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신공황후편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제명 천황의 이야기로 출발하여 미질과 모말 그리고 우로의 이야기로 살을 붙였으며 비미호는 신공 황후 이야기의 중심 소재로 삼았다. 여기에 삼한 정벌 이야기까지 끌어 붙이다보니 신공 황후는 100세까지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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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0193-03-15 일본서기(720)
천황은 남국(南國)을 순수하였다. 이때 황후및 백관들은 머무르게 하고, 가마를 따르는 두서넛의 경대부와 관인 수백 명을 데리고 가볍게 떠났다. 기이국(紀伊國)에 이르러 덕륵진궁(德勒津宮)에 머물렀다. 이때 웅습(熊襲)이 모반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천황은 이에 웅습국을 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덕륵진을 출발하여 배로 혈문(穴門)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날 사자를 각록에 보내 황후에게 “바로 진(津)을 출발하여 혈문에서 만나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7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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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0193-06-10 일본서기(720)
천황이 풍포진(豐浦津)에 정박하였다. 또한 황후는 각록에서 출발하였다. 정전문(渟田門)에 이르러 배 위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때 방어가 배 곁에 많이 모였다. 황후가 술을 방어에게 부었더니, 방어들이 취하여 떠올랐다. 이에 어부들이 그 물고기를 많이 잡고 좋아하며 “성왕(聖王)이 내리신 물고기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그곳의 고기가 6월이 되면 항상 취한 것처럼 뜨는 연유이다.
7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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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0199-01-04 일본서기(720) 1
축자(筑紫)로 갔다. 그때 강현주(岡縣主)의 선조 웅악(熊鰐)은 천황의 거가(車駕)가 왔다는 것을 듣고 미리 5백 개의 가지(五百枝)가 있는 현목(賢木)을 뿌리째 뽑아 구심(九尋)의 배의 고물에 세우고, 윗가지에는 백동경(白銅鏡)을 걸고, 가운데 가지에는 십악검(十握劒)을 걸고, 아랫가지에는 팔척경(八尺瓊)을 걸고서 주방(周芳)의 사마(沙麽) 포구에 마중 나와 어염지(魚鹽地)를 바쳤다. 그리고 “혈문에서 향진야대제(向津野大濟)에 이르는 곳까지 동문(東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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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0199-01-04 일본서기(720) 2
황후는 다른 배를 타고 동해(洞海)로부터 들어왔지만, 조수가 빠져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웅악이 다시 돌아와서 동해에서 황후를 맞이하였다. 그는 배가 나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급히 어소(魚沼)와 조지(鳥池)를 만들어 물고기와 새를 모두 모았다. 황후는 물고기와 새가 노는 것을 보고 노한 마음을 풀었다. 조수가 차자 강진(岡津)에 정박하였다.
7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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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0199-01-04 일본서기(720) 3
축자의 이도현주(伊覩縣主)의 선조인 오십적수(五十迹手)는 천황이 행차한다는 것을 듣고 5백 개의 가지(五百枝)가 있는 현목을 뽑아서 배의 고물 부분에 세우고, 윗가지에는 팔척의 옥을 걸고, 가운데 가지에는 백동경을 걸고, 아랫가지에는 십악검을 걸고서 혈문의 인도(引嶋)에서 맞이하여 바쳤다. 그리고 “신이 감히 이 물건을 헌상하는 까닭은 천황이 팔척 옥의 굽은 것과 같이 구석구석까지 천하를 다스리시고, 또 백동경과 같이 분명히 산천해원(山川海原)을 둘러보 ...
7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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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0199-09-05 일본서기(720)
군신(群臣)에게 웅습(熊襲 くまそ)을 토벌하는 것을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신(神)이 황후에게 지펴서 “천황은 어찌 웅습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가. 그곳은 힘없고 쓸모 없는 나라이니 어찌 군대를 일으켜칠만 하겠는가. 이 나라보다 더욱 보물(寶物)이 많은 나라가 있으니 비유하면 처녀의 눈썹(睩)과 같고, 진(津)의 건너편에 있는 나라이다(睩은 麻用弛枳라고 읽는다). 눈부신 금과 은, 비단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그 나라를 저금신라국(杼衾新羅國 ...
7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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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02 일본서기(720)
족중언천황(중애천황)이 축자의 강일궁에서 죽었다. 이 때 황후는 천황이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고 신의 재앙임을 알아 재물이 많은 보배로운 나라를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군신과 백료들에게 명하여 죄를 빌고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고 소산전읍에 제궁을 다시 지었다.
7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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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02-05 일본서기(720)
천황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죽었다(이때 나이 52세였다. 바로 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책에서는 천황이 친히 웅습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에 황후와 대신 무내숙녜(武內宿禰)는 천황의 죽음을 감추고 천하에 알리지 않았다. 황후가 대신 및 중신오적진련(中臣烏賊津連), 대삼륜대우주군(大三輪大友主君), 물부담사련(物部膽咋連), 대반무이련(大伴武以連)에게 “지금 천하는 천황이 죽었다는 ...
7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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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04-03 일본서기(720)
여름 4월 초하루 북으로 화전국 송포현에 이르러 옥도리의 작은 냇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가 바늘을 구부려 낚싯바늘을 만들어 밥알을 미끼로 하고 치마의 실을 풀어서 낚싯줄로 하여 물 가운데의 돌 위로 올라가 낚시를 던지고 “짐은 서쪽의 부자 나라를 얻고자 합니다. 만약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물고기가 낚시를 물게 하소서.”라고 빌었다. 인하여 낚싯대를 드니 비늘이 촘촘한 고기가 걸려 있었다. 이 때 황후가 말하기를 “보기 드문 것이다.”라고 하 ...
7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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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09-10 일본서기(720)
여러 국(國)에 명령을 내려 선박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도록 하였다. 이때 군졸들이 잘 모이지 않자 황후가 “반드시 신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곧 대삼륜사(大三輪社)를 세우고 칼과 창을 바치자 군중(軍衆)들이 저절로 모였다. 이에 오옹(吾瓮)의 해인(海人) 오마려(烏摩呂)에게 서해로 나가서 나라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였다. 돌아와서 “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기록(磯鹿)의 바닷사람 명초(名草)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 ...
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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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09-10 제명천황
남편이 죽자 신공 황후가 권력을 잇고 축자에서 신라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은, 역시 남편이 죽은 뒤 천황의 자리를 이은 제명 천황(655~661)이 축자에서 백제 구원을 준비하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❶ 제명 천황은 신공 황후 이야기를 만드는 첫 소재였다고 할 수 있다.
7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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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10-03 일본서기(720)
겨울 10월 초하루 화이진에서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 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 둘 바를 모른 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 ...
7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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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10-03 파사와 미질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의 재위기간이 80년에서 112년까지로 되어 있고 미질이 왜에 인질로 간 것은 402년으로 되어 있다.
❸ 미질이 왜에 볼모로 간 사건은 신공 황후의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402년에서 320년으로 옮겨졌다고 보아야 한다.
7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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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12-14 일본서기(720)
譽田天皇을 筑紫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낳은 곳을 宇瀰라고 불렀다일설은 다음과 같다. 足仲彦天皇이 筑紫 橿日宮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이 沙麽縣主의 祖인 內避高國避高松屋種에게 신탁하여 천황에게 “천황이 만약 보배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실제로 주리라”고 깨우쳐 주었다. 다시 말하기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황후에게 바쳐라”고 하였다. 곧 신의 말을 따라 황후가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 주기를 “지금 천황이 바라고 있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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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12-14 일본서기(720)
신라왕을 포로로 잡아 해변으로 가서 왕의 무릎뼈를 뽑고서 돌 위에서 기도록 하고, 곧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남겨 신라의 재(宰)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에 신라왕의 처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을 몰라, 혼자 재를 유혹할 생각을 가졌다.
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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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 0200-12-14 우로
신라왕 우로가 왜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309년으로 추정된다.
❷ 우로왕 피살 사건도 신공 황후의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309년에서 320년으로 옮겨졌다고 보아야 한다.
7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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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5 0205-03-07 일본서기(720)
신라왕이 오례사벌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부라모지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허질벌한을 꾀어 “사신 오례사벌과 모마리질지 등이 나에게 ‘우리 왕이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에 연루시켜 처자를 모두 종으로 삼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데 잠시 본토에 돌아가서 그 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 속이게 하였다. 황태후가 곧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갈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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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3 0213-02-17 일본서기(720)
태자가 각록(角鹿)에서 돌아왔다. 이 날에 황태후는 태자를 위하여 대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황태후가 잔을 들고 태자의 장수를 기원하며노래하였다.
이 신주(神酒)는 내가 만든 술이 아니다. 신주의 수장으로 상세(常世)의나라에 사는 소어신(少御神)이 미친 듯이 춤추다가 빚어 천황에게 헌상해 온 술이다. 자, 남기지 말고 마셔라.
무내숙녜가 태자를 대신하여 답가(答歌)를 읊었다.
이 신주를 빚은 사람은 그 북을 절구처럼 세우고 노래하면서 빚었기 때문인가?
7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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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4~0358 기록의 공백
334년에서 358년 사이에는 자체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348년부터 365년까지의 시기에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 공백이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7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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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9 0238 삼국지(289)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왜(倭)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대방)군에 이르러 천자에 조헌할 것을 청하니, 태수 유하가 관원과 장수를 보내 경도까지 호송하게 했다.
※위나라 경도는 낙양이다.
7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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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9 0238 삼국지(289)
조서를 내려 왜(倭) 여왕에게 말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제조한다. 대방태수 유하(劉夏)가 관리를 보내 너희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호송하게 했고 너희들이 바친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 반포 2필 2장이 도착했다. 너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사자를 보내 조공하니 이것이 너의 충효로구나. 갸륵하도다.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 자수를 내리고 장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 네게 하사토록 한다."
7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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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9 0239-06 일본서기(720)
위지(魏志)에서는 명제(明帝) 경초(景初) 3년 6월에 왜 여왕이 대부(大夫) 난두미(難斗米) 등을 보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게 가서 조헌할 것을 청하자, 대방군 태수 등하(鄧夏)가 관리를 보내 데리고 가게하여 경도(京都)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7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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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0 0240 삼국지(289)
(대방)태수 궁준이 건충교위 제준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어 왜국에 이르게 했다. 왜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가져온 금(金), 비단, 융단, 칼(刀), 거울(鏡), 채물을 하사했다. 이에 왜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은조에 사례했다.
7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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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4~0372 왜와 백제의 교류
○ 44
久氐·彌州流·莫古, 백제>탁순>백제
○ 46
斯摩宿禰, 왜>탁순>왜
爾波移·過古, 탁순>백제>탁순
○ 47
久氐·彌州流·莫古, 백제>왜
千熊長彦, 왜>신라
○ 49
荒田別·鹿我別, 久氐, 왜>탁순
沙白·蓋盧, 탁순>백제>탁순
木羅斤資·沙沙奴跪, 백제>탁순
肖古·貴須, 백제>의류촌
○ 50
荒田別, 백제>왜
千熊長彦·久氐, 백제>왜
(久氐, 왜>백제)
○ 51
久氐, 백제>왜
千熊長彦·久氐, 왜>백제
○ 52
千熊長彦·久氐, 백제>왜
7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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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 0246-03-01 일본서기(720)
사마숙니를 탁순국에 보내었다. (사마숙니는 어떤 성씨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때 탁순국왕 말금한기가 사마숙니에게 “갑자년 7월에 백제인 구저‧미주류‧막고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군왕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구저 등에게 ‘전부터 ...
7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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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7 0247 삼국지(289)
정치 8년 태수 왕기가 관부에 도착하였다. 왜(倭)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 비미궁호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 오월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파견해 가져간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게 하사하고 격문으로 이를 널리 알렸다.
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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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7 0247-04 일본서기(720)
백제왕은 구저, 미주류, 막고를 보내어 조공하도록 하였다. 그때 신라국의 조사(調使)도 구저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皇太后)와 태자 예전별존(譽田別尊)은 크게 기뻐하며, “선왕(先王)이 바라고 계셨던 나라 사람이 지금 내조하였다. 천황을 뵙지 못한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고 말하자 군신은 모두 슬퍼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는 두 나라의 공물을 검교(檢校)하였다. 이에 신라의 공물은 진귀한 것이 실로 많았지만 백제의 공물은 적고 ...
7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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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8 0248ᑅ 삼국지(289)
비미호가 마침내 죽자 새롭게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의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아서 비미호 종실의 여자인 일여를 세웠다. 일여는 왜의 대부인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20인으로 하여금 장정 등을 송환시켰고 이때 남녀 생구 30인을 헌상하고 백주 5천개, 공청대구주 2매 그리고 이문잡금 20필을 공물로 바쳤다.
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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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0249-03 일본서기(720)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에게(이 두 사람은 그 姓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 ...
7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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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0249-03 일본서기(720)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7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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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0249-03
이것은 대단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서에 흔적이 전혀 없다. 가장 근접한 기록은 광개토왕릉비의 것으로 391년의 사건이다.
❻ 삼한 정벌도 신공 황후의 업적으로 돌리기 위해 391년에서 369년으로 시점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7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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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 0250-05 일본서기(720)
천웅장언(千熊長彦)과 구저(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구저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한(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구저 등이 “천조의 큰 은택이 멀리 우리나라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왕이 기쁨에 넘쳐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비록 만세까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
7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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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0251-03 일본서기(720)
백제왕이 또 구저(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무내숙니(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7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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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0251_ 일본서기(720)
이 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구저(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이 때 백제왕 부자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귀국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보다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을 수 있으리요. 성스러운 왕이 위에 있어 해와 달같이 밝고 신이 아래에 있어 산악과 같이 굳세니 ...
7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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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0252-09-10 일본서기(720)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 1자루와 칠자경(七子鏡)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계(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침류왕(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 ...
7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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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0262 일본서기(720)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 ...
7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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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5 삼국사기(1145)
辰斯王近仇首王之仲子枕流之弟爲人強勇聦惠多智略 枕流之薨也太子少故叔父辰斯即位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7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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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肥前 ひぜん)
남쪽의 비후(肥後 ひご)와 함께 화국(火国 肥国 ひのくに)에서 갈라져 나왔다.
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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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신공황후편 분석
일본서기(720)는 처음에 설화로 시작해서 점점 역사를 기술하게 되는데 신공황후 편에 이르러서도 설화와 역사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유교적인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설화를 간략하게 소개만 해놓고 있는 삼국사기(1145)와 대조를 이룬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편은 원년부터 69년까지 기록이 있다.
그런데 14년부터 38년까지는 기록이 없다. 이 기간을 B라 부르기로 하고 원년부터 13년까지의 기록은 A라 부르기로 한다.
39년부터 43년까지는 ...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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