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양복의 진군 수나라 내호아의 행보와 비슷하다.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배의 뒷부분과 앞부분이 수백 리에 이르게 바다에 떠올라 먼저 패수로 들어와서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아군과 서로 만났는데 이를 대파하였다. 숨은 병력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 사졸로서 돌아간 자는 수천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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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漢의 조선 침공
齊의 중심지는 발해만 안쪽에 있었다. 齊 병력을 모아 출발시켰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발해 해안선은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를 띄우면 발해에 배를 띄우는 것이 된다. 당시의 항해는 가능한 한 해안선을 따라갔다. 조선을 향해 요동 반도로 건너가든 한반도로 바로 건너가든, 발해만 안쪽에서 띄운 배는 일단 齊의 해안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14223#1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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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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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 0108 史記(-91)
좌장군의 졸정인 다가 요동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참형을 당하였다. 누선은 제(齊)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에 이르렀는데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성을 나와 누선을 치니 누선군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14223#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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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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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06 三國史記(1145) 고려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배의 뒷부분과 앞부분이 수백 리에 이르게 바다에 떠올라 먼저 패수로 들어와서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아군과 서로 만났는데 이를 대파하였다. 내호아가 정예병력 수만 명을 골라 곧바로 성 아래로 나아갔다. 숨은 병력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 사졸로서 돌아간 자는 수천인에 불과하였다. 아군이 추격하여 배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아군이 후퇴하였다.
14223#1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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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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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0 신당서(1060)
帝曰 高麗地止四郡 我發卒數萬攻遼東 諸城必救 我以舟師自東萊帆海趨平壤 固易 然天下甫平 不欲勞人耳
태종이 “고려의 땅은 4군 뿐이다. 우리가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면 다른 여러 성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다. 우리가 수군을 동원하여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들어 간다면 아주 쉬울 것이다.”고 하였다.
▐ 중국이 대동강 유역을 침공할 때 육군과 수군으로 나누어 공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14223#1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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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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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구당서(945)
형부상서 장양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장군 상하 등과 강·회·령·협의 강한 군사 4만명·전선 5배척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특진 영국공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 도종을 부총관으로 삼아서 장군 장사귀 등과 보병·기병 6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나아가게 했다. 양군이 합세하도록 한 다음, 태종은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가서 합류하기로 했다.
14223#1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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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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