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인민봉기는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응축된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으면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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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인민봉기의 배경
일조시대 영남은 가장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는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해간 사람의 수가 가장 많은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2011년 재일교포의 본적지 구성을 보면 경남이 27%, 경북이 20%, 제주가 16%, 서울 11%, 전라도 9%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일본군 위안부도 영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신라를 혐오하고 백제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역사인식이 식민통치에 반영된 결과인지 모른다.
어쨋든 경북은 일본통치에 대한 저항이 가장 ...
749#6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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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9.08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9월 8일 하지 중장 휘하의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9월 9일 경성에 도착한 하지 사령장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다.
749#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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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라윤출
해방 직후 각 지역에는 인민위원회와 치안 조직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치안 조직은 씨름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라윤출과 배동발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를 이끈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군정과 뒤이은 이승만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라윤출은 월북하다 체포되었고 배동발은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처형되었다.
749#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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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 대구인민봉기
10월 1일 경북도청과 대구역 앞 광장에서 부녀자와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하자 다음날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대구경찰서를 점거하고 경찰들을 살해했다. 미군이 장갑차를 동원하여 출동하자 주동자들은 칠곡과 영천 등지로 흩어졌다. 3일에는 칠곡, 영천 그리고 구미에서 군중들이 일어나 경찰서를 점거하고 경찰과 지주들을 공격했다. 이날 충남의 경찰들이 도착하여 공격하자 주동자들은 팔공산과 유학산 등지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749#18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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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1
도청 광장에서는 부녀자들이 중심이 된 1000여 명의 기아 시위대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구역 앞 광장과 서쪽의 금정 일대에서 무장경찰대와 시위대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대치했다. 삼엄한 경계태세 속에 시위대의 혁명가 합창이 울려 퍼졌다.
경찰이 바리케이드와 무장을 해제하려고 할 때 시위대 쪽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돌팔매가 경찰을 자극했다.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고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이때 노동자 1명이 피살됐다.
749#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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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2 13:00
미군 진압부대가 대구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이때 선발대로 나선 것은 보병이었다. 미군은 사건현장에 접근하고도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위협 정찰만 했다.
오후 3시쯤 미군은 전차대를 투입하면서 적극적인 해산작전에 나섰다. 오후 3시 미군의 도시폭동 및 시가전 진압용 전술차인 M-7 마운트(Mount) 4대가 출현했다. 미군탱크의 출현으로 대구경찰서는 총성 한 번 없이 수복됐다.
749#9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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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3 선산인민위원회 박상희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상희가 이끄는 2000여 명의 군중은 구미경찰서를 습격하고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장 등 경찰관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또 구미 면사무소를 습격해 양곡 135가마를 탈취했다. 이들은 서장과 서원의 가옥은 물론 선산군 내 요인의 집을 모조리 파괴했다. 무기를 탈취한 40여 명의 군중은 선산군청도 습격했다. 6일 오전 지원경찰이 들이닥치자 박상희는 도주하다가 사살당했다.
749#4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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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25 예천인민위원회
동족의 피로 물들인 영남사건의 주범은 다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급비밀에 수사를 계속중 드디어 일당 6명이 23일 하오 시내 모처 좌익정당원의 집에서 변장잠복하고 있는 것을 수도관구경찰청에서 체포하였다. 주범은 경북예천 인민위윈회 위원장 한일청(48) 동위원 조병옥(49) 박윤호(40) 구본용(36) 구자익(40) 등으로 구자익은 의사로서 대구사건 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 인도를 몰시한 악질의사의 한 사람으로 이것으로 대구사건과 주범을 해결을 보게 되었다.
749#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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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29 대구인민위원회 라윤출
일즉이 "라장군"이란 별명을 드르며 씨름으로 한때 이름을 날리든 대구 거리의 싸흠대왕 라윤출(34)로 이번 영남소요사건을 기화로 경찰관 30여명을 살해한 근대회유의 살인범으로서 그 죄악을 감추려고 38경계선을 뛰어넘으려다가 29일 경기도 포천 경찰서원에게 체포되어 30일 제1관구 경무총감부로 압송된 후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해방 후는 대구인민위원회 보안부대장으로 활동하였다한다.
749#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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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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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김수한 회고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우익(右翼)인사나 경찰관들이 타살(打殺)됐다. 거리 곳곳에는 경찰관들의 시신(屍身)이 널려 있었다. 깨진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뇌수(腦髓)가 빗물에 흘러갔다. 대구경찰서 앞에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라고 하는 일본 절이 있었다. 거기에는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처럼 경찰관 시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김수한은 기독교인으로 대구봉기에 분개하였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하였다. 훗날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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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30 민주당과 서북청년단
민주당은 해방직후 김성수 등 친일 지주들이 만든 정당인데 미군정에 참여하여 조병옥은 치안의 책임을 맡았다.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쫓겨난 기독교인들이 그 이듬해에 만든 단체인데 생계가 어려웠다.
두 단체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사회주의로 흘러가는 데 공통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당 당사는 김성수가 소유하고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고 서북청년단 사무실도 그곳에 있었다.
제주인민봉기가 발생하자 조병옥은 강경 진압을 독려했고 서청은 탄압에 앞장섰다.
749#18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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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30 피 묻은 십자가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
※1982년에 한경직 목사가 한 말이다.
그는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하다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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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대구폭동을 시발로 남한 각지에서는 수백수천의 노동자, 농민, 시민이 경찰서, 군청, 지서, 읍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군정경찰과 군정 관리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지방행정을 사실상 마비시키면서 일대 항쟁을 전개했다. 실로 전투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양상이었다. 항쟁은 12월 초까지 73개 시·군을 휩쓸고 지나갔으며, 연인원 230만명을 동원해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군중투쟁 기록을 남겼다.
749#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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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1 대구6연대 반란
사회주의 성향의 하재팔은 해방 후 대구에서 국군준비대를 만들었으나 미군정에 의해 용납되지 않자 해체하고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수료 후 1946년 2월에 대구 중동에서 6연대가 창설되자 거기에 들어갔다. 6연대는 하재팔과 그해 10월에 일어난 대구인민봉기의 영향을 받아 분위기가 사회주의 성향으로 흘렀다. 1948년 여순 반란 이후 숙군 작업이 벌어지자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고 팔공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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