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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沮 ❱ 衛滿朝鮮 ❱ 漢 玄菟郡 ❱ 漢 樂浪郡 東部都尉 ❱ 高麗 ❱ 渤海 柵城府 ❱ 金 曷懶路 ❱ 李朝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蓋馬大山
개마대산은 압록강 유역과 沃沮를 경계짓는 험준한 지형으로 頭里山에서 黃草嶺까지 이어진다.
15058
 
농경지 분포
동해안의 농경지는 매우 희박하다. 해안을 따라 조금씩 분포하고 있으며 개마대산 동쪽은 단단대령 동쪽보다 더 적다. 이러한 농경지 분포는 동옥저 및 예의 호수가 삼국지에 각각 5천호와 2만호로 되어 있는 것과 어울린다. 개마대산 동쪽만 놓고 보면 길주명천지구대 주변의 농경지가 가장 넓다.
15442
 
夫租 ↜ 吉州明川地溝帶
길주명천지구대는 개마고원과 칠보 산지 사이에 난 긴 저지대로 천연적인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지구대는 또 주변의 좁은 해안 지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농경지도 제공하고 있다. 교류와 농경의 요충지라는 조건은 길주명천지구대가 자연스레 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하게 하였을 듯하다.
15028
 
-0107 三國志(289)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한무제 원봉 2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23435
 
-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朝鮮 䛁邯 增地 黏蟬 駟望 屯有 帶方 列口 長岑 海冥 昭明 提奚 含資 遂成 鏤方 渾彌 浿水 吞列┆東暆 蠶台 不而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부조)
15000
 
0008 漢書(82)
朝鮮 䛁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東暆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부조)
15010
 
0244~0246 曺魏, 고려 정벌
조위의 침공을 받고 도읍이 함락되자 동천왕은 竹嶺을 넘어 옥저로 도주하였다. 맥고려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경로는 황초령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竹嶺을 황초령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그 결과, 황초령 아래 함흥을 옥저로 비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맥고려가 26년에 개마국을 정복한 것을 볼 때, 맥고려에서 개마국을 거쳐 개마대산을 넘는 길이 황초령 동쪽에 충분히 개척되어 있었을 듯하다.
15020
 
0245 三國志(289) 沃沮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할 때 구려의 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옥저의 읍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급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궁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23074
 
0289 三國志 沃沮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濵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 고구려가 貊이니 여기에 나오는 濊貊은 濊로 보아야 할 듯하다.
21250
 
0289 三國志 沃沮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貊·布·魚·鹽·海中食物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그곳의 美女를 보내게 하여 婢이나 妾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奴僕처럼 대우하였다.
11056
 
0289 三國志 高句麗
高句麗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고구려는 남쪽으로 조선예맥과 경계를 접하고 동쪽으로는 옥저와 접했다. ▐ 고구려가 貊이니 여기에 나오는 濊貊은 濊로 보아야 할 듯하다.
20914 COMMENT
 
0568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압록강 유역과 영흥만 해안을 가르는 황초령에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것처럼 磨雲嶺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도 磨雲嶺이 두 문화권의 경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옥저와 예의 경계로 보기에 적당하다.
17188
 
0612 수서(636)
鏤方 長岑 海冥 蓋馬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옥저) 樂浪 黏蟬 含資 渾彌 臨屯 候城 提奚 踏頓 肅慎 碣石 東暆 帶方 襄平 凡此衆軍 先奉廟略 駱驛引途 總集平壤
17151
 
0860~0873  발해의 행정구역
0860~0873 발해의 행정구역
발해는 부여, 예, 맥 그리고 옥저의 옛 땅을 각각 부여부, 남해부, 압록부 그리고 용원부(책성부)로 편제하였다.
15006
 
0860~0873 신당서(1060)
□貃故地為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為南京 曰南海府 領沃睛椒三州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로 책성부라고도 한다. 경·염·목·하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이며 옥·청·초의 3주를 통치한다. ▐ 예맥과 옥저가 바뀌어 있다. 柵城은 고구려의 幘溝漊(幘城) 및 북옥저의 置溝婁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5011
 
0918 東女眞
黑水는 장백산 동북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靺鞨 이외의 종족은 없었던 듯하며 따라서 黑水人은 黑水靺鞨과 같은 뜻이다. 靺鞨은 女眞이라고도 했는데 장백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의해 동과 서로 갈려 있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곧 東女眞이다. 왕고는 이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東蕃이라고도 불렀다. ○ 黑水人=黑水靺鞨=東女眞=東蕃
4642
 
1010 高麗史(1451)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공격하여 패배를 당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마침 여진족 95인이 내조하여 화주관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다. 여진족이 거란에 참소하자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10014
 
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3106
 
1107~1109 윤관의 여진 정벌
개마대산 동쪽의 여진을 정벌하고 공험진에서부터 함주, 영주, 복주, 웅주 그리고 길주까지 성을 쌓았다가 1년만에 물러났다. 여진은 이 지역에 수백년 동안 살아왔었고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살았다.
19850
 
1108 東北
21330
 
1108-02-27± 尹瓘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 東沃沮와 묘사가 비슷하다. 沃沮가 女眞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23060
 
1115~1234 曷懶路
1115~1234 曷懶路
19852
 
1258 太宗實錄(1431)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吉州를 海陽이라 칭하고, 端州를 禿魯兀이라 칭하고, 英州를 參散이라 칭하고, 雄州를 洪肯이라 칭하고, 咸州를 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22979
 
1451 高麗史 福州
福州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吳林金村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防禦使를 두었다. 1109년에 城을 철수하여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禿魯兀이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82년에 端州安撫使로 고쳤다. 요해처가 2곳인데, 伊板嶺(州 동북쪽에 있는데, 곧 磨天嶺이다)과 豆乙外嶺(州 남쪽에 있는데, 곧 磨雲嶺이다)이다.
22986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22970
 
1884 길주
1884 길주
근대 이전에는 길주가 압록강 유역의 갑산에서 개마대산을 넘어오는 길과 단천에서 해안을 따라 올라오는 길 그리고 두만강 유역에서 명천을 거쳐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23110
 
1884 북청 단천
1884 북청 단천
근대 이전에는 압록강 유역의 갑산에서 개마대산을 넘어 동해안으로 오는 길은 북청으로 오는 길과 단천으로 오는 길이 있었다.
23108
 
夫租薉君 印章
平壤市 樂浪區域 貞栢洞
41278 COMMENT
 
夫租長印
壤市 樂浪區域 貞栢洞 2號墳
41553 COMMENT
 
弓漢嶺
弓漢嶺
두리산 남쪽의 물은 단천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지만 두리산 북쪽의 물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허천강을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또 한 갈래는 북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가며 나머지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러 길주를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고대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났으므로 세 물길이 만나는 이곳이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동해안 지역이 교류하는 통로였다.
23430
 
蓋馬大山
개마대산은 압록강 유역과 동해안 유역들을 가르는 산줄기로 頭里山에서 黃草嶺까지 이어진다.
23013
 
길주
길주명천지구대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고 농경에 적합한 평지가 비교적 넓어 고대에 정치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15029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
5912
 
¦개마대산 동쪽에서 개마대산 서쪽을 통치한다?
¦개마대산 동쪽에서 개마대산 서쪽을 통치한다?
이 어색함은 현도군의 초기 치소가 있던 옥저성을 황초령 아래로 설정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옥저는 이내 현도군에서 분리되어 낙랑군 동부도위로 소속이 바뀌고 현도군은 개마대산을 넘고 압록강 유역을 지나 멀리 요하 유역으로 이동하였다. 당시를 추정하자면 이렇다. '대동강에 낙랑군을 설치한 한나라는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영흥만에 임둔군을 설치하고 해안을 따라 올라가 이듬해에 길주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유역을 이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21249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개마대산을 위와 같이 설정해서 부조를 함흥에 비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어색한 점이 몇 가지 있다.
21245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不耐縣
245년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도읍을 점령하고 현도태수 왕기로 하여금 도주하는 동천왕을 쯫게 하였는데, 왕기는 옥저를 파괴하고 숙신까지 쫓다가 돌아갔다. 같은 해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군대를 일으켜 단단대령 동쪽의 예를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만약, 옥저와 예가 모두 영흥만에 있었다면 왕기는 옥저를 정벌하고 인접한 예는 먼 낙랑과 대방에서 군대를 보내 정벌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매우 어색해진다.
5900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東暆縣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 동이가 진번군의 치소 삽현보다 장안에서 1500리 가깝다고 되어 있다. 진번군은 낙랑군과 차령 사이의 지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곳의 치소보다 1500리 가까운 곳이 되려면 동이는 영흥만 지역에 있는 것이 적당하다. 그런데 현도군의 치소 옥저성이 영흥만 지역에 있었다면, 임둔군의 치소 동이와 함께 좁은 지역에 두 군의 치소가 있게 되어 매우 어색하다.
21256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蒼海郡
예는 원래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한 듯하다. 그런데 위만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예군 남려는 28만구를 들어 한나라에 투항하는데, 이때는 단단대령 북쪽을 돌아 압록강을 거쳐 요동으로 가는 경로였을 듯하다. 이때 창해군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되는데 20여년 후 설치된 임둔군 또한 예를 다스리는 군이었다. 단단대령 북쪽을 돌아가는 길은 황초령을 넘어가므로 예가 이 길을 이용했다는 것은 황초령 아래도 예라는 정황을 말해준다.
21257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영흥만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영흥만
지형상 영흥만은 하나의 문화권으로 보이는데 별개의 종족인 예와 옥저에 의해 양분되어 점유되는 것이 가능한가?
2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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