隴右 弱窶者留安東 藏以永淳初死 贈衛尉卿 葬頡利墓左 樹碑其阡 舊城往往入新羅 遺人散奔突厥靺鞨 由是高氏君長皆絕
1940#26576 SIBLINGS CHILDREN COMMENT 26576
 
0677 新唐書(1060)
보장왕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보장왕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여 공주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들은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노약하고 빈곤한 자는 안동에 머물러 두었다. 예전의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었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1940#33513 SIBLINGS CHILDREN 33513
 
0677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儀鳳二年 又移置於新城 신성으로 치소를 옮겼다.
1940#15080 SIBLINGS CHILDREN 15080
 
0679~0779 고려유민 묘지명
▐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후손인 천남생, 천남산 그리고 천헌성의 무덤은 모두 낙양에 있다. 이들의 성이 泉인 이유는, 당나라에 투항한 후 당나라 초대 황제 李淵의 이름으로 쓰인 한자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 천남생에 대해서는 遼東郡平壤城人이라 하고 천남산에 대해서는 遼東朝鮮人이라 하였으며 천헌성에 대해서는 其先高句驪國人이라 하여 고려를 요동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40#1749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682 舊唐書(945) 高氏君長
高藏以永淳初卒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於頡利墓左賜以葬地 兼為樹碑
1940#33553 SIBLINGS CHILDREN 33553
 
0685~0688 新唐書(1060)
垂拱中 以藏孫寶元為朝鮮郡王
1940#33510 SIBLINGS CHILDREN 33510
 
0686 舊唐書(945) 高氏君長
垂拱二年 又封高藏孫寶元為朝鮮郡王
1940#33554 SIBLINGS CHILDREN 33554
 
0690.691 舊唐書(945)
당시의 혹리 내준신이 일찌기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이 거절하여 답을 아니한 적이 있었다. 드디어 준신의 원한을 사게 되어 모반했다고 무고하므로 목졸라 죽였다. 뒤에 측천무후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에 추증하고 예을 갖추어 개장하였다.
1940#39628 SIBLINGS CHILDREN COMMENT 39628
 
0692 三國史記(1145) 三韓
然念先王春秋頗有賢德况生前得良臣金庾信同心爲政一統三韓³其爲功業不爲不多 생각하건대 선왕 춘추는 매우 훌륭한 덕을 지닌 분이시다. 더구나 살아생전에 김유신이라는 어진 신하를 얻어 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써 삼한³을 통일하였으니 그가 이룬 업적이 많지 않다 할 수 없다.
1940#1166 SIBLINGS CHILDREN 1166
 
0694 三國史記(1145)
겨울에 松岳城과 牛岑城을 쌓았다.
1940#33503 SIBLINGS CHILDREN 33503
 
0698 舊唐書(945)
聖歷元年 進授左鷹揚衛大將軍 封為忠誠國王 委其統攝安東舊戶 事竟不行 698년에 (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에 진수시키고 충성국왕에 봉하였다. 안동의 구호를 맡겨 통섭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1940#34915 SIBLINGS CHILDREN COMMENT 34915
 
0698.06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聖歷元年六月 改為安東都督府 안동도독부로 고쳤다.
1940#6534 SIBLINGS CHILDREN 6534
 
0698~0699 新唐書(1060)
明年 以藏子德武為安東都督 後稍自國 이듬해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으니 이 뒤로 조금씩 나라의 틀이 잡혀갔다.
1940#33512 SIBLINGS CHILDREN 33512
 
0698⁺ 新唐書(1060)
聖歷初 進左鷹揚衛大將軍 更封忠誠國王 使統安東舊部 不行 좌응양위대장군에 진수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에 봉하여 안동구부를 통섭시키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1940#33511 SIBLINGS CHILDREN 33511
 
0698⁺ 新唐書(1060) 安東都護府
明年 以藏子德武為安東都督 後稍自國 이듬해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으니 이 뒤로 조금씩 나라의 틀이 잡혀갔다.
1940#33514 SIBLINGS CHILDREN 33514
 
0698년 이후
0698년 이후
668년 고려가 망할 때 왕과 귀족을 비롯한 낙랑고려의 핵심 세력은 모두 요서의 영주로 끌려갔다. 그리고 698년에 발해가 세워지자 고려에 속했던 맥, 예, 옥저 그리고 부여는 모두 발해의 영역이 되었다.
1940#5591 SIBLINGS CHILDREN COMMENT 5591
 
0699 舊唐書(945) 高氏君長
二年 又授高藏男德武為安東都督 以領本蕃 自是高麗舊戶在安東者漸寡少 分投突厥及靺鞨等 高氏君長遂絕矣 699년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에 제수하여 본번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동에 있는 고려의 구호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과 말갈 등에게로 흩어지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1940#33555 SIBLINGS CHILDREN 33555
 
0705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神龍元年 復為安東都護府 안동도호부로 되돌렸다.
1940#15082 SIBLINGS CHILDREN 15082
 
0713.12 三國史記(1145)
開城을 쌓았다.
1940#33504 SIBLINGS CHILDREN 33504
 
0714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開元二年 移安東都護於平州置 안동도호의 치소를 평주로 옮겼다.
1940#15086 SIBLINGS CHILDREN 15086
 
0731 三國史記(1145) 三韓
卿二明慶柞 三韓善隣 時稱仁義之郷 世著勲賢之業 삼한이 사이좋게 지내 오늘날 어질고 의로운 나라로 불리게 되고 대대로 공로 있는 훌륭한 업적을 드러냈다.
1940#1174 SIBLINGS CHILDREN 1174
 
0735 三國史記(1145)
김의충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김의충이 돌아가는 편에 浿江 이남의 땅을 주었다.
1940#33502 SIBLINGS CHILDREN 33502
 
0741
0741
1940#20643 SIBLINGS CHILDREN 20643
 
0743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天寶二年 移於遼西故郡城置 요서의 옛 군성으로 치소를 옮겼다.
1940#15101 SIBLINGS CHILDREN 15101
 
0748 三國史記(1145)
아찬 정절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검찰하게 하고, 처음으로 大谷城 등 14개 군과 현을 두었다.
1940#33509 SIBLINGS CHILDREN 33509
 
0758⁺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至德後廢 758년 이후 폐지했다.
1940#15111 SIBLINGS CHILDREN 15111
 
0762.05 三國史記(1145)
五谷 鵂巖 漢城 獐塞 池城 德谷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1940#33505 SIBLINGS CHILDREN 33505
 
0782.02 三國史記(1145)
왕이 한산주를 두루 돌며 살펴보고 백성들을 浿江鎭으로 옮겼다.
1940#33506 SIBLINGS CHILDREN 33506
 
0806~0820 新唐書(1060)
至元和末 遣使者獻樂工云 806년과 820년 사이에 사자를 보내어 악공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1940#26577 SIBLINGS CHILDREN COMMENT 26577
 
0826.07 三國史記(1145)
牛岑 태수 백영에게 명하여, 漢山州 북쪽 여러 주군의 인민 1만 명을 징발하여 浿江長城 3백 리를 축성케 하였다.
1940#33507 SIBLINGS CHILDREN 33507
 
0900⁻ 三國史記(1145) 三國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1940#33530 SIBLINGS CHILDREN 33530
 
0905 三國史記(1145)
평양 성주 장군 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의 적의·황의의 도적 명귀 등이 귀부하였다.
1940#33508 SIBLINGS CHILDREN 33508
 
0924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昔之蕞爾三國 今也壯哉一家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1940#16514 SIBLINGS CHILDREN 16514
 
0926 貊·濊·沃沮·夫餘
0926 貊·濊·沃沮·夫餘
漢五郡 = 樂浪郡+眞番郡+臨屯郡+玄菟郡+遼東郡 ➔ 高麗 = (貊+濊+沃沮+夫餘) + (樂浪+帶方+遼東) ➔ 渤海 = 高麗 - (樂浪+帶方+遼東) + 靺鞨 = (鴨淥府+南海府+柵城府+扶餘府) + 靺鞨 ➔ 女眞
1940#8555 SIBLINGS CHILDREN 8555
 
1145 三國史記 三國
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세 나라의 조상이 어찌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1940#33525 SIBLINGS CHILDREN 33525
 
1145 三國史記 三國
至於三國鼎峙 則傳世尤多 삼국이 정립하게 되자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 많아졌다.
1940#33531 SIBLINGS CHILDREN 33531
 
1145 三國史記 三國
其始終可得而考焉 作三國年表 그 시작과 마지막을 살펴 알 수 있기에 삼국의 연표를 만든다.
1940#33532 SIBLINGS CHILDREN 33532
 
1145 三國史記 三國
三國有名未詳地分 삼국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상세치 않은 곳
1940#33533 SIBLINGS CHILDREN 33533
 
1145 三國史記 三國(8)
0611 幷三國之心┆0643 和爾三國┆0651 海東三國┆0900⁻ 東海之外有三國┆1145 三國祖先┆1145 三國鼎峙┆1145 三國年表┆1145 三國有名未詳地分
1940#33534 SIBLINGS CHILDREN 33534
 
1145 三國史記 三韓(5)
0501 三韓古記┆0651 三韓之氓┆0673 三韓為一家┆0692 一統三韓┆0731 三韓善隣
1940#15078 SIBLINGS CHILDREN 15078
 
1960.10.29 김정일
신라는 당나라침략자들과 결탁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 하나의 통일적인 주권국가를 세우지는 못하였다.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밖에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땅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이 창건되여 200여 년 동안 존재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령토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주권국가인 발해와 신라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1940#3686 SIBLINGS CHILDREN 3686
 
安東都護府
1940#33535 SIBLINGS CHILDREN OPEN
 
帶方
帶方
676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가자, 신라는 694년에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고 713년에 개성을 쌓았으며 735년에 당(唐)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통치를 허용받은 뒤, 748년에 비로소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이어 762년에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6개 성을 쌓고 782년에는 한산주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826년에는 우잠 태수로 하여금 패강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1940#2537 SIBLINGS CHILDREN COMMENT 2537
 
韓의 변천
❶ 넓은 의미의 韓 : 三韓¹=馬韓+辰韓+弁韓=韓國¹ ➔ 三韓²=百濟+新羅+任那=韓國² ➔ 三韓³=百濟+新羅+髙麗 ❷ 좁은 의미의 韓 : 韓國₁=馬韓 ➔ 韓國₂=百濟 ➔ 韓國₃=大韓民國
1940#1165 SIBLINGS CHILDREN 1165
 
高句麗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 邊衆
중국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 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여만 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여만 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여만 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여만 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0#24617 SIBLINGS CHILDREN COMMENT 24617
 
高氏君長
1940#33550 SIBLINGS CHILDREN OPEN
 
고등학교 교과서(2003)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의 이용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 낸 사실에서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40#817 SIBLINGS CHILDREN COMMENT 817
 
고려와 百濟 사민
李正己王思礼王毛仲高仙芝黑齒常之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유민의 동향
고려 유민을 (1) 당에 의해 중국 내지로 끌려간 사람, (2) 신라로 넘어간 사람, (3) 요동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 (4) 부여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 (5)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940#4639 SIBLINGS CHILDREN COMMENT 4639
 
¦고려인의 사민
패망 당시 고려에는 69만 호가 있었는데 이중 15만 호가 고려인이었다. 인구로는 70여만 명이 되는데, 이 중 30여만 명은 당나라 내 각지로 흩어지고 10여만 명은 신라로 왔으며 10여만 명은 말갈로 갔고 1만여 명은 돌궐로 갔다.
1940#2536 SIBLINGS CHILDREN COMMENT 2536
 
¦삼한통일인가?
앞서 삼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의미는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통틀어 일컫는 의미였고 두 번째 의미는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를 통틀어 일컫는 의미였다. 신라의 통일영역은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의 영역을 합친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첫 번째 의미의 삼한을 적용하여 삼한통일이라 부르는 게 타당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676년 당시에는 이미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은 없어진 지 수 백 년이 지난 후였 ...
1940#3687 SIBLINGS CHILDREN COMMENT 3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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