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8. 요흑사 > 종족 > 0926 여진이 된 부여·예·맥·옥저 > 扶餘/貊/渤海
 
 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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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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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5 고려사절요(1452)
세자 대광현과 장군 신덕·예부경 대화균·균로사정 대원균·공부경 대복모·좌우위장군 대심리·소장 모두간·검교 개국남 박어·공부경 오흥 등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과 이름을 내려주면서 그를 왕실의 적에 붙이고,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였다. 보좌하는 신료들에게도 모두 작위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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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5-09 고려사(1451)
발해의 장군 신덕 등 500인이 내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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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6 발해의 행정구역
발해는 부여, 예맥, 옥저 그리고 고려의 옛 땅을 각각 부여부, 용원부(책성부), 남해부 그리고 압록부로 편제하였다. 왕고는 발해가 망하기 전에 세워졌으니 부여, 예맥, 옥저 그리고 고려의 옛 땅은 일단 왕고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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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6 송사(1345)
초에 글단(契丹)의 아보기가 부여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킨 다음에 부여를 고쳐 동단부(東丹府)로 삼고서 그의 아들 돌욕에게 명하여 병사를 주둔시켜 진압하도록 하였다. 아보기가 죽자 발해왕이 다시 부여를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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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6 신당서(1060)
용원(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길이고 남해(南海)는 신라길이다. 압단(鴨湪)은 조공길이고 장령(長嶺)은 영주(營州)길이며 부여(扶餘)는 거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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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6 신당서(1060)
예맥(예貃)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경(慶)·염(鹽)·목(穆)·하(賀)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沃沮)의 옛 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남해부(南海府)이며 옥(沃)·청(晴)·초(椒)의 3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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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6 신당서(1060)
고려(高麗)의 옛 땅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압록부(鴨淥府)이며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통치한다. 장령부(長嶺府)는 하(瑕)·하(河)의 2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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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6 신당서(1060)
부여(扶餘)의 옛 땅에 둔 부여부(扶餘府)에는 늘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는데 부(扶)·선(仙)의 2주를 통치한다. 막힐부(鄚頡府)는 막(鄚)·고(高)의 2주를 통치한다. 읍루(挹婁)의 옛 땅에 둔 정리부(定理府)는 정(定)·심(潘)의 2주를 통치한다. 안변부(安邊府)는 안(安)·(瓊)의 2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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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6 요사(1343)
高麗貊鐵驪來貢 고려, 맥 그리고 철려가 조공을 보내왔다. -- 맥은 발해의 압록부이고 철려는 발해의 철리부다. 압록강 중류 지역은 발해가 망할 때에도 맥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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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30-0935 송사(1345)
발해는 장흥(930~933)·청태(934~935)까지 당(五代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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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54-0959 송사(1345)
주(五代周) 현덕(954~959) 초기에 발해의 추장 최오사 등 30여명이 와 귀부하였다. 그 뒤로는 단절되어 중국과 왕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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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70 송사(1345)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馬韓)의 종족인데 거란에게 격파당하자 그 우두머리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해서 서쪽 변방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면서 자칭 정안국이라고 하였다. 개보 3년에 정안국왕 열만화(烈萬華)가 여진(女眞)이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표와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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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70 송사(1345)
최치원이 당나라에 가서 올린 글에 '마한은 고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는 부분이 있다. 조송도 그러한 인식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마한은 고려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발해의 압단(鴨湪)은 조공길이었고 장령(長嶺)은 영주길이었으며 부여(扶餘)는 거란길이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여진도 발해의 교통로를 이어갔다면 정안국의 위치도 압록강 중류 지역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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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76-0983 송사(1345)
태평흥국 연간에 태종이 원대한 계획을 세워 거란을 토벌하려고 하면서 정안국(定安國)에 조서를 내려 호응하도록 하였다. 정안국도 원수가 침략을 그치지 않는 것을 원망하던 터에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방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사에 의하여 묵은 울분을 씻을 수 있을까 하여 조서를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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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79 송사(1345)
太平興國 4년(A.D.979)에 太宗이 晉陽을 평정하고 幽州로 병사를 이동시켜, 渤海의 酋帥 大鸞河가 小校 李勛 등 16명과 部族 3백 騎兵들을 거느리고 항복해 오니, 鸞河를 渤海都指揮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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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1 송사(1345) 1
여진의 사신이 조공하러 오는 길이 정안국(定安國)을 거치게 되자, 여진의 사신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부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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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1 송사(1345) 2
“정안국왕 신 오현명(烏玄明)이 말씀드립니다. 성왕(聖王)의 하늘과 땅에 두루 미친 은혜를 입어 오랑캐의 풍속을 단속하고 있으니, 신 오현명은 정말 기뻐서 손뼉을 치고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신은 본래 고려(高麗)의 옛 땅인 발해(渤海)의 유민으로, 한쪽 귀퉁이에 웅거하여 여러 해를 지내오는 동안 고르게 감싸준 덕을 우러러 보고 한량없이 적셔준 은택을 입어 저마다 살 곳을 얻어 본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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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1 송사(1345) 3
얼마 전에 거란이 강폭함을 믿고 국토를 침입하여 성을 부수고 인민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신의 조고가 지절을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피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서 겨우 백성들을 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또 부여부(扶餘府)가 앞서 거란(契丹)을 배반하고 모두 본국으로 귀부하였으니 앞으로 닥칠 재앙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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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1 송사(1345) 4
마땅히 천조의 은밀한 계획을 받아 날랜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을 도와 기필코 원수를 갚을 것이니, 감히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신 오현명은 진실로 정성을 다하여 기원하면서 머리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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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1 송사(1345) 5
“정안국왕 오현명에게 타이른다. 여진(女眞)의 사신 편에 올린 표문을 받았는데, 짐이 예전에 수조로 내린 뜻에 감격하였음을 말하고 있구나. 그대는 멀리 있는 나라의 큰 우두머리이자 이름난 왕의 후손으로서, 마한(馬韓)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가 큰 바다 밖에 있는 탓으로, 강한 적에게 옛 땅을 빼앗기고도 맺힌 원한을 풀지 못하였으니 쌓인 울분을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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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1 송사(1345) 6
더구나 저 흉폭한 오랑캐가 아직도 전갈의 독기를 뿜어내기에 군사를 출동시켜 잠시 정벌하였더니 흉폭한 적이 하늘의 재앙을 받아 연달아 패하고 있으니 그들의 멸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국가가 이미 변방에 많은 병사들을 널리 주둔시켜 놓았으니, 추운 겨울을 넘긴 뒤 바로 토벌을 시행할 것이다. 그대가 만약 여러 대의 치욕를 생각하여 미리 온 나라의 병사들에게 타일러, 내가 죄를 토벌할 때에 맞추어 그대의 복수하고 싶은 뜻을 펼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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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1 송사(1345) 7
북방의 사막이 평정된 후 관작과 상을 내릴 것이니, 나라를 길이 보존할 계책의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 더구나 발해(渤海)가 조정의 교화에 귀부하기를 원하고, 부여(扶餘)도 이미 거란을 배반하였으니, 그대의 묵은 복수심을 떨쳐 협력하여 진실로 함께 정벌하기로 약속한다면 분명 큰 공훈을 세울 것이다. 아직 망망한 바다에 가로 막혀 사신을 보내지 못하지만, 쏠린 간절한 마음이야 자나깨나 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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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9 송사(1345)
정안국(定安國)의 왕자가 여진(女眞)의 사신을 통하여 말과 새깃으로 장식된 명적 등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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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1 고려사(1451)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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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1 송사(1345)
정안국(定安國)의 왕자 태원이 여진(女眞)의 사신을 통하여 표를 올렸는데, 그 뒤로는 다시 오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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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 고려사절요(1452)
정안국(定安國) 사람인 골수가 도망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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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9-09 고려사(1451)
거란 동경의 장군 대연림이 대부승 고길덕을 보내 나라를 세웠음을 알리고 아울러 원조를 요구하였다. 대연림은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7대손으로 거란을 배반하여 국호를 흥요(興遼), 건국 연호를 천흥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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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3 이제현(1287-1367)의 문종 찬
北貊扣關而受廛 북쪽 맥인은 관문을 두드려서 토지를 얻어 살게 되었다. -- 문종은 1083년에 죽었다. 맥이라는 표현은 14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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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6 고려사(1451)
동경의 발해인(渤海人)이 반란을 일으켜 유수 소보선을 죽이고, 공봉관 고영창(高永昌)을 세워 주제넘게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대원(大元), 연호를 융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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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6-01 금사(1345)
고영창(高永昌)이 동경(東京)에 근거지를 잡고서 달불야(撻不野)를 사신으로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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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6-01 요사(1343)
발해 고영창(高永昌)이 참칭하고 융기 원년이라고 칭하였다. 황제가 소을설(蕭乙薛)과 고흥순(高興順)을 보내어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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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6-12 고려사(1451)
거란인(契丹人) 33인, 한인(漢人) 52인, 해인(奚人) 155인, 숙여진인(熟女眞人) 15인, 발해인(渤海人) 44인이 왔다. -- 해인은 東胡의 일종으로 옛 선비의 땅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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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7-01 고려사(1451)
발해인(渤海人) 52인, 해인(奚人) 89인, 한인(漢人)인 6인, 거란인(契丹人) 18인, 숙여진인(熟女眞人) 8인이 요(遼)에서 내투하였다. -- 해인은 東胡의 일종으로 옛 선비의 땅에 살았다. 여기 나오는 발해인은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뒤 요동으로 사민시킨 사람들의 후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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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0 고려사(1451) 1
이성계가 기병 5,000명과 보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을 넘어 600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에 이르렀으며, 또 700여 리를 행군하여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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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0 고려사(1451) 2
동녕부의 동지인 이오로첩목아는 이성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으로 이동해 주둔하여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항거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에 이르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저의 선조는 본래 고려 사람이니,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고 300여 호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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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0 고려사(1451) 3
두목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성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모두 10,000여 호를 얻게 되었다. 노획한 소 2,000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귀순하는 자들로 저자거리와 같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황성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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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0 고려사(1451)
동녕부는 1290년에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겨갔다. 황성, 압록강, 황해 그리고 동녕부로 둘러싸인 지역은 옛 맥의 영역이다. 이오로첩목아가 말하는 고려는 왕씨고려가 아니라 맥고려를 뜻하는 듯하다. 낙랑고려가 망한 뒤에도 貊은 발해 시기의 압록부와 요나라 시기의 정안국으로 이어졌으며 14세기에도 왕고에서 북방의 한 종족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貊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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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7 철령위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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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扶餘/貊/渤海
발해가 망한 이후 요나라에 대항해서 부여, 貊 그리고 발해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모두 일어났다. 왕고가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민족통일을 했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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