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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인민봉기는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응축된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으면서 일어났다.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Salem Witch Trials
You've been accused of a crime you did not commit. It's impossible to prove your innocence. If you insist that you're innocent any way, you'll likely be found guilty and execu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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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인민봉기의 배경
일조시대 영남은 가장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는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해간 사람의 수가 가장 많은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2011년 재일교포의 본적지 구성을 보면 경남이 27%, 경북이 20%, 제주가 16%, 서울 11%, 전라도 9%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일본군 위안부도 영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신라를 혐오하고 백제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역사인식이 식민통치에 반영된 결과인지 모른다. 어쨋든 경북은 일본통치에 대한 저항이 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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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경상도 보리문디
1926년 동아일보가 보도한 총독부 경무국의 조사를 보면, 전국에 4,000여명의 나환자가 있는데 경북 1600여명, 전남 1100여명, 경남 950여명 등으로 영남과 전남에 나환자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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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ᑅ 독립유공자 - 공훈전사사료관
1945 ᑅ 독립유공자 - 공훈전사사료관
경상도가 일본통치에 대한 저항이 가장 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1) 고대에 일본과 잦은 갈등을 빚었던 신라의 역사적 기억이 근대 역사 교육을 통해 되살아난 까닭일까? (2) 중국을 숭배하고 왕조에 대한 절의를 중시하는 유학적 분위기가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힘들게 했을까? (3) 먹고살기 힘들어 만주와 일본으로 돈벌러 떠나야 했던 상황에 대한 불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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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ᑅ 독립유공자 - 공훈전사사료관
1945 ᑅ 독립유공자 - 공훈전사사료관
경상도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던 곳으로 민족해방운동도 좌익 및 친북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유공자 선정에는 이런 사람들을 배제하므로 실제 민족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독립유공자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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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9.06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정·선포하였다. 중앙인민위원 55명과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하였으며 군정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남북의 전 도, 군, 면에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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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9.08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9월 8일 하지 중장 휘하의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9월 9일 경성에 도착한 하지 사령장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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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9.16 김성수
고창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1920년에 동아일보를 창간하였다. 해방 후에는 조병옥, 장택상, 윤보선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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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9.16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 김성수, 조병옥, 장택상, 윤보선 등이 결성하였다. ○ 지주와 자본가들이 주축이었고 일조시대 기득권층이 의지했다. ○ 건국준비위원회와 그로부터 나온 조선인민공화국을 반대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 조병옥, 장택상, 윤보선 등 미군정청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고 그들은 옛 조선총독부의 경찰과 관료를 그대로 기용하였다. ○ 서북청년단 사무소는 한민당 본부가 있던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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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 미군정청 수도경찰국장 장택상
칠곡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미군정청의 수도경찰국장이 되어 일조시대 경찰들을 기용하였다. 김대중이 1950년대에 장택상의 참모로 활동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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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라윤출
해방 직후 각 지역에는 인민위원회와 치안 조직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치안 조직은 씨름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라윤출과 배동발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를 이끈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군정과 뒤이은 이승만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라윤출은 월북하다 체포되었고 배동발은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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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01 미군정청 경무국장 조병옥
기독교인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해방 후 김성수, 장택상, 윤보선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만들었다. 이어 미군정청의 경무국장이 되어 일조시대 경찰들을 기용하고 대구와 제주의 인민봉기를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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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03.05 토지개혁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이 법령은 일본인토지 소유와 조선인지주들의 토지소유 및 소작제를 철폐하고 몰수된 토지를 농민의 소유로 넘기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규정하였다. 이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긴 지주 계층이 월남하여 이남의 민중들에게 분풀이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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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 대구인민봉기
1946.10 대구인민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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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 대구인민봉기
10월 1일 경북도청과 대구역 앞 광장에서 부녀자와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하자 다음날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대구경찰서를 점거하고 경찰들을 살해했다. 미군이 장갑차를 동원하여 출동하자 주동자들은 칠곡과 영천 등지로 흩어졌다. 3일에는 칠곡, 영천 그리고 구미에서 군중들이 일어나 경찰서를 점거하고 경찰과 지주들을 공격했다. 이날 충남의 경찰들이 도착하여 공격하자 주동자들은 팔공산과 유학산 등지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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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처단으로
대구에 진주한 미군은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해산하고 친일관료들을 군정관리로 임명했다. 미군정은 김의균을 도지사로, 대구공소원장(지금의 고등법원장)과 검사장에 이호정과 한규용을, 대구지방법원장과 검사장에 함승호와 오완수를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에 판사를 역임한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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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처단으로
경북경찰청장에는 일제강점기 도회 의원을 지낸 조근영이, 그 후임에는 광복 직전까지 군수로 있던 권영석이 임명됐다. 대구경찰서장에는 박을수와 그 뒤를 이어 이성옥이 임명됐는데 둘 다 친일경찰로 민족운동을 탄압한 자들이었다. 친일경찰은 일제시기 악행을 버리지 못한 채 광복 후에도 여전히 고문, 구타 등을 자행해 지역 주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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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처단으로
폭동 초기 경북도 내에서 약 45명의 경찰관이 살해됐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폭도로 변한 군중은 경찰의 얼굴과 몸뚱이를 칼과 도끼로 난자하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경찰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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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1
도청 광장에서는 부녀자들이 중심이 된 1000여 명의 기아 시위대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구역 앞 광장과 서쪽의 금정 일대에서 무장경찰대와 시위대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대치했다. 삼엄한 경계태세 속에 시위대의 혁명가 합창이 울려 퍼졌다. 경찰이 바리케이드와 무장을 해제하려고 할 때 시위대 쪽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돌팔매가 경찰을 자극했다.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고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이때 노동자 1명이 피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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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1¦경북도청
경상감영터에 경북도청이 있었고 그 왼쪽에 대구경찰서가 있었으며 그 위쪽에 있는 대구역은 지금도 그대로다. 대구공회당은 대구역 왼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대구콘서트홀로 바뀌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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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1¦경북도청(1930년)
1946.10.01¦경북도청(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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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1¦대구역(일조시대)
1946.10.01¦대구역(일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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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1¦이만섭
이전에도 대륜중학교와 대구상업학교 등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연합시위가 잦았다. 10월 1일에도 학생들이 연합시위를 하며 대구경찰서를 점거하였다. 당시 대륜중학교의 경우 이만섭의 주도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였다. ※이만섭은 1950년에 대륜중학교를 졸업하였다. 516이후 박정희에 의해 발탁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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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2 10:00
대구의과대학, 대구사범대학, 대구농과대학 학생들은 대구사범대학에서 연합집회를 연 뒤 경찰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메고 대구경찰서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전 10시경 3개 대학 학생들과 남녀 중학생 수천명이 대구경찰서를 포위하고 발포중지와 무장해제,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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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2 10:00
오전 10시도 채 안 돼 파업노동자 숫자는 수천명 선으로 불어났다. 박헌영이 쓴 ‘10월인민항쟁’에 따르면 9·9식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관들이 단상에서 선동하는 여공을 사살하고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해 18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보복총격으로 경찰관도 4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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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2 12:00
대구시내 각 기관 직원 대다수도 미군정에 등을 돌렸다. 미군정에 몸담고 있는 도청과 부청의 중하급 간부들은 2일 오후부터 노골적으로 자리를 뜨거나 태업을 했다. 경북도청의 부장급 이상 조선인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도 ‘총사직론’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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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2 13:00
미군 진압부대가 대구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이때 선발대로 나선 것은 보병이었다. 미군은 사건현장에 접근하고도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위협 정찰만 했다. 오후 3시쯤 미군은 전차대를 투입하면서 적극적인 해산작전에 나섰다. 오후 3시 미군의 도시폭동 및 시가전 진압용 전술차인 M-7 마운트(Mount) 4대가 출현했다. 미군탱크의 출현으로 대구경찰서는 총성 한 번 없이 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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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2 17:00 계엄령
대구지구 계엄사령관 포츠(Russell J. Ports) 대령은 포고령 제1호에서 경찰이 치안을 유지할 것이며, 최후 수단으로 군대가 동원될 것이고, 시민은 경찰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0명 이상의 집회와 회의가 금지되고,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야간통행도 금지됐다. ※이때 선포된 계엄령은 10월 22일에 해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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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2 칠곡
1946.10 대구인민봉기 - 솔까역사1946.10 동명 지서1946.10 동명 파출소1946.10.02 21:00 왜관1946.10.02 신동 지천 약목1946.10.031946.10.03 06:00 왜관1946.10.03 칠곡 인동 석적 북삼1946.10.03ᑀCamp Carroll다부동약목면 동안리 학살
 
1946.10.02¦시가전
1946.10.02¦시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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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3 경무부장 조병옥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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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3 선산인민위원회 박상희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상희가 이끄는 2000여 명의 군중은 구미경찰서를 습격하고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장 등 경찰관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또 구미 면사무소를 습격해 양곡 135가마를 탈취했다. 이들은 서장과 서원의 가옥은 물론 선산군 내 요인의 집을 모조리 파괴했다. 무기를 탈취한 40여 명의 군중은 선산군청도 습격했다. 6일 오전 지원경찰이 들이닥치자 박상희는 도주하다가 사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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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3 영천
1945+1946.10 대구인민봉기 - 솔까역사1946.10.031946.10.03 01:001946.10.03+ 11946.10.03+ 21946.10.051946.10.05+1950-고경면 -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고경면 동도리고경면 파계리, 덕정리, 논실리대구선영천향교청통면 신학리
 
1946.10.15 동아일보
폭동사건을 기화로 10명 내지 20명식으로서 무규무통제적으로 조직된 일부 폭도는 2일 대구경찰서 유치장을 파괴하였는데 이들은 대개가 체포되어 대구서와 달성서에서 취조를 밧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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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15 영천과 왜관
○ 영천에서는 '경찰관을 죽여라'는 외침과 함께 폭동이 일어나 경찰서에 불을 질러 군수와 여러 명이 죽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었다. ○ 왜관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경찰서장이 구타당해 생명이 위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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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22 계엄령 해제
○ 10.1 사건으로 지난 2일 미군사령관 파-쓰 대좌의 발령으로 대구, 달신, 경주, 영일 지구에 포령중이든 계엄령은 22일 오전 0시를 기하야 해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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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25 예천인민위원회
동족의 피로 물들인 영남사건의 주범은 다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급비밀에 수사를 계속중 드디어 일당 6명이 23일 하오 시내 모처 좌익정당원의 집에서 변장잠복하고 있는 것을 수도관구경찰청에서 체포하였다. 주범은 경북예천 인민위윈회 위원장 한일청(48) 동위원 조병옥(49) 박윤호(40) 구본용(36) 구자익(40) 등으로 구자익은 의사로서 대구사건 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 인도를 몰시한 악질의사의 한 사람으로 이것으로 대구사건과 주범을 해결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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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29 대구인민위원회 라윤출
일즉이 "라장군"이란 별명을 드르며 씨름으로 한때 이름을 날리든 대구 거리의 싸흠대왕 라윤출(34)로 이번 영남소요사건을 기화로 경찰관 30여명을 살해한 근대회유의 살인범으로서 그 죄악을 감추려고 38경계선을 뛰어넘으려다가 29일 경기도 포천 경찰서원에게 체포되어 30일 제1관구 경무총감부로 압송된 후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해방 후는 대구인민위원회 보안부대장으로 활동하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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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김수한 회고
대구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우익인사나 경찰관들이 타살됐다. 거리 곳곳에는 경찰관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대구공회당 앞에서는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주듯이 쌀을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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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김수한 회고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우익(右翼)인사나 경찰관들이 타살(打殺)됐다. 거리 곳곳에는 경찰관들의 시신(屍身)이 널려 있었다. 깨진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뇌수(腦髓)가 빗물에 흘러갔다. 대구경찰서 앞에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라고 하는 일본 절이 있었다. 거기에는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처럼 경찰관 시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김수한은 기독교인으로 대구봉기에 분개하였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하였다. 훗날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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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08 동아일보
지난 10월 1일 이후의 영남일대 소동사건 주모자에 대하야서는 방금 대구지방법원에서 미군율위원회에 의한 특별군율 재판을 개정하고 있다. ... 장현중과 황첨암 양인은 대구에서 이러난 소요사건때 경찰관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을 선고 바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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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16 전남 강진 경찰서 피습
지난 16일 오후 1시 반 약 2백명의 군중이 전라남도 강진국 내의 대구 경찰지서를 습격총으로 사격했는데 경찰측에서는 이에 응전하야 군중을 격퇴시키었다한다. 경찰측의 손해는 없고 군중측의 손해는 잘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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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30 서북청년단
1946년 3월 5일에 월남자 단체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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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30 민주당과 서북청년단
1946.11.30 민주당과 서북청년단
민주당은 해방직후 김성수 등 친일 지주들이 만든 정당인데 미군정에 참여하여 조병옥은 치안의 책임을 맡았다.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쫓겨난 기독교인들이 그 이듬해에 만든 단체인데 생계가 어려웠다. 두 단체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사회주의로 흘러가는 데 공통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당 당사는 김성수가 소유하고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고 서북청년단 사무실도 그곳에 있었다. 제주인민봉기가 발생하자 조병옥은 강경 진압을 독려했고 서청은 탄압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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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30 피 묻은 십자가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 ※1982년에 한경직 목사가 한 말이다. 그는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하다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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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30 피 묻은 십자가
1946.11.30 피 묻은 십자가
2020년 통계지리정보서비스(SGIS)에서 뽑은 개신교인 비율이다. 옅은 색일수록 비율이 낮다. 분포는 건국 전후의 민중학살과 연결지어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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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빨치산의 전신 야산대
G-2 보고서에 따르면, 소총 204자루, 권총 11자루, 탄약 2,688발이 탈취 당했으나 회수된 것은 소총 118자루, 권총 3자루, 탄약 1,035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회수되지 못한 무기가 뒷날 빨치산의 전신인 야산대의 무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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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앞산빨래터
대구인민봉기때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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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대구폭동을 시발로 남한 각지에서는 수백수천의 노동자, 농민, 시민이 경찰서, 군청, 지서, 읍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군정경찰과 군정 관리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지방행정을 사실상 마비시키면서 일대 항쟁을 전개했다. 실로 전투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양상이었다. 항쟁은 12월 초까지 73개 시·군을 휩쓸고 지나갔으며, 연인원 230만명을 동원해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군중투쟁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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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독촉국민회, 독촉청년연맹,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도 조직적으로 보복을 자행했다. 지방에 따라 일부 우익청년단체는 좌익관계자를 직접 체포 혹은 구타하는 사형(私刑)을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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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1 대구6연대 반란
사회주의 성향의 하재팔은 해방 후 대구에서 국군준비대를 만들었으나 미군정에 의해 용납되지 않자 해체하고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수료 후 1946년 2월에 대구 중동에서 6연대가 창설되자 거기에 들어갔다. 6연대는 하재팔과 그해 10월에 일어난 대구인민봉기의 영향을 받아 분위기가 사회주의 성향으로 흘렀다. 1948년 여순 반란 이후 숙군 작업이 벌어지자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고 팔공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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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0 민보단, 200여명 학살
경찰 하부조직이었던 민보단(民保團)에 의해 경주 내성면 일대의 주민 200여명이 빨치산에 협력했다는 등의 이유로 학살당했다. 주범은 이협우란 자로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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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보도연맹 학살
대구인민봉기에 연루돼 형무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달성군 가창골에서, 경산의 코발트광산에서, 수감 중인 형무소에서 살해됐다. 더 심하게는 경찰청 담벽에 세워졌다가 가마니에 덮인 시체로 변했다. 이때 죽은 사람이 수천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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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516군사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만든 당이다. 민주당의 색깔 공세에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20여년 전에 불법화된 남로당 지지계층이 공화당 지지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16군사정변을 주도한 박정희는 대구인민봉기때 사살된 선산인민위원회 박상희의 친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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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인민봉기
10월항쟁이라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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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의 출신지
재일교포의 출신지
2011년 재일교포의 본적지 구성을 보면, 경남이 27%, 경북이 20% 그리고 제주가 16%로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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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가(赤旗歌 The Red Flag)
영국 노동당의 반공식적인 당가이며, 북아일랜드 사회민주노동당과 아일랜드 노동당의 공식 당가이다. 독일 민요 오 탄넨바움의 번안곡이다. 대구인민봉기때 군중들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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