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945 일본통치기
일조시대 영남은 가장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는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해간 사람의 수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재일교포의 본적지 구성은 경남 27%, 경북 20%, 제주 16%, 서울 11%, 전라도 9%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일본군 위안부도 영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도 경상도가 가장 거셌는데, 본적지별 독립유공자의 분포는 경상도 3500여 명, 전라도 2300여 명, 평안도 2200여 명 등으로 나타나 있다.
http://qindex.info/i.php?x=13094
 1946 대구인민봉기
대구인민봉기는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응축된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으면서 일어났다.
http://qindex.info/i.php?x=9337
 1946 미군정의 앞잡이 민주당
해방 직후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전국으로 인민위원회가 확장되어 나갔으나 미군은 이를 뭉개고 군정을 강제하였다. 당시 한국 민중들은 사회주의를 선호하여 남로당이 최대 정당이 되었고 지주들은 이에 대응하여 민주당을 만들었다. 미군정청은 민주당과 협력하여 일제시대의 경찰과 관료를 많이 기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분노가 대구에서 폭발하여 경찰은 맞아죽고 민주당과 동아일보 지부는 불에 탔다. 민주당의 주역이자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는 전라도의 지주였다.
http://qindex.info/i.php?x=28787
 1946.10 대구인민봉기
(영천) 오전 1시경 수만 명의 주민들이 일제히 봉기해 읍내를 포위하여 통신망을 절단하고 군청, 경찰서, 우편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출장소 등과 지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불태웠다. 40여 명의 경찰이 무장 해제되거나 납치되었으며 관리들도 다수 살해되고, 군수 이태수도 살해되었으며 한민당의 요인이자 영천의 대지주였던 이인석의 집도 공격을 받았다.
http://qindex.info/i.php?x=17297
 1946.10.01 대구인민봉기
대구인민봉기는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응축된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으면서 일어났다.
http://qindex.info/i.php?x=2716#749
 1946.10.01 대구인민봉기
대구인민봉기는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응축된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으면서 일어났다.
http://qindex.info/i.php?x=92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