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2.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 > (2) 위략 부정
 
 BC 0311 ᑅ 사기(BC 91)
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 및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예, 맥, 조선 그리고 진번과 교류하여 이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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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사기(BC 91)
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帰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 造陽 集解韋昭曰 地名在上谷 正義按 上谷郡今嬀州 -- 襄平 索隠韋昭云 今遼東所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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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사기(BC 91)
그 후에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오랑캐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와 함께 진시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에 군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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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사기(BC 91)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鄣塞 연나라가 그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았다. -- 燕의 전성기는 昭王(BC 311 - BC 279) 때였다. 秦·楚·趙·魏·韓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齊을 치고 70여개의 성과 도읍인 임치(臨淄)까지 점령할 정도의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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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위략(265±)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 燕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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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위략(265±)
연나라의 침공에 대해, 사기는 연나라가 관리를 두어 보루와 요새를 쌓을 만큼 조선을 강하게 복속시켰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반해, 위략은 조선이 단지 영토만을 상실했을 뿐 왕조는 유지되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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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염철론(BC 81)
燕襲走東胡辟地千裏度遼東而攻朝鮮 연나라가 동호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천리의 땅을 개척했다. 또 요동을 지나 조선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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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사기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연나라의 침공은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먼저 동호를 침공하여 요동까지 차지한 다음 진번과 조선을 침공하여 복속시킨 것이 된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요동을 빼면 동쪽으로 2천여 리의 공간이 나오기 힘들다. 더구나 사기에는 조선이 예맥 및 진번과 같은 비중으로 언급되고 있어 요동을 뺀 공간을 이들 나라들과 분할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2천리의 땅을 빼앗기고도 조선 왕조가 유지되었다는 위략의 기록은 매우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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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22 사기(BC 91)
秦滅燕屬遼東外徼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요동 변방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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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21 - BC 202 위략(265±)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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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02 사기(BC 91)
漢興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한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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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사기(BC 91)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몽치 머리에 오랑캐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燕과 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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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위략(265±)
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간 뒤, 燕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구슬을 하사하며, 백 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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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위략(265±)
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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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사기(BC 91)
燕과 丹의 무리가 遼를 어지럽힐 때 만은 유민을 거두어 해동에 모아 진번에 집결시키고 변방의 외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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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사기(BC 91)
이 때는 마침 효혜·고후(BC195- BC188)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오랑캐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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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ᑀ 잠부론(潛夫論 85-162)
其後韓西亦姓韓爲衛滿所伐遷居海中 그후 한서도 역시 韓씨 성을 사용하였는데, 위만의 침공을 받아 바다 가운데로 옮겨갔다. (案韓西蓋卽朝鮮. 朝誤爲韓, 西卽鮮之轉, 故 『尙書大傳』 以西方爲鮮方. 살펴보건대 韓西는 朝鮮이 아닐까 싶다. 朝를 韓으로 잘못 썼고 西는 鮮을 달리 쓴 것으로 보인다. 상서대전에도 西方을 鮮方으로 표기하기도 했었다. - 1800년경 왕계배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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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ᑀ 위략(265±) 06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씨라는 성을 사칭하였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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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ᑀ 위략(265±)
위략과 삼국지의 기자 왕조 이야기는 사기(기원전 91)에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한서(82)까지도 나오지 않다가 삼국지(289)와 그 이후의 사서인 후한서(445)에 나온다. 후대에 이야기가 만들어져 잠부론 등에 실렸고 위략과 삼국지는 그것을 옮긴 것이 아닐까? 참고로, 滿의 성을 衛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도 잠부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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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45± ~ BC 0086± 司馬遷
주나라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하였다.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太初曆)을 기원전 104년 무제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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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0-023 위략(265±)
지황 연간에 염사착이 진한의 우거수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 군에서는 염사착의 공과 의를 표창하고, 관직과 밭 그리고 집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125년에 이르러서는 그로 인하여 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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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4 후한서(445)
한(韓)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漢)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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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4 후한서(445)
후한서는 韓에 대해 삼국지의 기록을 대부분 계승하고 있지만, 이 부분은 삼국지에 없는 내용이다. 후한서의 저자가 염사읍군의 이야기를 취하고 염사착의 이야기를 부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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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65 ± 위략(魏略)
위락의 편찬 연대는 魏 말기부터 晉 초기로 추정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여러가지 이설 있다. 유지기(劉知幾)는 "사적(事績)이 魏明帝 시대까지 기록되었다."라고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의 기록도 있다. 마지막 기록이라 생각되는 것은 삼국지 가규전(賈逵傳) 주석에 인용된 감로(甘露) 2년의 기록이다. 그 이후에는 책이 완성되었는지, 중간에 저술이 끝난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魏와 晉 황제들의 휘를 피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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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29 배송지주(裴松之注)
송나라의 문제가 배송지에게 명하여 삼국지에 주를 단 것이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책을 수집하여 주를 달게 한 것이다. 배송지는 누락된 사료를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약 200여 권이 넘는 여러 사서를 인용하여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하였으며 본문의 몇 가지 오류나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도 지적하였으며 진수의 인물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평을 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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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략 부정
조선과 관련해서 사기와 위략이 어긋나는 부분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연나라의 조선 침공에 대한 것으로,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기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고 위략의 이야기는 어색하다. 둘째는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에 대한 것으로, 위략은 사기에 없는 기자 왕조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기자조선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평가된다. 위략과 후한서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염사착과 염사읍군에 대한 이야기다. 이 부분은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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