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年代記 > -0108 樂浪史 > 0204~0220 공손강, 대방군 분할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 遣公孫模 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眞番
진번은 사기(-91)에서 주로 조선과 묶여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 접한 나라로 보인다. 조선은 사기에서 연나라의 동쪽에 접해 있다고 되어 있고 삼국지(289)에는 고구려의 남쪽이자 예의 서쪽에 있다고 되어 있으므로, 조선에 접한 진번이 있을 곳은 조선의 남쪽 밖에 없다. 사기에는 진번이 맥과 동시에 거론되고 있어 맥인의 나라 고구려가 진번의 후신일 가능성도 배제한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곳에 진번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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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後漢書┆晉書
┆漢書 25┆ 朝鮮 俨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 ( 東暆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 ➔ ┆後漢書 18┆ 朝鮮 (䛁邯) (淇水) 貪資 (占蟬) 遂城 (増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樂都) ➔ ┆晉書 6+7┆ 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 + 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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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0220 三國志(289)
196~220년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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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300- 무릉서(茂陵書)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 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真番郡 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신찬이 말하기를 '무릉서에 임둔군은 치소가 동이현으로 장안에서 6138리고 현이 15개다. 진번군은 치소가 삽현으로 장안에서 7640리고 현이 15개다'라고 하였다. ▐ 신찬은 西晋(265~316) 시기의 인물이다. 무릉서는 무릉에서 출토된 한무제 시기의 공문서다.
16090
 
0300- 무릉서(茂陵書)
0300- 무릉서(茂陵書)
▐ 임둔군의 치소 동이현이 영흥만에 있었고 진번군의 치소 삽현이 한강 하류에 있었다면 무릉서의 이야기처럼 장안에서의 거리가 1500리 차이날 수 있다. 단, 동이에 이르는 경로가 낙랑을 거쳐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집안을 거쳐 황초령을 넘어가는 경로일 경우다. 임둔군을 설치할 때는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갔지만 한나라와 교통할 때는 황초령을 넘어 집안을 거쳐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16436
 
0445 후한서
樂浪郡 雒陽東北五千里 낙랑군은 낙양 동북 5천리에 있다.
16451
 
0445 후한서
玄菟郡 雒陽東北四千里 현도군은 낙양 동북 4천리에 있다.
16452
 
0445 후한서
遼東郡 雒陽東北三千六百里 요동군은 낙양 동북 3600리 되는 곳에 있다.
16453
 
帶方郡
帶方郡
진번군은 이내 폐지되고 낙랑군에 합쳐졌는데, 이후 진번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한편, 전한의 낙랑 25현은 영동 7현이 갈라져 나가 후한의 낙랑 18성이 되었고 이 중에서 7성이 갈라져 나와 서진의 대방 7현이 되었다. 이 대방 7현이 진번이 폐지될 때 낙랑으로 합쳐진 진번의 7현으로 추정된다. 대방 7현은 자비령에서 임진강 사이로 추정되므로 낙랑에 합쳐지지 않은 진번 8현도 임진강 남쪽에 그만한 크기의 지역이 되어야 한다. 차현까지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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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八國
삼국지(289)에는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8국은 대방에 접한 지역으로 묘사되는데, 삼한에 대한 삼국지의 설명에 의하면 그런 지역은 진한이 아니라 마한이다. 한편, 진번군 15개 현 가운데 7현은 낙랑군에 합쳐졌다 나중에 대방군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머지 8개 현의 향방은 알 수 없다. 이 진번 8현이 훗날 위나라가 낙랑에 넣으려한 진한 8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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