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遼黑史 > 종족 > -0108 부여·예·맥·옥저의 기원 I

동이의 여러 종족 중에서 부여, 예, 맥 그리고 옥저는 농경을 했다는 점에서 유목을 하는 서쪽의 선비와 달랐고 동쪽의 읍루와는 문화의 발달 정도에서 큰 차이가 났다. 맥인이 세운 고려는 왕조가 부여에서 나왔는데 예, 옥저 그리고 부여를 차례로 통합하였다.
 
Haplogroups
C형과 O형은 모두 동남아에서 생겨났다. C형이 먼저 생겨나 북쪽으로 시베리아와 북미까지 퍼져나갔고 O형은 나중에 생겨나 C형을 밀어내며 동남아, 북중국,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까지 차지하였다. C형은 원래 수렵과 채집을 했는데 나중에 유목을 도입하여 서쪽으로 초원을 따라 퍼져나갔고 O형은 농경민이어서 농경 한계선까지만 올라갔다. 오환, 선비 그리고 말갈은 C형 선주민이고 예, 맥, 부여 그리고 옥저는 O형 이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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貊(맥)의 어원
貊(맥)은 압록강 유역에 살았던 종족 이름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역사에 등장하는데, 이후 고려를 세웠다. 고려가 망한 뒤에도 맥국이나 정안국의 형태로 정체성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왕씨고려 때의 역사에서 확인된다. 한편, 貘(맥)은 짐승의 이름이다. 지금 동남아에 서식하는 tapir다. 그런데 貊과 貘은 북방 종족과 짐승의 이름에 모두 쓰인다. 여기서 맥족이라는 이름이 tapir에 비유해서 중국인들이 붙인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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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6 이전 일주서
穢人은 前兒를 바친다. 前兒는 원숭이처럼 생기고 서서 다니며 어린애와 같은 소리를 낸다. 良夷는 在子를 바친다. 在子는 화폐의 체형을 하고 있으나 머리는 사람이다. 배에 기름이 있어 그것을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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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 부여건국설화
부여의 건국 설화는 논형(27-97?), 삼국지(289), 후한서(445), 양서(636), 수서(636) 그리고 북사(659)에 나온다. ● 사기의 기록에 연나라가 부여와 이웃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부여는 전국 시대에도 있었다. 삼국지에 예인의 땅에 부여가 세워졌을 거라는 추론이 있는데, 그 추론에 의하면 부여 건국의 시점도 221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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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 논형 (27~97)
북쪽 오랑캐 탁리(橐離)국의 왕을 모시는 계집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계집종이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을 했습니다"고 하였다. 나중에 아들을 낳았는데 돼지 우리와 마굿간에 넣어 보았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주었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는데 활을 잘 쏘았다.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왕이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달아나 엄수(掩水)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건넜다. 부여(夫餘)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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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 논형 (27~97)
● 동명이 왕조를 세운 사건은 사서마다 기술이 조금씩 다르다. 都王夫餘(논형 27~97) 都王夫餘之地(삼국지 289) 至夫餘而王之(후한서 445) 至夫餘而王(양서 636) 逃至淹水夫餘人共奉之(수서 636) 至夫餘而王(북사 659). 대체로 왕조를 세우기 전부터 부여가 있었던 것처럼 되어 있으나 논형의 뜻은 왕조를 세우고 부여라 했다는 뜻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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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 사기(-91)
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 및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예, 맥, 조선 그리고 진번과 교류하여 이익을 얻었다. ● 예, 맥 그리고 부여는 나타나나 고구려나 옥저는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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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 후한서(445)
예군(濊君)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구를 이끌고 요동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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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년 이전 후한서(445)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예 및 옥저·구려는 본디 모두가 조선의 지역이다. ● 옥저와 구려가 역사에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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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한(漢)의 위만조선 침공
예, 맥 그리고 옥저는 모두 위만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임둔군을 설치하여 예를 소속시키고 옥저에는 현도군을 설치하여 맥을 소속시켰다. 한사군은 처음에 차령과 죽령 선까지 내려왔으나 이내 임진강과 철령 선까지 후퇴하였다. 한사군에서 빠진 지역이 대체로 삼한이 되었고 신라의 한국 통일은 이 삼한을 통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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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한(漢), 현도군 설치
○ 예, 옥저 그리고 句驪는 원래 모두 조선의 땅이다. ○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여 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 高句驪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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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이후 삼국지(289)
漢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溝漊(책구루)라 부른다. 溝漊란 句麗 사람들이 城을 부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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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5 삼국지(289)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의 고부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 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고 현도군은 처음에 이곳에 설치되어 고구려현을 관리했었다. 그러다 구려 서북쪽으로 치소가 옮겨지고 옥저는 낙랑에 소속되었으니, 이때부터 고구려는 현도군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夷貊은 그냥 貊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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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고려건국설화
고려건국설화는 광개토왕릉비(414), 위서(554), 수서(636), 주서(636), 북사(659)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 있다. 고려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모두루묘지명,광개토왕릉비),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등으로 나타난다. 騶(한서,후한서)와 騊(삼국지)도 鄒牟의 다른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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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요동사의 무대
고려의 건국 설화는 부여의 건국 설화와 이야기 구조가 같다. 부여의 건국설화는 북쪽 나라에서 이탈한 동명이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것이고 고려의 건국 설화는 부여에서 이탈한 추모가 강을 건너 고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부여와 고려는 발해, 金 그리고 淸과 역사 무대가 서로 얽혀 있어 요동사로 묶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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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압록강 유역
고구려를 세운 맥인은 압록강의 지류인 비류수 일대에 살고 있었다. 현도군은 심양과 薩爾滸城(살이허성) 사이에 있었고 고구려현은 赫圖阿拉(혁도아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협도아랍은 훗날 누르하치가 성장한 곳이고 살이허성은 그가 조명 연합군의 침공을 격퇴한 곳이다. 누르하치는 조부와 부친이 명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아픔을 딛고 훗날 청나라로 발전하는 후금을 세웠다. 추모왕이 신나라에 의해 살해당한 뒤 고려 왕조가 세워진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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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삼국사기(1145)
○ 東扶餘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에서는 '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과 물이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沸流水 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高로 씨를 삼았다. ○ 北扶餘의 주몽이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로 와 부여왕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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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광개토왕릉비 (414)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라고 하였다.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忽本)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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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광개토왕릉비 (414)
● 부여의 건국 설화와 이야기 구조가 같아서 베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추모가 부여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의심이 가게 된다.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흘승골성의 입지 조건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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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紇升骨城
句麗의 어원에 대해서는 구려 사람들이 城을 溝漊(구루)라 했다는 기록과 연결하여 溝漊와 어원이 동일하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高가 붙은 이유는 흘승골성의 입지 조건과 연결하여 높은 곳에 있는 城에 근거하였기 때문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문제는 고구려현이 설치된 시기가 추모가 홀본 서쪽 산상에 도읍을 정한 시기보다 앞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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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 고려의 초기 왕들
0018 삼국사기(1145)   01 鄒牟   01. 고려의 시조는 동명이 아니다   02 儒留   02 閭達   03 大朱留   03 如栗   04 莫來   06 宮   06 宮   06 宮   07 伯固   07 遂成   08 伊夷模   08 伯固   09 位宮   09 位宮   13 乙弗利   14 釗   17 永樂   17 璉  
 
-0037 환인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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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환도성 아래
맥고려의 고분군이 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부여인의 묘제는 석관묘와 토광묘였는데 비해, 맥인인 고구려인의 묘제는 적석총이어서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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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년 이전 한서(82) 玄菟郡
玄菟郡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현토군은 45,006호에 221,845구다. 현은 고구려, 상은태 그리고 서개마가 있다. ● 고구려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소속된 현으로 보아 옥저에 설치했던 초기의 현도군이 아니라 서북쪽으로 이전한 후의 현도군을 말하는 듯하다. 한서가 전한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전한 말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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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한서(82)
貉人犯法不從騶起正有它心宜令州郡且尉安之今猥被以大罪恐其遂畔夫餘之屬必有和者匈奴未克夫餘穢貉復起此大憂也 맥인이 법을 어긴 것은, 추를 좇아 일어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주와 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부여의 족속 중에 따르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한 마당에 부여와 예와 맥이 다시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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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추모왕 피살
왕망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이에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하였고 이때부터 맥인이 변경을 침범하는 일은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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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4 삼국사기(1145)
유리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내어 보내 한나라의 高句麗縣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 고구려는 맥의 한 부분일 뿐 맥에는 고구려 말고도 양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고구려현과 고구려가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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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 왕호 복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자 광무제가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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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한서
北隙烏丸夫餘 東賈真番之利 玄菟樂浪 武帝時置 皆朝鮮濊貉句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연나라는 북쪽으로 오환 및 부여와 사이가 벌어지고 동쪽으로는 진번과 장사를 해서 이익을 얻었다. 현도와 낙랑은 무제때 설치했는데 조선, 예, 맥 그리고 구려 오랑캐들이다. 은나라가 쇠퇴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 예의를 가르쳤다. ● 貉句驪란 표현은 맥과 구려가 별개처럼 보이나 夷貊에서처럼 포함관계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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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0220 후한과 고구려의 갈등
고구려는 유주의 요동군 및 현도군과 충돌을 자주 하였다. 공손씨가 요동을 장악하고 난 뒤에는 공손씨의 침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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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 ᑅ 후한서(445) 幽州 玄菟郡
高句骊 西盖马 上殷台 高显 候城 辽阳 현도군(6성,1594호) - 고구려, 서개마, 상은태, 고현, 후성, 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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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년 이후 삼국지(三國志 289) 동이 설명 시점
공손연까지 3대가 계속 요동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역을 포기하고 해외를 맡겼다. 그 결과 동이와의 관계가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경초 연간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되찾았다. 그러자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므로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 매우 먼 지방까지 쫓으니 오환과 골도를 넘고 옥저를 거쳐 숙신의 왕정을 짓밟고 동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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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0316 진서(648) 平州
276년 10월에 창려, 요동, 현토, 대방, 낙랑 5군국을 갈라 평주를 설치하였다. 26현 18100호다. 평주(5군국,26현,18100호) - 창려군(창려,빈도), 요동국(양평,문,거취,낙취,안시,서안평,신창,역성), 낙랑군(조선,둔유,혼미,수성,누방,사망), 현도군(고구려,망평,고현), 대방군(대방,열구,남신,장잠,제해,함자,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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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요약 1
扶餘의 북쪽에는 弱水가 있고 서쪽에는 鮮卑가 있으며 동쪽에는 挹婁가 있고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다. 高句麗의 북쪽에는 扶餘가 있고 동쪽에는 沃沮가 있으며 남쪽에는 朝鮮과 濊가 있다. 朝鮮의 동쪽이 다 濊다. 沃沮의 북쪽에는 扶餘와 挹婁가 있고 서쪽에는 高句麗가 있으며 남쪽에는 濊가 있다.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고 남쪽에는 辰韓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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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요약 2
朝鮮을 멸하고 樂浪郡, 真藩郡 그리고 臨屯郡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에는 沃沮에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얼마 후 真藩과 臨屯을 폐하여 樂浪에 합쳤다. 玄菟는 高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沃沮는 樂浪에 소속시켰다. 다시 樂浪의 단단대령 동쪽을 갈라 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가 濊人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樂浪郡의 남쪽은 분할하여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馬韓, 辰韓 그리고 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馬韓은 서쪽에 있고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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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 高句麗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 고구려는 남쪽으로 조선예맥과 경계를 접하고 동쪽으로는 옥저와 접했다. ○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南與濊貊接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남쪽으로 예맥과 경계를 접했다. ○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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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 고구려의 동쪽이자 예의 북쪽에 옥저가 있는데 삼국지에서는 그 중에서 동옥저에 대해서만 기술해 놓았다.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예와 맥이 있는데 삼국지에서는 그 중에서 예에 대해서만 기술해 놓았다. 조선의 동쪽이 다 예라면 맥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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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1) 夫餘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으로 만든 구슬·잔 등 여러 대를 전해 오는 물건이 있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대께서 하사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도장에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亡人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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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1) 夫餘
● 동명설화와 연결하여, 동명이 예인들 땅에 들어가 왕조를 세우고 국호를 부여라 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후 이 지역의 주민은 더 이상 예인으로 불리지 않고 부여인이라 불려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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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2) 高句麗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 동이의 옛 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 고구려 왕조가 북부여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광개토왕릉비(414) 이전의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데, 삼국지의 이 기록으로 보아 289년 당시에도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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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2) 高句麗
본디 다섯 족이 있으니, 소노부·절노부·순노부·권노부·계루부가 그것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5931 COMMENT
 
0289 삼국지 (2) 高句麗
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소수맥이 있다. 구려는 대수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는데, 서안평현의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드는 작은 강이 있어서,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맥궁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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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3) 濊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예의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구려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5933 COMMENT
 
0289 삼국지 (4) 東沃沮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맥포·생선·소금·해초류(貊布魚鹽海中食物)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 貊布는 맥인들이 생산하는 옷감을 말하는 듯하나 후한서에는 貊 대신 貂(담비 초)로 되어 있다
854 COMMENT
 
0289 삼국지 (4) 北沃沮
北沃沮는 일명 置溝婁라고도 하는데 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挹婁와 접해 있다. 挹婁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1481#1395
 
0340(<0040) 삼국사기(1145)
(신라) 화려현과 불내현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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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0(<0040) 삼국사기(1145)
● 삼국지(289)에는 사로국이 진한 12국 중 하나로 나오므로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사건은 신라가 진한을 통합한 그 뒤의 시기로 옮겨놓아야 어울린다. 당시 압록강 유역의 맥인은 고구려가 모두 통합한 상태이므로 여기에 나오는 맥국은 영서 지방에 남은 맥인 국가를 가정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예와 맥이 있었다는 삼국지(289)의 기록과도 어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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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0042) 삼국사기(1145)
(신라) 貊國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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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0534 위서(554) 營州
營州領郡六縣十四昌黎郡領縣三龍城廣興定荒建德郡領縣三石城廣都陽武遼東郡領縣二襄平新昌樂良郡領縣二永洛帶方冀陽郡領縣二平剛柳城營丘郡領縣二富平永安 영주(6군,14현) - 창려군(201호,용성,광흥,정황), 건덕군(200호,석성,광도,양무), 요동군(131호,양평,신창), 낙랑군(219호,영락,대방), 기양군(89호,평강,유성), 영구군(182호,부평,영안). ● 玄菟郡과 高句麗縣이 나타나지 않는다.
6633 COMMENT
 
0414 광개토왕릉비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韓人과 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韓 뿐만 아니라 穢에 대해서도 동족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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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5 위서(554)
세조 때에 쇠(釗 고국원왕)의 증손 련(璉 장수왕)이 처음으로 사신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치면서 아울러 나라 이름을 물었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명으로 제계의 이름 자(字)를 그 나라에 내려 주고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파견하여 련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배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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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위서(554)
臣與高句麗源出夫餘先世之時篤崇舊款 신(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쇠(釗 고국원왕)가 이웃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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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8 삼국사기(1145)
(백제) 봄에 서울을 사비(다른 이름은 소부리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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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고려가 망한 뒤 예, 맥, 부여 그리고 옥저는 발해의 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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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8 속일본기(797)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 무예(무왕)는 황송스럽게도 대국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扶餘)의 습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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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발해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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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여진이 된 예, 맥, 부여 그리고 옥저
고려는 맥인의 나라로 시작해서 예, 옥저 그리고 부여까지 흡수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나서는 이들 지역이 모두 발해의 영역이 되었다. 발해가 망했을 때 이들 예, 맥, 부여 그리고 옥저는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왕씨고려에서 여진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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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신당서(新唐書)
내부는 곧 한(漢)대의 계루부로서 황부라고도 한다. 북부는 곧 절노부로서 후부라고도 한다. 동부는 곧 순노부로서 좌부라고도 한다. 남부는 곧 관노부로서 전부라고도 한다. 서부는 곧 소노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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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고려도경(高麗圖經)
현도군 고구려현이 설치된 이후 점점 현도군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군에서 동쪽 경계에 자그마한 성을 쌓고 세시에 받아가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비로소 왕이라 일컬었다. 왕망이 고려 군사를 출동시켜 흉노를 치려고 했으나 가지 아니하매 왕을 낮추어 侯로 삼았다. 광무가 중흥하여 변방에 관원 보내는 것을 폐지하매, 건무 8년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했다. 따라서 왕호를 복구시켜 주고 외번(外藩)의 반열(班列)에 끼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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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불내(不耐)와 화려(華麗) 2현은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동부(樂浪東部)에 속하고, 불이현(不二縣)은 도위(都尉)의 소재지였다. 불이(不二)는 또한 불내라고도 칭한다. 이른바 영동(嶺東) 7현(縣)이란 바로 지금의 철령(鐵嶺) 내외의 땅이니, 불내ㆍ화려 2현은 아마 옛날 이추(夷酋)의 호인데, 한 무제(漢武帝)가 강등시켜서 현(縣)으로 만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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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맥고(貊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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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예고(濊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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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어원
高句麗는 句麗란 어근에 高라는 꾸밈말이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왕망이 高句驪를 下句驪로 이름을 바꾸었다거나 삼국지에서 句麗로만 칭해지기도 한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句麗의 어원에 대해서는 高句麗에서 城을 溝漊라 했다는 기록과 연결하여 溝漊와 어원이 동일하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高가 붙은 이유는 흘승골성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과 연결하여 높은 곳에 있는 城에 근거하였기 때문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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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기원
고구려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82년에 편찬된 한서다. 한서 지리지에 고구려, 상은태 그리고 서개마 3현이 현도군에 소속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후한서(445)에는 예, 옥저 그리고 고구려가 모두 조선의 땅이었는데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그 지역을 갈라 4군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때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는데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이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고구려는 위만조선이 망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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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천도
❶ BC 037 紇升骨城 ❷ 003 國內 ❸ 209 丸都 ❹ 247 平壤城 ❺ 342 丸都城 ❻ 343 平壤東黄城 ❼ 371 國內 ❽ 427 平壤 ❾ 586 長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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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東夷族)은 허구의 개념
한반도와 그 주변에 관한 오래된 기록은 서기전 91년에 편찬된 사기와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가 있다. 사기에는 대동강 유역에 있던 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삼국지에는 동이(東夷)라 하여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濊, 韓 그리고 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기에 나오던 조선은 삼국지가 편찬될 무렵에는 낙랑이 되어 있었다. 이 삼국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동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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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BC 91 사기(史記 漢·司馬遷) 律書   BC74 - BC49 염철론(BC 81) 권4   BC74 - BC49 염철론(BC 81) 권7   BC74 - BC49 염철론(BC 81) 권8   BC74 - BC49 염철론(BC 81) 권9   춘천  
 
한국학중앙연구원 - 맥인
맥인은 선진문헌에서부터 등장하는데, 선진문헌의 맥인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한다기보다 중원의 바깥에 사는, 농경문화가 덜 발달된 종족들에 대한 범칭이었다. 고구려를 세운 압록강 중류 지역의 맥인은 외부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토착해서 살던 사람들이다. 청동기 문화 단계에서 요동으로부터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이어 서기전 3세기 대에 연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한 이후 연의 철기문화를 수용하면서 서서히 발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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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 부여
부여국의 중심지역인 부여성(夫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장춘(長春)·농안(農安)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다.부여성은 고구려의 북부여성이며 발해의 부여부(扶餘府)인데,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한 뒤 부여부 지역에 황룡부(黃龍府)를 설치했고, 그것이 금대(金代)에 융안부(隆安府)가 되며 오늘날의 농안부근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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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 예맥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으로 나누어 보거나, 예맥을 하나의 범칭으로 보는 견해, 예맥은 맥의 일종이며, 예는 예맥의 약칭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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