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遼黑史 > BC 0108 낙랑 > 0032~0037 낙랑왕 최리

○ 토착인 왕조가 낙랑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태수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 변경의 군을 줄이면서 도위도 폐지하였다. 현에 있던 우두머리로 모두 현후를 삼으니 불내·화려·옥저 등의 제 현은 전부 후국이 되었다. ○ 왕자 호동이 옥저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 최리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0014 삼국사기(1145) 신라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으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생각하기를 '나라 안이 비었을 것이다.' 하고 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몹시 급박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가 알천 가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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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023 위략(265±)
염사착이 진한의 우거수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 군에서는 염사착의 공과 의를 표창하고, 관직과 밭 그리고 집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125년에 이르러서는 그로 인하여 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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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023 위략(265±)
▶낙랑에서 큰 배로 진한에 들어가 포로를 구출했다는 부분은 삼국지에 있는 진한의 위치 설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삼국지에는 대방의 남쪽에 한이 있고 그 중 진한은 마한의 동쪽이자 예의 남쪽에 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대방은 낙랑의 남부를 갈라서 만들었고 예는 조선의 동쪽에 있었는데 조선은 한나라가 점령하고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낙랑에서 진한까지 배로 가려면 대동강에서 나와 한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한이라면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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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0030 왕조의 난
토착인 왕조가 낙랑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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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동부도위 폐지
변경의 郡을 줄이면서 도위도 폐지하였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우두머리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불내·화려·옥저 등의 제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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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0037 삼국사기(1145) 고구려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 우리 병력이 갑자기 성 밑에 도달한 연후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왕 최리는 낙랑예후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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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0037 낙랑예후설(樂浪濊侯說) 1
삼국사기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1) 낙랑군은 30년에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보내 왕조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게 했는데, 32년에 최리의 낙랑국이 되어 있을 수 있나? (2) 낙랑군은 치소가 대동강 유역에 있었는데, 그 수장이 옥저까지 행차할 수 있었나? (3) 낙랑군은 44년에 韓의 일부가 스스로 복속해 올 정도로 강성한 상태였는데, 37년에 고려에 병합될 수 있었나?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낙랑국은 낙랑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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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6 삼국사기(1145) 신라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최리의 낙랑예후국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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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삼국사기(1145) 고구려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최리의 낙랑예후국으로 보아야 한다. 낙랑왕 최리는 32년에 고려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가 고려의 침공을 받아 망하게 되는데, 그 사건이 이 37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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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삼국사기(1145) 신라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최리의 낙랑예후국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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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삼국사기(1145) 고구려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이 기록은 중국의 기록에는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가 후한서의 30년 기록과 삼국지의 237~239년 기록 그리고 최씨 낙랑국에 관한 토착 기록을 잘못 종합하여 적어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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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낙랑예후설(樂浪濊侯說) 2
삼국사기(1145)에는 44년에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고 군현으로 삼아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은 군대가 동원된 중요한 사건인데도 중국의 사서에 대응하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후한서(445)에는 30년에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낙랑에 파견하여 왕조의 난을 진압하고 통치를 회복했다는, 삼국사기와 어울리지 않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또 삼국사기에는 37년에 고려가 낙랑국을 병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중국의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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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후한서(445)
建武二十年韓人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使屬樂浪郡四時朝謁 한(韓)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漢)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위략의 염사착 이야기(20~23)와 후한서의 염사 사람 이야기(44)는 廉斯라는 명칭과 韓에서 낙랑으로 귀순한다는 이야기가 유사하므로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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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후한서(445)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가을에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거느리고 낙랑에 내부하였다. ▶염사 사람들의 귀부를 말하는 듯하다. 삼국사기가 후한서에서 30년에 발생했다고 하는 사건을 44년으로 옮긴 근거가 이 사건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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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6-07 삼국사기(1145) 고구려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넓혀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옥저를 병합한 기록은 있는데 예를 병합한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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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7-239 삼국지(289)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淵 공손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수습하였다. 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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