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遼黑史 > 0916 遼

요나라가 고려 계승국인 발해를 병합하자 고려계승을 자처하는 왕씨고려와 모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다 요나라와 중국의 조송이 경쟁하면서 중국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왕고와 요나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요나라의 왕고 침공은 이런 배경에서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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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삼국사기(1145)
견훤이 후백제 왕을 자칭하며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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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삼국사기(1145)
평양 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의 적의·황의의 도적 명귀 등이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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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 - 0960  오대십국(五代十國)
0907 - 0960 오대십국(五代十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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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 - 0960 오대십국(五代十國)
중국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는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건립된 960년까지를 말한다. 황하 유역의 5개 왕조와 화중 및 화남의 10개 지방 정권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다. 5대는 다음과 같다. 량(梁 907-923) - 당(唐 923-937) - 진(晉 936-947) - 한(漢 947-951) - 주(周 951-960) 량(五代梁)은 당나라의 군벌 주전충이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자리를 양보받아 세운 왕조다. 개봉에 도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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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0923 량(五代梁)
량(五代梁)은 당나라의 군벌 주전충이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자리를 양보받아 세운 왕조다. 개봉에 도읍을 두었으며 량에 반대하여 이존욱이 세운 당(五代唐)에게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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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요사(1343)
新羅遣使貢方物 高麗遣使進寶劍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보검을 바쳤다. -- 이때의 고려는 궁예왕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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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요나라 건국
당(唐)이 망해갈 때 북방에서는 거란 8부족이 성장하였는데 질라부의 야율아보기가 이를 통합하고 요나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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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02 요사(1343)
晉吳越渤海高麗回鶻阻卜項及幽鎮定魏潞等州各遣使來貢 진(五代晉), 오월(10국), 발해, 고려, 회홍(Uygur), 조복(Tartar), ... 定(定安國?) ... 등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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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06 삼국사기(1145)
궁예 휘하의 사람들이 마음이 홀연히 변해 태조를 추대하였다. 궁예는 도망하여 달아나다 아랫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여 원년을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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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고려사(1451)
거란이 낙타와 말, 모직물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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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고려사(1451)
복부경 윤질이 양(五代梁)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오백나한의 화상을 바치자 명하여 해주 숭산사에 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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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0937 당(五代唐)
당(五代唐)의 이존욱은 나중에 반란이 일어나 살해당하는데 반란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이사원은 도읍을 다시 낙양에서 개봉으로 옮겼다. 이사원은 933년에 왕건을 고려왕으로 책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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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요사(1343)
고려가 와서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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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고려사절요(1452)
지렁이가 궁성의 동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70척이었다. 당시에 발해국이 투탁해 올 징조라고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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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고려사절요(1452)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었다. 당(唐) 측천무후 때에 고구려 사람인 대조영이 요동으로 달아나 점유하였다. 당 예종이 발해군왕으로 봉하니 이로 인하여 스스로를 발해국이라 부르고 부여·숙신 등 10여 나라를 병합하였다. 거란의 군주가 크게 일으켜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포위한 채 멸망시키고 동단국(東丹國)으로 바꾸었다. 그 세자 대광현과 ... 등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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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요사(1343)
高麗國來貢 고려국이 조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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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발해멸망
925년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발해는 보름여 만인 926년 1월 15일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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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요사(1343)
高麗貊鐵驪來貢 고려, 맥 그리고 철려가 조공을 보내왔다. -- 철려는 鐵利라고도 하는데 발해의 도읍이 있던 영고탑 북쪽에 살던 말갈의 한 부족이다. 발해가 망한 뒤 鐵利國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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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고려사(1451)
임언을 후당(五代唐)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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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요사(1343)
고려가 와서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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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고려사(1451)
신라의 승려 홍경이 당(五代唐)의 민부로부터 대장경 1부를 배에 싣고 예성강에 이르자 왕이 친히 맞이하여 제석원에 모셔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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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2 고려사(1451)
후당(後唐)에 대상 왕중유를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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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고려사(1451)
당(五代唐 923-936)에서 왕경과 양소업을 보내 왕을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왕건은) 주몽의 상서로운 개국을 뒤쫓아 나라의 군주가 되고 기자가 번국을 이룩한 자취를 밟아서 자애와 상서를 펼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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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5-10 삼국사기(1145)
왕이 말하기를,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장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 하고, 시랑 김봉휴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게 해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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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6 삼국사기(1145)
신검 및 두 동생과 장군 부달, 소달, 능환 등 40여 인이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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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6-0946 진(五代晉)
당(五代唐)의 이사원이 죽자 정국이 혼란에 빠졌는데 석경당이 거란군을 끌어와 당 왕조를 무너뜨리고 진(五代晉) 왕조를 세웠다. 석경당은 거란의 힘을 빌리는 댓가로 연운16주를 거란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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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8 고려사(1451)
비로소 후진(五代晋)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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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9 요사(1343)
진(五代晉)에서 존호를 올리니 이를 받고, (왕고에) 사신을 보내어 이 사실을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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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0 고려사(1451)
진(五代晋)이 우리나라의 인질 왕인적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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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1 고려사(1451)
진(五代晋)에 대상 왕신일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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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2 자치통감
처음 고려 왕건이 군사력으로 이웃 나라들을 병합하고 자못 강대해졌다. 오랑캐 중 말라를 통하여 고조(석경당)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하였습니다. 그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니 조정과 함께 그들을 쳐서 구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응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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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2-10 고려사(1451)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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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04 고려사(1451)
왕이 내전으로 나가 대광 박술희를 부른 다음 친히 훈요(訓要)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 거란(契丹)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우리와는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또한 다르니 복식이나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하라. 강포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니 태평할 때에도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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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4 고려사(1451)
진(五代晋)에 광평시랑 한현규와 예빈경 김렴을 보내 새 왕의 등극을 알리고, 드디어 거란을 격파한 것을 하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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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5 자치통감
황제(석중귀)가 거란과 원수가 되자 말라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가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을 어지럽혀 그 힘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왕건이 죽고 아들 왕무가 권지국사를 칭하며 표를 올려 이를 알려왔다. 11월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으로 삼고 통사사인 곽인우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거란을 치도록 하였다. 곽인우가 그 나라에 이르러 병력이 매우 약한 것을 보고 말라의 말이 단지 왕건의 과장일 뿐 거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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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7-0951 한(五代漢)
석중귀는 요나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결국 패하고 개봉이 함락되면서 진(五代晉) 왕조는 무너졌다. 개봉을 함락시킨 요나라 군대가 돌아가자 진의 잔당 유지원이 들어가 한(五代漢)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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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8 고려사(1451)
비로소 후한(五代漢)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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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8 고려사절요(1452)
동여진의 소무개 등이 와서 말 700필과 방물을 바쳤다. 왕이 천덕전에 임어하여 그것들을 받았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더니 물건을 관리하던 사람에게 벼락이 치고 또 천덕전의 서쪽 모퉁이에도 벼락이 내리쳤다. 왕이 크게 놀라니 근신들이 부축하여 중광전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건강이 악화되었다. 사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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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0 고려사(1451)
연호를 광덕(光德)이라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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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1 고려사(1451)
처음으로 후주(五代周)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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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1-0960 주(五代周)
한(五代漢) 왕조의 황제가 살해당하자 실력자 곽위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주(五代周) 왕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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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2 고려사(1451)
주(五代周)에 광평시랑 서봉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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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3 고려사(1451)
주(五代周)에서 위위경 왕연과 장작소감 여계빈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특진 검교태보 사지절현도주도독 충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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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5 고려사(1451)
주(五代周)에 대상 왕융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광평시랑 순질을 후주에 보내 즉위를 하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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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6 고려사(1451)
주(五代周)에서 장작감 설문우를 보내 왕을 가책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로 삼고, 아울러 백관의 의관제도는 중국 제도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전 대리평사 쌍기가 설문우를 따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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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9 고려사(1451)
주(五代周)에 좌승(佐丞) 왕긍(王兢)과 좌윤(佐尹) 황보위광(皇甫魏光)을 보내 명마(名馬)와 직조(織造)하여 만든 웃옷, 활과 칼 등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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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9 고려사(1451)
가을 주(五代周)에 사신을 보내 별서효경 1권, 월왕효경신의 8권, 황령효경 1권, 효경자웅도 3권을 바쳤다. 주에서 좌효위대장군 대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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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9 고려사(1451)
겨울 주(五代周)에 사신을 보내 구리 50,000근과 자수정‧백수정 각 2,000개를 바쳤다. 주의 시어 쌍철이 오자 좌승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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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0 송(趙宋)
0960 송(趙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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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0 송(趙宋) 건국
어린 사람이 주(五代周)의 황제 자리에 오르자 실력자 조광윤이 황제의 자리를 양보받아 송(趙宋) 왕조를 열었다. 이 송은 10국이 난립하던 남쪽까지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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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2 고려사(1451)
겨울 송(趙宋)에 광평시랑 이흥우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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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3-12 고려사(1451)
송(趙宋)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송에서 책명사 시찬을 파견하였는데,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90인이나 되었고 시찬만 홀로 면하였으므로 왕이 특히 그를 두텁게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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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5 고려사(1451)
송(趙宋)에 대승 내봉령 왕로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자, 송 황제가 왕로를 상서좌복야로 임명하고 식실봉 300호와 아울러 관고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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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2 고려사(1451)
송(趙宋)에 내의시랑 서희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자 황제가 왕에게 제서를 내려 식읍을 더하고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의 칭호를 내렸다.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를, 부사인 내봉경 최업에게는 검교사농경 겸 어사대부를, 판관인 광평시랑 강례에게는 검교소부소감을, 녹사인 광평원외랑 유은에게는 검교상서금부낭중을 내리고 아울러 관고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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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1 송사(1345)
겨울에 때마침 여진의 사신이 조공하러 오는 길이 정안국을 거치게 되자, 여진의 사신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부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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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4 고려사(1451)
형관어사 이겸의에게 명하여 압록강 가에 성을 쌓아 관문으로 삼게 하였는데 여진이 군사를 동원하여 그것을 막고 이겸의를 사로잡아 돌아가니 군대가 무너져 성을 쌓지 못하였으며 돌아온 자는 셋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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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고려사(1451)
송(趙宋)에서 태상경 왕저와 비서감 여문중을 보내 왕의 관작을 더해주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이 큰 강역에 있으면서 천하를 한 집으로 만들자, 온 나라가 입조해 오니 ... 이에 특별히 검교태부 벼슬을 주고 사지절현도주제군사·현도주도독·충대순군사·고려국왕의 봉호는 그 전과 같이 하며 식읍 1천호를 더한다. 그리고 산관훈은 종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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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고려사(1451)
송(趙宋)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보내왔다. “국토가 저 견융(거란)과 접해 있어 늘 해악을 입어 왔으니 그 쌓인 분노를 풀 수 있는 때는 바로 지금이로다! 군사들을 잘 타일러 좌우로 호응해 적과 맞서고 이웃나라와 힘을 합쳐 적을 소탕할 것이며, 왕성한 사기를 떨쳐 거진 멸망한 오랑캐를 일거에 쳐부수는 것이 옳으리라. 좋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니 왕은 잘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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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고려사(1451)
성종이 시일을 끌며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자 한국화가 협박과 회유를 병행하며 설득했다. 왕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서쪽에서 만나겠다고 약속하자 한국화가 그제서야 돌아갔다. 앞서 거란이 여진을 칠 때 우리 영토를 거쳐 갔는데 이 때문에 여진은 우리가 거란을 끌어다가 분란을 일으킨 것으로 여기고 송나라에 말을 바치러 가서, 고려가 거란과 합세해 자기 백성들을 납치해 갔다고 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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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7 요사(1343)
모든 도에 명령을 내려 무기를 정비하고 동쪽의 고려를 정벌하는 준비를 하도록 하였는데 8월에 요하의 습지에 물이 많이 괴자 중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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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6 고려사(1451)
거란이 궐열을 보내 화친을 청해왔다. -- 전해에 왕고를 치려다 비 때문에 못했으면서 이렇게 화친을 청한 것은 왕고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려는 위장평화공세가 아닌가? 송나라와 협력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7년 후 요나라는 왕고를 침공하게 되는데, 그때 왕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던 듯 여진이 요나라의 군대가 온다고 알려주어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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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1 고려사(1451)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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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2 요사(1343)
동경유수 소항덕(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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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
요나라와 왕씨고려0993-05 고려사(1451)0993-08 고려사(1451)0993-10 고려사절요(1452)0993-10 고려사절요(1452) 010993-10 고려사절요(1452) 020993-10 고려사절요(1452) 030993-10 고려사절요(1452) 040993-10 고려사절요(1452) 050993-10 고려사절요(1452) 060993-10 고려사절요(1452) 070993-10 고려사절요(1452) 080993-10 고려사절요(1452) 090993-10 고려사절요(1452) 100993_ 요사(1343)
 
0994 고려사(1451)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게 하고 장흥(長興)·귀화(歸化) 두 진과 곽주(郭州)·구주(龜州)에 성을 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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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 요사(1343)
(왕고가) 입공하였다. 3월에 왕치(성종)가 사신을 파견하여 사로잡은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계속 송환하도록 하고 아울러 사신을 파견하여 위무하였다. 12월에 왕치(성종)가 기악을 바치자 조서를 내려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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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02 고려사(1451)
거란의 통화(統和)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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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06 고려사(1451)
거란의 작년 침략 행위를 보복하기 위해 원욱을 송(趙宋)으로 보내 원군을 요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송은 북방 국경이 가까스로 평안해진 마당에 경솔한 군사행동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거절한 후 사신을 후하게 대접만 하고 돌려보냈다. 이 일 이후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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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06 고려사(1451)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고 거절당할 경우 외교관계를 끊는 명분으로 삼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985년에 송나라가 같이 요나라를 치자고 했을 때는 왕고가 협조하지 않았으니, 이제와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왕고가 송나라를 원망할 입장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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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요사(1343)
封高麗王為三韓國公,贈其父為高麗國王。고려왕을 삼한국공에 봉하고 그의 아비를 고려국왕으로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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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요사(1343)
치(성종)가 이주정을 보내어 공물을 보내오고 매도 함께 바쳤다. 10월에 이지백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11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치(성종)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동자 10명을 보내와 본국의 말을 배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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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6 요사(1343)
왕치(성종)가 표를 올려 혼인을 요청하니 부마인 동경유수 소항덕(소손녕)의 딸을 하가시켰다. -- 소손녕은 요나라 황제의 사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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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6-06 요사(1343)
(왕고가) 사신을 보내와 안부를 물었다. 이 뒤부터는 사신이 수시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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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7 요사(1343)
한언경이 와 빙폐를 바치고, 부마 소항덕(소손녕)의 아내 월국공주의 죽음을 조문하였다. 11월에 치(治 성종)가 죽자 그의 조카 송(誦 목종)이 왕동영을 보내와 통고하였다. 12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조서를 내려 그의 조카 송(誦)을 권지국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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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8-11 요사(1343)
遣使冊高麗國王誦。사신을 보내어 고려국왕 송(誦 목종)을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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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요사(1343)
송(誦 목종)이 사신을 보내와 송나라를 정벌하여 승전한 것을 축하하였다. 7월에 와 본국의 지리도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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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요사(1343)
조서를 내려 (왕고로 하여금) 남방 정벌에 관하여 알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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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전연의 맹(澶渊之盟)
송(宋)은 군비(軍備)로서 요(遼)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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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전연의 맹약
- 함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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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고려사(1451)
동여진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여 주진의 부락 30여 곳을 불태우자 장수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 등주는 철령 너머에 있는 안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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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요사(1343)
고려에서 송나라와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와 축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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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요사(1343)
(왕고가) 용수초석을 바침과 아울러 중경성을 쌓은 것도 축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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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요사(1343)
승천황태후가 죽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상을 통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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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03 요사(1343)
송(誦 목종)이 위수우 등을 보내와 제사를 올렸다. 3월에 사신이 와서 장례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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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05 요사(1343)
고려의 서경유수 강조(康肇)가 그 임금 송(誦 목종)을 시해하고 제마음대로 송(誦)의 종형 순(詢 현종)을 임금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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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05 고려사(1451)
상서좌사낭중 하공진과 화주방어낭중 유종을 먼 섬으로 유배보냈다. 하공진이 과거 동여진을 치다가 패배한 일을 두고 유종이 한스럽게 생각하던 차에 마침 여진족 95명이 우리 조정에 입조하던 길에 화주관에 당도하자 유종이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이 유배를 당한 것이다. 여진이 거란에게 이 사정을 호소하자 거란 임금은 신하들에게, “고려의 강조(康兆)는 임금을 죽인 대역 죄인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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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08 요사(1343)
성종이 친히 고려를 정벌하면서 송나라에 통보하는 한편 인진사 한기를 파견하여 순(詢)에게 선문하였다. 순(詢)이 표를 올려 출병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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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1 고려사(1451)
거란 임금이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하였으나, 양규와 이수화 등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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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1 요사(1343)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동주(銅州)에서 항거하였는데 패퇴하였다. 강조가 다시 나오자 우피실 상온 야률적로가 강조 등을 사로잡고, 도망하는 군사들을 수십리 추격하여 군량ㆍ갑옷ㆍ무기 따위를 노획하니 동주(銅州)ㆍ곽주ㆍ귀주ㆍ녕주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순(詢)이 표를 올려 조회하겠다고 하니 이를 허락하고, 군사들에게 사로잡거나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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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01 요사(1343)
군사를 철수시키니 항복하였던 모든 성들이 다시 반하였다. 군사가 귀주 남령곡에 다다르자 큰 비가 연일 내려 비가 개서야 강을 건넜는데, 말이나 낙타들이 지쳐 갑옷과 무기들을 많이 버리고 압록강에 진을 쳤다. 사로잡은 사람들을 여러 능묘에 나누어 배치하고 나머지는 친척들이나 대신들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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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02 고려사(1451)
거란 임금이 이끄는 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해 태묘와 궁궐 및 민가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이 날 왕은 광주에 머물고 있었다. ... 거란 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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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요사(1343)
순(詢 현종)이 채충순을 보내와 옛날처럼 칭신하겠다고 청하므로 순(詢)에게 조서를 내려 친조하도록 하였다. 8월에 (왕고가) 전공지를 보내와 표를 올리고 병을 칭하여 조회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조칙을 내려 다시 6주를 빼앗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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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요사(1343)
야율자충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 땅을 요구하다가 얼마 안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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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고려사절요(1452)
철리국(鐵利國) 추장 나사의 사신인 여진 만두가 와서 말과 초서·청서 가죽을 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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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요사(1343)
자충이 다시 사신으로 가 전처럼 땅을 요구하였다. 5월에 국구인 상온 소적열과 동경유수 야율단석 등에게 조칙을 내려 압록강에다 부교를 설치하고 보주ㆍ선의주ㆍ정원주 등지에다 성을 쌓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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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요사(1343)
북부재상 유진행은 도통으로, 추밀사 야율세량은 부도통으로, 전전도점검 소허열은 도감으로 삼았다. 그런데 진행이 변방까지 가족을 데리고 가 출군할 시기가 더뎌지자 뒤쫓아가 그를 되돌아오도록 하고, 세량과 소허열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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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요사(1343)
세량 등이 고려와 곽주 서쪽에서 전투하여 쳐부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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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요사(1343)
추밀사 소합정 소합탁을 도통으로, 중국 사람인 행궁도부서 왕계충을 부도통으로, 전전도점검 소허열을 도감으로 삼고 쳐들어가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소합탁이 흥화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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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고려사절요(1452)
정안국(定安國) 사람인 골수가 도망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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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요사(1343)
조칙을 내려 동평군왕 소배압을 도통, 소허열을 부도통, 동경유수 야율팔가를 도감으로 삼아 다시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12월에 소배압이 다하ㆍ타하 사이에서 싸웠는데, 요나라 군사가 불리하여 천운ㆍ우피실 2군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으며, 전운군 상온 해리ㆍ요련 장상온 아과달ㆍ객성사 작고ㆍ발해상온 고청명 등은 싸움터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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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요사(1343)
조칙을 내려 배압이 고려를 토벌하다가 패전한 죄를 낱낱이 책망한 뒤 풀어주었다. 전공이 있는 장교에게는 관직을 높여주고 전사한 장교의 아내에게는 봉작을 더하여 주고 그 아들은 관리로 채용하였다. 남피실 군교들은 전공이 있었으므로 의복ㆍ기물ㆍ은ㆍ견 따위를 차등있게 하사하고 금백도 효리ㆍ열가의 두 해군에게 내렸다. 8월에 낭군 갈불려 등을 파견하여 제부의 병사들을 통솔하여 대군으로 편성해서 함께 고려를 토벌하도록 하니 순(詢)이 사신을 보내와 방물 바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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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요사(1343)
자충이 돌아와 순(詢)의 항복표를 바치니, 순(詢)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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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1030 흥요국
1029 고려사절요(1452)1029 고려사절요(1452)1030 고려사절요(1452)1030 고려사절요(1452)1030 고려사절요(1452)
 
1055 고려사(1451)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께서도 책문을 보내 은혜를 베풀면서 영토를 분봉할 때에도 또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 요나라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국서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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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3 요사(1343)
8월에 王徽가 薨하여 徽의 아들 三韓國公 勳을 權知國事로 삼았는데, 12월에 勳이 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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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요사(1343)
五年, 王顒乞封册. 六年, 封顒爲三韓國公. 1099년 왕옹(王顒 숙종)이 책봉을 요청하였다. 1100년에 옹(顒)을 책봉하여 삼한국공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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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요사(1343)
三韓國公 顒이 薨하자 아들 俁가 사신을 보내와 통고하였다. 1108년에 에 俁를 三韓國公으로 봉하고, 그의 아버지 顒는 國王으로 追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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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잡지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漢州), 그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 그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고 말한다. -- 한주는 백제가 일어났던 곳으로 백제는 이곳에서 500여년간 존재했었다. 고려가 이곳을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의 이 부분은 왕고가 자신의 고려계승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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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 거란국지(契丹國志)
동북쪽으로는 말겁자에 이른다. 거기 사람들은 갈기 머리를 하고 베를 펼친 옷을 입으며 안장 없이 말을 탄다. 활은 크고 화살은 긴데 매우 잘 쏜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여서 그 고기를 날로 먹는다. 거란 등의 나라가 모두 그들을 두려워한다. 거란의 기병 5기라도 1명의 말겁자를 만나면 모두 흩어져 달아난다. 삼면이 모두 실위인데, 하나는 그냥 실위고 또 다른 하나는 황두실위며 나머지 하나는 수실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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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3 요사
요사는 원나라가 편찬했지만 요나라의 기록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런데 요나라는 고려 계승을 놓고 왕씨고려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나라가 남긴 기록에도 고려 계승과 관련하여 요나라에게 유리한 이야기가 들어있었을 듯하다.
2364#16037
 
1343 요사(1343)
高麗와 西夏가 遼나라를 섬기면서 일찍이 國婚을 요청하여 下嫁시켰지만, 이것이 어찌 그들의 변치 않는 마음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三韓은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反覆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涼州는 멀리 있음을 믿고서 배반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국경을 침입하여 틈만 있으면 함부로 출동시켰으며, 朝貢하는 사신이 막 가고나면 사건이 뒤따라 발생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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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
2018-03-0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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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를 굶겨죽인 태조의 의도
- 이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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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지도 - 윤명철
고려의 영역을 세 단계로 나누어 표기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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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인과 여진인은 무엇이 달랐나?
요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인을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다고 한다. 여기서 발해인과 여진인의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발해와 고려까지 요나라의 방식을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지방통치 방식을 군현제와 부족제로 단순화시켜 고찰해 본다. 작은 부족이 연합을 하거나 정복을 해서 규모가 커지면 중앙정치와 지방통치가 분리되게 된다. 지방통치는 부족제와 군현제가 있는데, 부족제는 부족 내에서 결정된 수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이고 군현제는 중앙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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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 된 부여·예·맥·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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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
요(遼)는 중국대륙이 당(唐)의 멸망 이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세운 왕조다. (이때 한국에서도 신라에서 왕고로 왕조가 교체되는 사건이 있었다.) 요(遼)는 동서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926년에 병합한 발해도 포함된다. 발해를 병합할 때 요(遼)는 발해왕 대인선을 비롯한 발해의 지배세력들을 요(遼)로 데려가 요(遼)의 지배체제에 편입시켰으며 일반 백성들도 다수 요(遼)로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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