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128 濊·沃沮史

❶ 濊 → 衛滿朝鮮 → 漢·蒼海郡 → 漢·臨屯郡 → 漢·樂浪郡·東部都尉 → 高麗 → 渤海·南海府 → 王高 → 元·雙城摠管府 → 李朝 ❷ 沃沮 → 衛滿朝鮮 → 漢·玄菟郡 → 漢·樂浪郡·東部都尉 → 高麗 → 渤海·柵城府 → 金·曷懶路 → 李朝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蓋單山嶺┆五水┆東北九城
20656#30664 SIBLINGS CHILDREN OPEN
 
-0128~-0125 蒼海郡
20656#13552 SIBLINGS CHILDREN 13552
 
-0108~-0082 臨屯郡
20656#13554 SIBLINGS CHILDREN 13554
 
-0107 玄菟郡
20656#22964 SIBLINGS CHILDREN 22964
 
-0082 臨屯을 玄菟에 합치다.
20656#23159 SIBLINGS CHILDREN 23159
 
-0075~0030 樂浪郡 東部都尉
20656#23156 SIBLINGS CHILDREN 23156
 
0245 曹魏의 濊·沃沮 정벌
20656#15020 SIBLINGS CHILDREN 15020
 
0265~0316 晉率善穢伯長
20656#22185 SIBLINGS CHILDREN 22185
 
0281 東有樂浪·北有靺鞨
20656#19696 SIBLINGS CHILDREN 19696
 
0568 황초령·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20656#15445 SIBLINGS CHILDREN 15445
 
0698~0926 渤海 南海府·柵城府
20656#23191 SIBLINGS CHILDREN 23191
 
1096 乙離骨嶺과 注阿門水 서쪽
영가가 진무하다.
20656#23364 SIBLINGS CHILDREN 23364
 
1102.04.20⁻ 乙離骨嶺 동쪽
영가에게 귀부하다.
20656#23366 SIBLINGS CHILDREN 23366
 
1103 영가가 曷懶甸을 분란시킨 達紀를 잡아 보내다.
20656#23281 SIBLINGS CHILDREN 23281
 
1103.02 영가가 蕭海里를 격파하고 알려오다.
20656#23073 SIBLINGS CHILDREN 23073
 
1103.07.27 영가가 또 斜葛을 보내다.
20656#23324 SIBLINGS CHILDREN 23324
 
1103.10.29⁺ 오아속이 曷懶甸에 石適歡을 파견하다.
20656#21284 SIBLINGS CHILDREN 21284
 
1104.01.06 왕고와 완안부의 대립
20656#23399 SIBLINGS CHILDREN 23399
 
1104.02.08 定州
성 밖에서 패전하다.
20656#22975 SIBLINGS CHILDREN 22975
 
1104.03.04 闢登水에서 패전하다.
20656#22977 SIBLINGS CHILDREN 22977
 
1104.06.13 완안부와 강화하다.
20656#23378 SIBLINGS CHILDREN 23378
 
1104.06.13⁺ 活涅水(活禰水)
오아속이 斜葛을 파견하다.
20656#23380 SIBLINGS CHILDREN 23380
 
1104.08⁺ 三潺水
오아속이 다시 石適歡을 파견하다.
20656#23392 SIBLINGS CHILDREN 23392
 
1106 왕고가 오아속의 직위 계승을 축하하다.
20656#14681 SIBLINGS CHILDREN 14681
 
1107~1109 曷懶甸 침공
20656#30663 SIBLINGS CHILDREN 30663
 
1258~1356 雙城摠管府
20656#22981 SIBLINGS CHILDREN 22981
 
1388 왕고 우왕의 표
20656#23005 SIBLINGS CHILDREN 23005
 
1390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
20656#23274 SIBLINGS CHILDREN 23274
 
1404 이조 태종의 주
20656#23006 SIBLINGS CHILDREN 23006
 
 濊·沃沮史
濊·沃沮史
20656#19704 SIBLINGS CHILDREN 19704
 
-2294~-2184 舜
北山戎·發·息慎 東長·鳥夷 북쪽으로는 산융, 발 그리고 식신을, 동쪽으로는 장과 조이를 다독거리니 사해 안이 모두 순의 공적을 받들었다.
20656#31441 SIBLINGS CHILDREN 31441
 
-1021 逸周書
穢人前兒前兒若獮猴立行聲似小兒 예인은 전아(를 바친다). 전아는 원숭이처럼 생기고 서서 다니며 어린애와 같은 소리를 낸다. 良夷在子在子幣身人首脂其腹炙之藿則鳴曰在子 양이는 재자(를 바친다). 재자는 포폐의 체형을 하고 있으나 머리는 사람이다. 배에 기름이 있어 그것을 태운다.
20656#15430 SIBLINGS CHILDREN 15430
 
-1021 ◾長夷→穢人
순임금 시기에 중국의 동쪽에 長夷와 鳥夷가 있었는데 서주 시기에 와서는 각각 前兒를 바치는 穢人과 在子를 바치는 良夷로 불리고 있었다. 良夷는 훗날 다시 朝鮮으로 불리게 되는데, 삼국지(289)에 의하면, 朝鮮의 동쪽이 다 濊고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었으며 濊의 남쪽에는 辰韓이 있었다. 穢人은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 유역에 이른 뒤 거기서부터는 다시 鳥夷 때부터 이어져오던 良夷의 교역 경로를 따라 중국에 이른 듯하다.
20656#31445 SIBLINGS CHILDREN 31445
 
-0645 管子
北(孤竹┆山戎┆穢貉┆拘秦夏) 북쪽으로 고죽, 산융, 예맥 그리고 구진하에 이르렀다.
20656#31443 SIBLINGS CHILDREN 31443
 
-0300⁺ 史記(-91) 貨殖列傳
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 및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穢, 맥, 조선 그리고 진번과 교류하여 이익을 얻었다.
20656#16087 SIBLINGS CHILDREN 16087
 
-0128⁻ 史記(-91)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에게 입현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예가 단단대령 남로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였다면 위만 조선에 의해 그 길이 끊길 수 있었다.
20656#20942 SIBLINGS CHILDREN 20942
 
-0128~-0125 蒼海郡
濊는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하였는데 위만 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濊君 남려 등은 28만 구를 들어 황초령을 넘고 압록강을 지나 요동에 귀부하였다. 한무제는 濊에 蒼海郡을 설치하였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蒼海는 푸른 바다라는 뜻으로 누런 바다라는 뜻의 黃海와 대조된다. 濊의 위치로 보나 蒼海의 뜻으로 보나 蒼海郡은 동해에 접한 지역으로 볼 수 밖에 없다. 蒼海郡의 설치 경험은 훗날 臨屯郡을 설치하는 바탕이 되었을 듯하다.
20656#15421 SIBLINGS CHILDREN OPEN
 
-0108~-0082 臨屯郡
임둔군은 과거 蒼海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인 듯하다.
20656#16089 SIBLINGS CHILDREN OPEN
 
-0108~-0082 臨屯郡·東暆
창해군은 황초령을 넘어 한나라와 연결되며 설치되었으므로 치소는 황초령 아래에 있었을 듯하다. 임둔군은 창해군을 재건하는 의미를 지녔으므로 임둔군의 치소 또한 창해군의 치소를 재건했을 듯하다. 蒼海郡 → 臨屯郡·東暆 → 合懶 → 咸州 → 合蘭 → 咸興
20656#2755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107 三國志(289)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한무제 원봉 2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20656#242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107 ◾개마대산 동쪽에서 개마대산 서쪽을 통치?
-0107 ◾개마대산 동쪽에서 개마대산 서쪽을 통치?
이 어색함은 현도군의 초기 치성이 있던 옥저성을 황초령 아래로 설정해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는 이내 옥저를 현도군에서 분리하여 낙랑군 동부도위로 소속시키고 현도군 치소는 개마대산을 넘고 압록강 유역을 지나 멀리 요하 유역으로 옮겼다. 대동강에 낙랑군을 설치한 한나라가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영흥만에 임둔군을 설치한 뒤 해안을 따라 올라가 이듬해에 길주에 현도군을 설치하고 압록강 유역을 이 현도군에 소속시킨 때문인 듯하다.
20656#21249 SIBLINGS CHILDREN 21249
 
-0107 玄菟郡
┆漢書 3┆ 高句驪 上殷台 西蓋馬 ➔ ┆後漢書 6┆ 高句驪 西蓋馬 上殷台 高顯 候城 遼陽 ➔ ┆晉書 3┆ 高句麗 望平 高顯
20656#11087 SIBLINGS CHILDREN OPEN
 
-0087 茂陵書
서진 시대에 臣瓚은 한서를 주석할 때 茂陵書 또는 茂陵中書라는 문헌을 언급했는데, 옛 사람들은 이를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이른바 茂陵書는 서한 茂陵에서 출토된 한나라 무제 시대의 공문서를 말한다.
20656#6834 SIBLINGS CHILDREN 6834
 
-0087 漢書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 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真番郡 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 장안에서의 거리가 霅縣까지는 7640리고 東暆까지는 6138리다. 真番郡은 차령 이남까지 내려오지 않았을 듯하므로 東暆가 철령 이남이라면 真番郡의 치소와의 거리차가 1500리가 되기 힘들다. 따라서 東暆의 위치로는 영흥만이 어울린다.
20656#6771 SIBLINGS CHILDREN 6771
 
-0082 後漢書(445)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20656#20994 SIBLINGS CHILDREN 20994
 
-0075 玄菟郡 이전┆東部都尉 설치
夷貊의 침략을 받자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현으로 만들어 낙랑에 소속시켰다. 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을 갈라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불내성에 치소를 두었다.
20656#60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朝鮮 䛁邯 增地 黏蟬 駟望 屯有 帶方 列口 長岑 海冥 昭明 提奚 含資 遂成 鏤方 渾彌 浿水 吞列┆東暆 蠶台 不而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부조)
20656#15000 SIBLINGS CHILDREN 15000
 
0008 漢書(82)
朝鮮 䛁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東暆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부조)
20656#15010 SIBLINGS CHILDREN 15010
 
0030 三國志(289)
변경의 郡을 줄이면서 도위도 폐지하였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우두머리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華麗·沃沮 등의 제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20656#21188 SIBLINGS CHILDREN 21188
 
0245
0245
20656#7241 SIBLINGS CHILDREN 7241
 
0245 三國志(289)
扶餘의 북쪽에는 弱水가 있고 서쪽에는 鮮卑가 있으며 동쪽에는 挹婁가 있고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다. 高句麗의 북쪽에는 扶餘가 있고 동쪽에는 沃沮가 있으며 남쪽에는 朝鮮과 濊가 있다. 朝鮮의 동쪽이 다 濊다. 沃沮의 북쪽에는 扶餘와 挹婁가 있고 서쪽에는 高句麗가 있으며 남쪽에는 濊가 있다.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고 남쪽에는 辰韓이 있다.
20656#15455 SIBLINGS CHILDREN 15455
 
0245 三國志(289) 濊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舉邑降 245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령 동쪽의 예가 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20656#1962 SIBLINGS CHILDREN 1962
 
0245 三國志(289) 沃沮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濵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 고구려가 貊이니 여기에 나오는 濊貊은 濊로 보아야 할 듯하다.
20656#23059 SIBLINGS CHILDREN 23059
 
0245 三國志(289) 沃沮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할 때 구려의 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옥저의 읍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급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궁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20656#23074 SIBLINGS CHILDREN 23074
 
0245 三國志(289) 沃沮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句麗에 신속케 되었다. 句麗는 그 중에서 大人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大加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貊·布·魚·鹽·海中食物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그곳의 美女를 보내게 하여 婢나 妾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奴僕처럼 대우하였다. ▐ 고려는 옥저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20656#23259 SIBLINGS CHILDREN 23259
 
0245 三國志(289) 高句麗
高句麗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고구려는 남쪽으로 조선예맥과 경계를 접하고 동쪽으로는 옥저와 접했다. ▐ 고구려가 貊이니 여기에 나오는 濊貊은 濊로 보아야 할 듯하다.
20656#20914 SIBLINGS CHILDREN COMMENT 20914
 
0265~0316 晉率善穢伯長
▐ 穢와 신라의 경계가 원래 영일만 인근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를 자주 침공한 낙랑은 이 穢일지 모른다. 한나라의 낙랑군에서는 일찌기 빠졌지만
20656#15770 SIBLINGS CHILDREN 15770
 
0281  東有樂浪·北有靺鞨
0281 東有樂浪·北有靺鞨
20656#20431 SIBLINGS CHILDREN 20431
 
0281 ❰❰⁵ -0020 솔까역사 新羅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20656#16921 SIBLINGS CHILDREN 16921
 
0284 ❰❰⁵ -0017 솔까역사 百濟
王謂羣臣曰 靺鞨²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20656#16860 SIBLINGS CHILDREN 16860
 
0285 ❰❰⁵ -0016 솔까역사 百濟
靺鞨²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20656#21788 SIBLINGS CHILDREN 21788
 
0286 ❰❰⁵ -0015 솔까역사 百濟
遣使樂浪²修好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20656#19699 SIBLINGS CHILDREN 19699
 
0290.02 ❰❰⁵ -0011 솔까역사 百濟
靺鞨²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20656#21789 SIBLINGS CHILDREN 21789
 
0290.07 ❰❰⁵ -0011 솔까역사 百濟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 樂浪²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이로 말미암아 樂浪²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20656#21515 SIBLINGS CHILDREN 21515
 
0292 ❰❰⁵ -0009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靑木山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烽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20656#21790 SIBLINGS CHILDREN 21790
 
0293.04 ❰❰⁵ -0008 솔까역사 百濟
樂浪²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0656#21764 SIBLINGS CHILDREN 21764
 
0293.07 ❰❰⁵ -0008 솔까역사 百濟
設秃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樂浪²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20656#21772 SIBLINGS CHILDREN 21772
 
0295.05 ❰❰⁵ -0006 솔까역사 百濟
“國家東有樂浪² 北有靺鞨² 侵軼疆境 少有寧曰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20656#21773 SIBLINGS CHILDREN 21773
 
0298 三國史記(1145) 百濟
한나라가 貊人과 함께 쳐들어왔다. 왕이 나가서 막다가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20656#21795 SIBLINGS CHILDREN 21795
 
0299 ❰❰⁵ -0002 솔까역사 百濟
樂浪²이 쳐들어와서 慰禮城을 불태웠다.
20656#21774 SIBLINGS CHILDREN 21774
 
0300.10 ❰❰⁵ -0001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20656#21796 SIBLINGS CHILDREN 21796
 
0300.11 ❰❰⁵ -0001 솔까역사 百濟
王欲襲樂浪²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20656#21775 SIBLINGS CHILDREN 21775
 
0304 ❰❰⁵ 0004.09 솔까역사 百濟
왕이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斧縣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나 한 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0656#21819 SIBLINGS CHILDREN 21819
 
0304.02 三國史記 百濟
몰래 군사를 보내 樂浪²의 서쪽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20656#21776 SIBLINGS CHILDREN 21776
 
0304.07 ❰❰⁵ 0004.07 솔까역사 新羅
樂浪³兵이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20656#21777 SIBLINGS CHILDREN 21777
 
0304.10 三國史記 百濟
왕이 樂浪²大守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20656#21778 SIBLINGS CHILDREN 21778
 
0313 三國史記(1145) 高句麗
樂浪¹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20656#21780 SIBLINGS CHILDREN 21780
 
0314 ❰❰⁵ 0014 솔까역사 新羅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6부의 날랜 병사를 발동하여 막게 하였다. 樂浪³이 내부가 비었을 것이라고 하고 금성을 공격해 오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그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閼川의 주위에 주둔하며 돌무지 20개를 만들어 놓고서 떠나갔다.
20656#21782 SIBLINGS CHILDREN 21782
 
0314.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20656#21824 SIBLINGS CHILDREN 21824
 
0322.09 ❰❰⁵ 0022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述川城을 쳐들어왔다.
20656#21831 SIBLINGS CHILDREN 21831
 
0330 ❰❰⁵ 0030 솔까역사 百濟
동부의 흘우가 말갈과 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20656#21832 SIBLINGS CHILDREN 21832
 
0331 ❰❰⁵ 0031 솔까역사 百濟
高木城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20656#21833 SIBLINGS CHILDREN 21833
 
0332 ❰❰⁵ 0032 솔까역사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시집보냈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의 북을 찢고 피리를 뽀개게 한 뒤 왕에게 樂浪²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樂浪²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20656#21783 SIBLINGS CHILDREN 21783
 
0334.09 ❰❰⁵ 0034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20656#21834 SIBLINGS CHILDREN 21834
 
0336 ❰❰⁵ 0036 솔까역사 新羅
樂浪³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20656#21784 SIBLINGS CHILDREN 21784
 
0337 ❰❰⁵ 0037 솔까역사 新羅
髙句麗王無恤 襲樂浪²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20656#21785 SIBLINGS CHILDREN 21785
 
0340 ❰❰⁵ 0040 솔까역사 新羅
華麗縣과 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貊國渠帥가 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20656#21786 SIBLINGS CHILDREN 21786
 
0342 ❰❰⁵ 0042 솔까역사 新羅
貊帥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20656#21787 SIBLINGS CHILDREN 21787
 
0355 ❰❰⁵ 0055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北鄙를 침범하였다.
20656#21835 SIBLINGS CHILDREN 21835
 
0356 ❰❰⁵ 0056 솔까역사 百濟
왕이 동부에 명하여 牛谷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게 하였다.
20656#21836 SIBLINGS CHILDREN 21836
 
0390 ❰❰³ 0210.10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20656#21837 SIBLINGS CHILDREN 21837
 
0391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북쪽 변경의 赤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20656#21839 SIBLINGS CHILDREN 21839
 
0394.09 ❰❰³ 0214 솔까역사 百濟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20656#21840 SIBLINGS CHILDREN 21840
 
0395 三國史記 新羅
말갈이 北邊을 침범하였다. 군사를 내어 그들을 悉直의 들판에서 크게 쳐부쉈다.
20656#21841 SIBLINGS CHILDREN 21841
 
0396 ❰❰³ 0216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20656#21842 SIBLINGS CHILDREN 21842
 
0397 ❰❰³ 0217 솔까역사 百濟
沙道城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20656#21843 SIBLINGS CHILDREN 21843
 
0400 ❰❰³ 0220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北邊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20656#21844 SIBLINGS CHILDREN 21844
 
0408 ❰❰⁵ 0108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牛谷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20656#21845 SIBLINGS CHILDREN 21845
 
0409 ❰❰³ 0229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20656#21846 SIBLINGS CHILDREN 21846
 
0524 울진봉평新羅비
20656#16896 SIBLINGS CHILDREN 16896
 
0568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맥과 경계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656#15444 SIBLINGS CHILDREN 15444
 
0568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압록강 유역과 영흥만 해안을 가르는 황초령에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것처럼 磨雲嶺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도 磨雲嶺이 두 문화권의 경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옥저와 예의 경계로 보기에 적당하다.
20656#17188 SIBLINGS CHILDREN 17188
 
0581~1115 高麗史(1451)
女眞은 본디 靺鞨의 遺種으로 隋·唐 사이에 勾高麗에 병합되었으며, 나중에 취락을 이루고 산택에 흩어져 살면서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定州·朔州 근처의 국경에 거주하는 자가 비록 간혹 내부하기도 했으나 잠시 신하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배신하기도 하였다. 盈哥와 烏雅束에 이르러 서로 이어서 추장이 되니 자못 무리의 인심을 얻어 그 기세가 점차 사나워졌다. ▐ 수서(636)에 고려가 598년에 말갈 기병 만여기를 동원하여 요서를 침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20656#23340 SIBLINGS CHILDREN 23340
 
0612 수서(636)
鏤方 長岑 海冥 蓋馬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옥저) 樂浪 黏蟬 含資 渾彌 臨屯 候城 提奚 踏頓 肅慎 碣石 東暆 帶方 襄平 凡此衆軍 先奉廟略 駱驛引途 總集平壤
20656#17151 SIBLINGS CHILDREN 17151
 
0618~1125 金史(1344)
당나라 초엽에는 靺鞨이 粟末·黑水 2부가 있었는데, 모두 高麗에 신속되었었다. 당나라가 高麗를 멸하자 粟末이 東牟山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하여져 渤海라 부르고 성을 大씨라 하였는데 문물과 예악이 있었다. 당나라 말엽에 이르러 차츰 쇠퇴하여져 이 뒤로는 다시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벌하자 발해는 귀부하였는데, 대개 그 후예들이다.
20656#23160 SIBLINGS CHILDREN 23160
 
0668
0668
고려가 망한 후 單單大領과 蓋馬大山 동쪽은 발해의 南海府와 柵城府가 되었다.
20656#21738 SIBLINGS CHILDREN 21738
 
0698~0926 南海府·柵城府
발해(渤海)는 고려가 망한 지 30여년 뒤인 698년에 고려의 유민 대조영이 세운 왕조다. 고려를 구성했던 맥(貊), 예(濊), 옥저 그리고 부여는 각각 발해의 압록부, 남해부, 용원부 그리고 부여부로 편제되었다. 200여 년 간 왕조를 이어가다 926년에 요(遼)에 병합되었다.
20656#15440 SIBLINGS CHILDREN 15440
 
0860~0873  발해의 행정구역
0860~0873 발해의 행정구역
20656#15006 SIBLINGS CHILDREN 15006
 
0860~0873 신당서(1060)
□貃故地為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為南京 曰南海府 領沃睛椒三州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로 책성부라고도 한다. 경·염·목·하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이며 옥·청·초의 3주를 통치한다. ▐ 예맥과 옥저가 바뀌어 있다. 柵城은 고구려의 幘溝漊(幘城) 및 북옥저의 置溝婁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20656#15011 SIBLINGS CHILDREN 15011
 
0916~1125 요나라
0916~1125 요나라
20656#23362 SIBLINGS CHILDREN 23362
 
0918 東女眞
黑水는 장백산 동북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靺鞨 이외의 종족은 없었던 듯하며 따라서 黑水人은 黑水靺鞨과 같은 뜻이다. 靺鞨은 女眞이라고도 했는데 장백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의해 동과 서로 갈려 있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곧 東女眞이다. 왕고는 이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東蕃이라고도 불렀다. ○ 黑水人=黑水靺鞨=東女眞=東蕃
20656#4642 SIBLINGS CHILDREN 4642
 
0989 文州防禦使
20656#23231 SIBLINGS CHILDREN OPEN
 
0995 登州團練使
20656#23250 SIBLINGS CHILDREN OPEN
 
0995 高州防禦使
20656#23272 SIBLINGS CHILDREN OPEN
 
0995 高麗史(1451)
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성종 14년에 영토를 나누어 10道로 할 때 和州·溟州 등의 군현으로 朔方道라 하였다.
20656#21743 SIBLINGS CHILDREN 21743
 
0995 高麗史(1451) 湧州防禦使
泉井(於乙買) → 井泉 ➔ 湧州 → 宜州(東牟·宜春·宜城) ┆ 宜州는 본래 고구려의 泉井郡(於乙買라고도 한다.)으로, 681년에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고 井泉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湧州라 불렀다. 995년에 방어사를 두었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1108년에 성을 쌓았다. 별호는 東牟이고(성종 때 정하였다.), 또 宜春·宜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해처로 鐵關이 있다. 바다섬인 竹島가 있다.
20656#21742 SIBLINGS CHILDREN 21742
 
1010 高麗史(1451)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공격하다 패배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여진족 95인이 내조하여 화주관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다. 여진족이 거란에 참소하자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20656#10014 SIBLINGS CHILDREN 10014
 
1018 世宗實錄地理志(1454) 長州防禦使
長州防禦使 → 長州縣 → 長谷縣 ┆속현이 1이니 長谷이다. 1012년에 城을 쌓고 1018년 무오에 長州防禦使라 일컫다가 뒤에 長州縣으로 고쳐서 본부의 임내를 삼았고 142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0656#22997 SIBLINGS CHILDREN 22997
 
1018 和州防禦使
20656#23190 SIBLINGS CHILDREN OPEN
 
1036 高麗史(1451)
정종 2년에 東界(北界와 더불어 兩界라 하였다.)라 불렀다.
20656#22911 SIBLINGS CHILDREN 22911
 
1041 高麗史(1451) 定州防禦使
巴只·宣威 ➔ 定州防禦使 → 定州都護府(中山) ┆定州는 옛날에 巴只라고 불렀고(宣威라고도 한다) 1041년에 定州防禦使로 하고 關門을 두었다. 1356년에 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별호는 中山이다. 鼻白山이 있다(봄·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20656#22951 SIBLINGS CHILDREN 22951
 
1046.02 遼史(1343) 曷懶河
蒲盧毛朵界曷懶河戶來附 詔撫之 포로모타계 갈라하의 호가 내부하니 조서를 내려 진무하였다.
20656#23360 SIBLINGS CHILDREN 23360
 
1046.03 遼史(1343) 曷懶河
蒲盧毛朵曷懶河百八十戶來附 포로모타부 갈라하의 180호가 내부하였다.
20656#23361 SIBLINGS CHILDREN 23361
 
1047 高麗史(1451)
문종 원년에 東北面(혹 東面·東路·東北路·東北界라고도 불렀다.)이라 불렀다.
20656#22912 SIBLINGS CHILDREN 22912
 
1096 金史(1344) 本紀01 020
命勝官醜阿等撫 定乙離骨嶺·注阿門水之西諸部居民 승관과 추아 등에 명하여 을리골령과 주아문수의 서쪽 각 부에 사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평정하게 하였다.
20656#23102 SIBLINGS CHILDREN 23102
 
1096◾ @을리골 @乙離骨
1096◾ @을리골 @乙離骨
乙離骨은 왕고에 인접해 있었지만 그 동쪽과 서쪽의 여러 부족들은 완안부에 종속되었으므로 乙離骨은 왕고의 북쪽에 있었다. 완안부는 乙離骨을 거쳐 曷懶에 이르렀는데, 曷懶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乙離骨은 개마대산의 서쪽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乙離骨의 위치로는 허천강 유역이 가장 적합하다. 고대에는 이곳이 西蓋馬였었다. ┆西蓋馬·蓋馬國·乙離骨·甲山
20656#23349 SIBLINGS CHILDREN 23349
 
1096◾ @을리골령 @乙離骨嶺 @조가령 @趙哥嶺
1096◾ @을리골령 @乙離骨嶺 @조가령 @趙哥嶺
20656#30630 SIBLINGS CHILDREN 30630
 
1101.02.12 高麗史(1451)
동여진의 乃巴只村 귀덕장군 甫馬와 弓漢伊忽村 도령 麻浦, 廣灘村 장군 骨夫 등 55인이 입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20656#23295 SIBLINGS CHILDREN 23295
 
1102.04.20 ⁻ 金史(1344) 列傳73 005
을리골령 복산부의 호석래 발근이 고려와 여진 사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목종이 족인 수아를 시켜 불러오게 하고 수아로 하여금 의원을 호송하여 고려 국경까지 돌려보내게 하였다. 의원이 돌아가 고려인들에게 “여진족으로 흑수부에 사는 부족은 날로 강성해져서 군대는 더욱 정예화되었으며 농사는 해마다 풍년이 든다.”라고 하였다. 고려왕이 이 말을 듣고 여진에 사신을 통하였다. 얼마 후에 호석래가 을리골령 동쪽의 여러 부족을 거느리고 내부하였다.
20656#23101 SIBLINGS CHILDREN 23101
 
1102.04.20 ⁻ 高麗史(1451)
東女眞太師盈歌遣使來朝 有本國醫者 居完顔部 善治疾 時盈歌戚屬有疾 盈歌謂醫曰 汝能治此人病 則吾當遣人歸汝鄕國 其人果愈 盈歌如約 遣人送至境上 醫者至言于王曰 女眞居黑水者 部族日强 兵益精悍 王乃始通使 自是來往不阻 盈歌
20656#23329 SIBLINGS CHILDREN 23329
 
1102.04.20 ⁻ 高麗史(1451)
고려의 의사가 완안부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영가가 사람을 시켜 국경까지 보내주었고 의사가 고려에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여진으로 흑수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20656#23330 SIBLINGS CHILDREN 23330
 
1102.04.20 高麗史(1451)
東女眞酋長盈歌遣使來朝 盈歌卽金之穆宗也 동여진의 추장 영가가 사자를 보내 내조하였는데, 영가는 곧 금의 목종이다.
20656#14704 SIBLINGS CHILDREN 14704
 
1102.04.20◾穆宗
20656#23339 SIBLINGS CHILDREN 23339
 
1102.11.26 高麗史節要(1452)
동여진의 盈歌가 사자를 보내어 은 세공인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20656#23335 SIBLINGS CHILDREN 23335
 
1102冬~1103.02 金史(1344) 本紀01 022
九年壬午 1102년 冬 蕭海里叛 겨울에 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遼追海里兵數千人 攻之不能克 요나라가 수천명의 군대를 보내어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太祖策馬突戰 流矢中海里首 海里墮馬下 執而殺之 大破其軍 아골타가 말을 채찍질하여 돌진하였는데 흐르는 화살이 해리의 머리에 명중하여 말에서 떨어지자 잡아서 죽였다. 그 군대를 대파하였다.
20656#23320 SIBLINGS CHILDREN 23320
 
1103 金史(1344)
고려에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해서 曷懶甸의 관속인 사륵상은, 야랄보상은 등이 가고 石適歡도 盃魯를 보냈다. 고려는 야랄보 등은 잡아두고 盃魯는 돌려보냈다. 이때 5水의 백성들이 모두 왕고에 귀부하고 붙잡힌 團練使가 14명이었다.
20656#23397 SIBLINGS CHILDREN 23397
 
1103 金史(1344) 列傳73 006
1103년에 아소가 요나라에서 달기를 시켜 갈라전 사람들을 유혹하니 그들이 그를 체포하였다. 목종은 달기를 고려에 보내며 고려왕에게 “앞서 그대의 변방에서 난리를 일으켰던 자는 이런 무리들이다.”고 하였다.
20656#23327 SIBLINGS CHILDREN 23327
 
1103 ꜛ 金史(1344) 本紀01 024
목종 말년에 아소가 달기를 시켜 변방 백성들을 꾀어 선동하자 갈라전 사람들이 붙잡아서 보내었다.
20656#23323 SIBLINGS CHILDREN 23323
 
1103 ꜛ 金史(1344) 列傳05
阿疏在遼無所歸 後二年 使其徒達紀至生女直界上 曷懶甸人畏穆宗 執而送之 阿疏遂終于遼
20656#23325 SIBLINGS CHILDREN 23325
 
1103.02 金史(1344) 本紀01 023
1103년 2월에 영가가 돌아왔다. 요나라가 사신을 보내 숙해리를 격파한 공로에 따라 벼슬을 내렸다. 고려가 처음으로 와 우호관계를 통하였다.
20656#23318 SIBLINGS CHILDREN 23318
 
1103.02 ⁺ 金史(1344) 列傳73 006
소해리를 쳐부순 뒤에는 알노한으로 하여금 고려에 가서 승전을 통보하도록 하니, 고려에서도 사신을 보내와 승전을 축하하였다.
20656#23076 SIBLINGS CHILDREN 23076
 
1103.02 ⁺ 高麗史(1451)
盈歌가 蕭海里를 격파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알려주니 우리도 사신을 보내 그것을 축하하였다.
20656#23319 SIBLINGS CHILDREN 23319
 
1103.07.27 高麗史(1451)
영가가 그의 족제 사갈을 보내 답방하게 하니 왕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20656#40331 SIBLINGS CHILDREN COMMENT 40331
 
1103.07.27 ꜛ 金史(1344) 列傳73 006
얼마 안되어 또 사갈과 알노한 등으로 하여금 조빙하도록 하니 고려왕은 “사갈은 여직의 족제이니 대우하는 예가 융숭하여야 한다.”며 큰 은반 한개를 주어 사례하였다.
20656#23085 SIBLINGS CHILDREN 23085
 
1103.07.27 ⁺ 金史(1344) 列傳73 007 A
그 뒤 갈라전 등 여러 부족이 귀부하려고 하자 고려에서 듣고 이를 원하지 않았다. 고려에 가까워 불리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 중지시켰다. 사갈이 고려에 있으면서 갈라와 왕래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자세히 알았으므로 석적환을 보내어 갈라전 사람들을 귀부하도록 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20656#23075 SIBLINGS CHILDREN 23075
 
1103.07.27 ⁺ 金史(1344) 本紀01 024
穆宗使石適歡撫納曷懶甸 未行 목종이 석적환으로 하여금 갈라를 진무하게 하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20656#23084 SIBLINGS CHILDREN 23084
 
1103.10.29 金史(1344)
10월 29일에 목종이 죽었다. 동남으로 을리골, 갈라, 야라 그리고 토골론에 이르렀고 동북쪽으로 오국, 주외, 독답에 이르렀다. 금나라는 대개 여기에서 강성해졌다.
20656#22991 SIBLINGS CHILDREN 22991
 
1103.10.29 ⁺ ◾康宗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다.
20656#23139 SIBLINGS CHILDREN 23139
 
1103.10.29 ⁺ 金史(1344)
그러나 목종이 죽고 강종이 왕위를 이은 뒤 비로소 석적환을 파견하여 성현과 통문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을리골령으로 가서 군사를 더 모집하여 활녈수로 나아가 갈라전을 순행하여 배반한 7성을 거두도록 하였다.
20656#23089 SIBLINGS CHILDREN 23089
 
1103.10.29 ⁺ 金史(1344)
목종이 죽자 보내게 된 것이다.
20656#23331 SIBLINGS CHILDREN 23331
 
1103.11.20 高麗史節要(1452)
동여진 태사 盈歌가 古洒, 率夫, 阿老 등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영가가 죽기 전에 출발했을 것이다.
20656#23336 SIBLINGS CHILDREN 23336
 
1103.11.20 ⁺ 金史(1344)
고려에서 사람이 와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고 통고하니 갈라전에서 관속인 사혁상은, 야랄보상은 등을 보내자 석적환도 배노를 보냈다. 고려는 야랄보 등은 잡아두고 배노는 돌려보냈다. 이때 5수의 백성들이 모두 고려에 귀부하고 붙잡힌 단련사가 14명이었다.
20656#23088 SIBLINGS CHILDREN 23088
 
1103.11.20 ⁺ 金史(1344)
先是 高麗通好 既而頗有隙 高麗使來請議事 使者至高麗 拒而不納 五水之民附于高麗 執團練使十四人
20656#23328 SIBLINGS CHILDREN 23328
 
1103┆耶懶
20656#23316 SIBLINGS CHILDREN OPEN
 
1104.01.06 ⁻ 高麗史(1451)
여진이 定州關 밖에 주둔하니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까 의심하여 추장 許貞과 羅弗 등을 꾀어 잡아 廣州에 가두고 고문하였는데, 과연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20656#23395 SIBLINGS CHILDREN 23395
 
1104.01.06 ꜜ 高麗史(1451)
1104년에 궁한촌 사람들 중 태사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군사를 일으켜 응징하였습니다.
20656#23296 SIBLINGS CHILDREN 23296
 
1104.01.06 高麗史(1451)
東女眞男女一千七百五十三人來投 동여진의 남녀 1,753인이 내투하였다.
20656#40332 SIBLINGS CHILDREN COMMENT 40332
 
1104.01.06 高麗史(1451)
東女眞酋長烏雅束 與別部夫乃老有隙 遣公兄之助 發兵攻之 騎兵來屯定州關外 동여진의 추장 오아속이 별부의 부내로와 사이가 벌어지자 공형지조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이 정주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20656#23083 SIBLINGS CHILDREN 23083
 
1104.01.06 高麗史(1451)
▐ 曷懶河 사람들은 원래 요나라에 귀부하였었다. 그러나 인접한 왕고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완안부가 성장하자 그 영향권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금사에는 오아속이 石適歡을 파견하여 배반한 7城을 거두게 했는데 왕고가 단련사 14명을 억류하는 바람에 5水의 사람들이 왕고에 붙었다고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고려사에는 오아속이 公兄之助를 보내어 別部의 夫乃老를 토벌하게 했다고 되어 있고 동여진의 사신은 왕고에 와서 오아속을 거부하는 弓漢村을 토벌했다고 하였다.
20656#23359 SIBLINGS CHILDREN 23359
 
1104.01.08 高麗史(1454)
왕이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판동북면행영병마사로 임명하고 선정전에 나아가 부월을 내리고 가서 대비하게 하였다.
20656#23104 SIBLINGS CHILDREN 23104
 
1104.01.08 ꜛ 高麗史(1454)
마침 변장 이일숙 등이 아뢰기를, “여진은 허약하여 두려워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손에 넣지 않고 기회를 잃으면 후에 반드시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오아속이 또 別部의 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져 군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려고 국경 근처에 와서 주둔하자, 왕이 임간에게 명령하여 가서 대비하도록 하였다.
20656#23400 SIBLINGS CHILDREN 23400
 
1104.02.08 高麗史(1451)
林幹與女眞 戰于定州城外 敗績 임간이 여진과 정주성 밖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20656#40333 SIBLINGS CHILDREN COMMENT 40333
 
1104.02.08 ꜛ 高麗史(1451)
임간이 공을 세우는데 급급하여 병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갔는데 그들에게 공격을 받아 연달아 패배하여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 여진이 승세를 타고 定州 宣德關의 성에 난입하여 죽이고 노략질 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20656#23401 SIBLINGS CHILDREN 23401
 
1104.02.08 ꜛ 金史(1344) 列傳73 008
1104년에 고려가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크게 쳐부수어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고려 국경까지 추격하여 들어가 진지를 불살라 버리고 돌아왔다.
20656#23082 SIBLINGS CHILDREN 23082
 
1104.02.08 ꜛ 高麗史(1451)
고려에서는 우리들이 국경을 침범한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내어 정벌하였습니다.
20656#23100 SIBLINGS CHILDREN 23100
 
1104.02.08 ꜛ 高麗史(1451)
처음에 임간이 군대를 내보냈을 때 추장 延盖가 之訓 등에게 그들을 역습하게 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20656#23291 SIBLINGS CHILDREN 23291
 
1104.02.21 高麗史(1451)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임명하고 중광전에 나아가 그에게 부월을 하사하여 출정시켰다.
20656#23322 SIBLINGS CHILDREN 23322
 
1104.03.04 高麗史(1451)
윤관이 여진과 싸워 30여 명의 머리를 베었는데, 우리 군대의 사상자와 실종자도 과반이 넘었다.
20656#23078 SIBLINGS CHILDREN 23078
 
1104.03.04ꜛ 高麗史(1451)
이에 윤관을 임간 대신으로 東北面行營都統에 임명하고 부월을 주어 보냈다. 윤관이 적과 싸워 30여 급을 베었으나, 우리 군사도 싸우다 죽거나 다친 자가 절반이 넘어 군세가 부진하였다.
20656#23354 SIBLINGS CHILDREN 23354
 
1104.04 金史(1344)
4월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에서 방어하여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로 들어가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 고려사(1451)에서 3월 4일에 있었다고 하는 윤관의 패전을 말하는 듯하다. 당시 국경이 定州 인근에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闢登水는 함흥 서쪽을 흐르는 성천강인 듯하다.
20656#23374 SIBLINGS CHILDREN 23374
 
1104.04 ꜛ 金史(1344)
1104년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크게 깨뜨렸다.
20656#7911 SIBLINGS CHILDREN 7911
 
1104.06.13 高麗史(1451)
東北面兵馬都統이 아뢰기를 “여진이 스스로 성책을 허물고, 公兄之助 등 68인이 관문을 두들기며 화친하기를 애걸합니다.”라고 하였다. ▐ 東北面兵馬都統은 東北面行營都統인 윤관을 말하는 듯하다. 公兄之助는 금사(1344)의 石適歡에 대응된다.
20656#23079 SIBLINGS CHILDREN 23079
 
1104.06.13 ꜛ 高麗史(1451)
결국 언사를 낮추어 강화하여 맹약을 맺고 돌아왔다.
20656#23333 SIBLINGS CHILDREN 23333
 
1104.06.13 ꜛ 金史(1451)
이에 고려왕은 “국경의 분쟁을 충동질한 자는 모두 官屬 祥丹·傍都里·昔畢罕 무리들이었다.” 고 하며 단련사 14명과 6로의 사자로서 고려에 있던 자들을 모두 돌려보내는 동시에 사신을 보내와 강화하자고 요청하였다.
20656#23286 SIBLINGS CHILDREN 23286
 
1104.06.13 ꜛ 金史(1451) 本紀01
고려는 다시 화의를 요청하면서 전에 사로잡은 단련 14명을 모두 돌려보내었으므로 석적환이 변경의 백성을 어루만져서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20656#23077 SIBLINGS CHILDREN 23077
 
1104.06.13 ꜛ 高麗史(1451)
그러나 다시 수호를 허락하였습니다.
20656#23332 SIBLINGS CHILDREN 23332
 
1104.06.13+ 金史(1344)
마침내 사갈로 하여금 국경을 바르게 정하도록 하니 을리골수와 갈라전 활녜수에 이르러 2개월을 머물렀다. 사갈은 송사를 잘 판결하지 못하여 사건마다 지체시키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20656#23334 SIBLINGS CHILDREN 23334
 
1104.06.13+ ◾活涅水(活禰水)
석적환의 至乙離骨嶺益募兵趨活涅水와 사갈의 至乙離骨水曷懶甸活禰水를 보아 乙離骨水를 따라올라가 乙離骨嶺을 넘으면 曷懶甸의 活涅水(活禰水)인 듯하다.
20656#23287 SIBLINGS CHILDREN 23287
 
1104.08+ 金史(1344)
그래서 강종은 사갈을 소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다. 석적환은 삼존수에다 막부를 설치하고 과거에 고려와 몰래 왕래하여 난리를 조성한 사람은 즉시 죄에 따라 처벌하고 나머지는 불문에 부치니 강종은 그를 유능하게 여겼다.
20656#23282 SIBLINGS CHILDREN 23282
 
1106 金史(1344)
1106년에 고려가 흑환방석을 사신으로 보내와 직위 계승을 축하하자 강종은 배노로 하여금 보빙하도록 하고 예전의 약속을 들어 망명한 백성들을 요구하였다.
20656#23342 SIBLINGS CHILDREN 23342
 
1106 金史(1344)
1106년에 고려가 흑환방석을 보내어 세습을 축하하자 배노를 답방하게 하였다.
20656#23341 SIBLINGS CHILDREN 23341
 
1106.01.18 高麗史(1451)
동번의 公牙 등 10인이 내조하였다. 왕이 선정전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전례에 따라 하사하였다. 처음에 임간이 군대를 내보냈을 때 추장 延盖가 之訓 등에게 그들을 역습하게 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之訓이 公牙를 보내 내조하였다.
20656#23103 SIBLINGS CHILDREN 23103
 
1106.03.04 高麗史(1451)
요나라에서 우리 군사 종지 등 12인을 돌려보냈다. 1104년 전쟁에서 동번에 패배하여 요로 도망쳐 들어간 자들이었다.
20656#23080 SIBLINGS CHILDREN 23080
 
1106.03.05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가 아뢰기를 “東女眞의 之訓이 기병 2,000명을 이끌고 와서 관외에 진을 치고 성심을 다하여 복종하며 말하기를 ‘지난해의 전쟁은 새로 즉위한 왕이 알지 못하는 것이며 公牙가 내조하였을 때 그 뜻을 깨우치고 후한 상을 주어 돌려보냈으니 왕의 은혜가 지극히 두터운데 어찌 감히 잊고 배신하겠습니까?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진심으로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20656#23081 SIBLINGS CHILDREN 23081
 
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0656#23106 SIBLINGS CHILDREN 23106
 
1107 金史(1344)
高麗許之 曰 使使至境上受之 康宗以為信然 使完顏部阿聒 烏林答部勝昆往境上受之 康宗畋於馬紀嶺乙隻村以待之 阿聒 勝昆至境上 高麗遣人殺之 而出兵曷懶甸 築九城 고려가 허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에 이르러 인수하여 가라.”고 하니 강종은 이를 믿고 완안부 아괄·오림답부 승곤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 인수하도록 하고 마기령 을집촌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아괄·승곤 등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갈라전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20656#21327 SIBLINGS CHILDREN 21327
 
1107 金史(1344)
高麗約還諸亡在彼者 乃使阿聒 勝昆往受之 高麗背約 殺二使 築九城於曷懶甸 고려가 망명한 시람들의 송환을 약속하므로 아괄과 승곤으로 하여금 가서 인수하게 하였는데 고려가 약속을 어기고 두 사람을 죽인 뒤 갈라전에 9성을 쌓았다.
20656#23396 SIBLINGS CHILDREN 23396
 
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0656#23383 SIBLINGS CHILDREN 23383
 
1107 高麗史(1451)
❶ 윤관이 스스로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❷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❸ 좌군병마사 좌산기상시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❹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❺ 선병별감 이부원외랑 양유송, 원흥도부서사 정숭용, 진명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이 선병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20656#23385 SIBLINGS CHILDREN 23385
 
1107 高麗史(1451)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20656#23386 SIBLINGS CHILDREN 23386
 
1107.12.24 高麗史(1451)
東女眞의 裊乙乃 등 3,230인이 내부하였다.
20656#20759 SIBLINGS CHILDREN 20759
 
1107~1109 曷懶甸 분쟁
개마대산 동쪽의 여진을 정벌하고 공험진에서부터 함주, 영주, 복주, 웅주 그리고 길주까지 성을 쌓았다가 1년만에 물러났다. 여진은 이 지역에 수백년 동안 살아왔었고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살았다.
20656#19850 SIBLINGS CHILDREN 19850
 
1107~1109 曷懶甸 침공
20656#23055 SIBLINGS CHILDREN OPEN
 
1108 尹瓘
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여진은 본디 구고려의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이며 남쪽으로는 장주·정주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구고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20656#11056 SIBLINGS CHILDREN 11056
 
1108 尹瓘
1108 尹瓘
▐ 曷懶甸에 대한 묘사가 삼국지(289)에 나오는 東沃沮와 비슷하다. 沃沮가 女眞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윤관은 그들에 대해 동족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勾高麗가 통치했던 곳이니 勾高麗를 계승한 王氏高麗가 차지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다는 논리다. 왕조와 종족이 분리되어 있다.
20656#21250 SIBLINGS CHILDREN 21250
 
1108 高麗史(1451)
여진은 본디 勾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을 바치며 우리 조종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고구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잃었던 것인데 지금 임금께서 그 후에 얻은 것이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20656#23376 SIBLINGS CHILDREN 23376
 
1109 高麗史(1451)
이여림을 요나라에 보내 東界에 9성을 신축한 것을 알리고 반서대 1개를 보냈다.
20656#23391 SIBLINGS CHILDREN 23391
 
1109.06.27 高麗史(1451)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옛날 우리 태사인 영가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조상도 대국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오아속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 금시조가 신라에서 나온 것을 말하는 것이다.
20656#21330 SIBLINGS CHILDREN 21330
 
1109.06.27 高麗史(1451)
不謂去年 大擧而入 殺我耄倪 置九城 使流亡靡所止歸 생각지도 못하게 지난해에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우리의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9성을 설치하여 유랑민들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 이민족을 몰아내는 것이지 동족을 통합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20656#21324 SIBLINGS CHILDREN 21324
 
1111 高麗史(1451)✘
吉州는 1111년에 中城을 쌓았다.
20656#21406 SIBLINGS CHILDREN 21406
 
1111 高麗史(1451)✘
公嶮鎭은 1111년에 山城을 쌓았다.
20656#23232 SIBLINGS CHILDREN 23232
 
1111 世宗實錄地理志(1454)✘
築中城于州 築山城于公險鎭 중성을 길주에 쌓고 산성을 공험진에 쌓았다.
20656#23177 SIBLINGS CHILDREN 23177
 
1115~1234 曷懶路
1115~1234 曷懶路
20656#19852 SIBLINGS CHILDREN 19852
 
1122~1146 金史(1344)
高麗國王 王楷 其地鴨綠江以東 曷懶路以南 東南皆至于海 自遼時 歲時遣使修貢 事具遼史 고려국왕은 안해(인조 1122~1146)다. 그 땅은 압록강 동쪽 갈라로 남쪽인데, 그 동남쪽은 바다다. 요나라 때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교류하였는데, 요사에 나와 있다.
20656#29287 SIBLINGS CHILDREN 29287
 
1125 金史(1344)
黑水靺鞨居古肅慎地 有山曰白山 蓋長白山 金國之所起焉 女直雖舊屬高麗 不復相通者久矣 及金滅遼 高麗以事遼舊禮稱臣于金
20656#29288 SIBLINGS CHILDREN 29288
 
1178 高麗史(1451)
명종 8년에 이르러 沿海溟州道라 불렀다.
20656#22952 SIBLINGS CHILDREN 22952
 
1234~1368
1234~1368
20656#30795 SIBLINGS CHILDREN 30795
 
1258 太宗實錄(1431)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吉州를 海陽이라 칭하고, 端州를 禿魯兀이라 칭하고, 英州를 參散이라 칭하고, 雄州를 洪肯이라 칭하고, 咸州를 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20656#22979 SIBLINGS CHILDREN 22979
 
1258~1356 雙城摠管府
천산산맥 북쪽에 금의 함주가 있었다. 금을 멸망시킨 원은 왕고의 철령 북쪽에 있던 함주를 이와 혼동하여 인근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을 소속시켰다. 또 금의 함주에는 개원로를 설치하였는데 쌍성총관부를 이 개원로에 소속시켰다. 원을 몰아낸 명은 원의 개원로에 속했던 철령 이북을 왕고로부터 돌려받아 철령위를 설치하고 새로 설치된 요동도사에 소속시키려 하였다. 왕고는 이에 반발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했으나 정벌군 장수 이성계는 반란을 일으켰다.
20656#15439 SIBLINGS CHILDREN 15439
 
1263 高麗史(1451)
원종 4년에 江陵道라 불렀다.
20656#22955 SIBLINGS CHILDREN 22955
 
1330±
1330±
1258~1356에 원나라가 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鐵嶺 이북을 차지하였다
20656#23381 SIBLINGS CHILDREN 23381
 
1330± 析津志輯佚
木吉(百一十) 迭甫(百四十) 阿剌可失列(百四十) 瑞州(百二十) 青州(百一十) 洪寬(百二十) 合懶府(高麗後門其東海) ▐ 木吉은 사묘아리의 무용담에 나오는 木里門甸을 떠올리게 한다.
20656#23375 SIBLINGS CHILDREN 23375
 
1330± 析津志輯佚
木吉 (百一十) 迭甫 (百四十) 阿剌可失列 (百四十) 瑞州 (百二十) 青州 (百一十) 洪寬 (百二十) 合懶府(高麗後門其東海) ▐ 洪原을 洪寬이라 했다.
20656#23377 SIBLINGS CHILDREN 23377
 
1330± 析津志輯佚
▐ 木吉站은 이조때의 古站으로 추정된다. 徒門水에서 내려오면 이곳에서 地境峴(←火串嶺)을 사이에 두고 吉州²(←公險鎭)에 주둔한 왕고와 대치하게 된다.
20656#23393 SIBLINGS CHILDREN 23393
 
1342┆義陵
20656#23308 SIBLINGS CHILDREN 23308
 
1344 金史 列傳73
20656#29285 SIBLINGS CHILDREN OPEN
 
1344 金史 合懶路
合懶路 置總管府 합라로에 총관부를 두었다. 貞元元年 改總管為尹 仍兼兵馬都總管 년에 총관을 尹로 개칭하고 병마도총관을 겸했다. 承安三年 設兵馬副總管 년에 병마부총관을 설치했다. 舊貢海葱 大定二十七年罷之 년에 폐지했다. 有移鹿古水 이록고수가 있다. 西至上京一千八百里 東南至高麗界五百里 서쪽으로 상경까지 1800리고 동남쪽으로 고려의 경계까지 500리다. ▐ 咸州는 合懶에서 나온 듯하다.
20656#23358 SIBLINGS CHILDREN 23358
 
1344 金史 本紀01
20656#29286 SIBLINGS CHILDREN OPEN
 
1356 高麗史(1451)
공민왕 5년에 江陵朔方道라 불렀다. 7월에 추밀원부사 유인우를 보내어 쌍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때에 지도를 순찰하여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의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20656#22956 SIBLINGS CHILDREN 22956
 
1356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 咸州 이남 지역을 열거하고 咸州 이북이라 칭하고 있다. 鐵嶺 이북이라 해야 옳다.
20656#23245 SIBLINGS CHILDREN 23245
 
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20656#23181 SIBLINGS CHILDREN 23181
 
1388.02 王高 禑王 表
20656#17232 SIBLINGS CHILDREN OPEN
 
1390 高麗史(1451)
1390년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 雄州 가까이 吉州¹를 설치했을 가능성은 낮으므로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한 곳은 옛 吉州¹가 있던 곳이 아닐 듯하다.
20656#23257 SIBLINGS CHILDREN 23257
 
1390 ◾ @길주 @吉州
20656#23278 SIBLINGS CHILDREN 23278
 
1390.02.06 高麗史(1451)
밀직부사 王可仁을 遼陽으로 돌려보냈다. 왕가인은 海洋副千戶 王萬僧의 아들인데, 都司에서 공문을 보내어 보내달라고 하였으므로 돌려보냈다.
20656#23403 SIBLINGS CHILDREN 23403
 
1390~1393 世宗實錄地理志(1454) 吉州 ⑤ 曷懶河
▐ 金史에 나오는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1109년에 있었던 공험진 전투다. 공험진 전투는 지금의 吉州에서 벌어졌으므로 사묘아리 무용담에 나오는 曷懶水는 지금의 吉州를 지나는 浮瑞川이 된다. 1108년에 윤관이 점령지에 명칭을 붙일 때 合懶를 咸州라 한 것처럼 吉州라는 명칭도 曷懶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20656#23429 SIBLINGS CHILDREN 23429
 
1390~1393 世宗實錄地理志(1454) 吉州 ⑥
多信浦
20656#23266 SIBLINGS CHILDREN 23266
 
1390~1393 世宗實錄地理志(1454) 吉州 ⑧
@두리산 @豆里山 @개마대산
20656#23433 SIBLINGS CHILDREN 23433
 
1392 高麗史(1451)
速頻·失的覓·蒙骨·改陽·實憐·八隣·安頓·押蘭·喜剌兀·兀里因·古里罕·魯別·兀的改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공험진 경내여서 이미 초유를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도리에 어긋난다.
20656#23046 SIBLINGS CHILDREN 23046
 
1393 和寧
화령은 왕고의 공민왕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되찾아 화령부로 개칭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의 영흥만 일대로 이성계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화령은 우리나라의 국호가 될 뻔했다. 한편, 명나라에 쫓겨난 몽골의 도읍도 화령이었다.
20656#15447 SIBLINGS CHILDREN 15447
 
1395 太祖實錄(1413)
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
20656#23410 SIBLINGS CHILDREN 23410
 
1395 太祖實錄(1413)
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洪肯猛安 괄아아올난
20656#23408 SIBLINGS CHILDREN 23408
 
1395 太祖實錄(1413)
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
20656#23411 SIBLINGS CHILDREN 23411
 
1395 太祖實錄(1413)
禿魯兀猛安 협온불화
20656#23412 SIBLINGS CHILDREN 23412
 
1398 世宗實錄地理志(1454) 洪原縣
속현이 1이니 洪原이다. 예전에는 洪獻이라 일컬었는데, 遼陽志에는 紅坑이라 일컬었다. 1398년에 洪原縣으로 개칭하여 내속시켰다.
20656#23135 SIBLINGS CHILDREN 23135
 
1398 新增東國輿地勝覽(1530) 洪原
古稱洪肯 或稱洪獻 옛날에는 홍긍 또는 홍헌이라고 일컬었다.
20656#22958 SIBLINGS CHILDREN 22958
 
1404.04 太宗實錄(1431)
영춘추관사 하윤·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사고를 열고 전조의 예종실록에서 예종조 시중 윤관이 동여진을 치고 변경에다 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황제가 왕가인을 여진에 보내어 建州衛를 설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에 의거하여 대답하려고 함이었다.
20656#23178 SIBLINGS CHILDREN 23178
 
1404.04.04 太宗實錄(1431)
遼東천호 왕가인이 받들고 온 칙서에 "지금 參散·禿魯兀 등 11처의 溪關만호 寗馬哈, 參散천호 李亦里不花, 禿魯兀천호 佟參哈·佟阿蘆, 洪肯천호 王兀難, 哈蘭천호 朱蹯失馬, 大伸천호 高難, 都夫失里천호 金火失帖木, 海童천호 童貴洞, 阿沙천호 朱引忽, 斡合천호 劉薛列, 阿都歌천호 崔咬納·崔完者를 초유한다." 하였다. ▐ 溪關┆參散(英州)┆禿魯兀(端州)┆洪肯┆哈蘭(咸州)┆大伸┆都夫失里┆海童┆阿沙┆斡合┆阿都歌
20656#23251 SIBLINGS CHILDREN 23251
 
1404.05 李朝 太宗 奏
20656#21326 SIBLINGS CHILDREN OPEN
 
1413 世宗實錄地理志(1454) 定平
1413년에 定州를 定平으로 고쳤으니 평안도 定州牧과 이름이 같음을 피해서였다.
20656#23265 SIBLINGS CHILDREN 23265
 
1419.07.17 世宗實錄
對馬爲島 隷於慶尙道之雞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 대마도를 정벌할 때 태종이 대마도 우두머리에게 한 말이다.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정치적 억지 주장이다. 명나라가 여진에 건주위를 설치하려고 할 때 孔州 운운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0656#27268 SIBLINGS CHILDREN 27268
 
1433
1433
20656#21829 SIBLINGS CHILDREN 21829
 
1439 世宗實錄(1454)
臣父先臣恭靖王某備 洪武二十一年間 欽蒙太祖高皇帝聖旨 準請公險鎭迤北還屬遼東 公險鎭迤南至鐵嶺 仍屬本國事因 신의 아비 선신 공정왕 아무개가 1388년에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받으니, ‘公險鎭 이북은 도로 요동에 부속시키고, 공험진 이남 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라. ’는 사유를 허락하시매
20656#638 SIBLINGS CHILDREN 638
 
1451 高麗史
公嶮鎭은 孔州 혹은 匡州라고도 한다. 혹은 先春嶺 동남쪽이자 白頭山 동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혹은 蘇下江변에 있다고도 한다. ▐ 公嶮鎭에 관한 1404년 이후의 기술은 모두 1404년의 주문에 나오는 주장을 따른 것이다.
20656#4615 SIBLINGS CHILDREN 4615
 
1451 高麗史
1109년에 길주로부터 시작하여 9성의 전투 장비·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고 마침내 崇寧·通泰·眞陽의 세 진 및 영주·복주의 성을 철거하였다. 또 함주·웅주 및 宣化鎭의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줄 때에 의주 및 공험진·평융진이 없고 숭령진·진양진·선화진이 추가로 보이고 설치한 호의 수가 각기 같지 않다.
20656#23054 SIBLINGS CHILDREN 23054
 
1451 高麗史 和州
1356년에 군사를 보내어 수복하고 和州牧으로 하였다. 1369년에 和寧府로 승격시키고 토관을 두었다. 橫江이 있다.
20656#22961 SIBLINGS CHILDREN 22961
 
1451 高麗史 福州
福州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吳林金村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防禦使를 두었다. 1109년에 城을 철수하여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禿魯兀이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82년에 端州安撫使로 고쳤다. 요해처가 2곳인데, 伊板嶺(州 동북쪽에 있는데, 곧 磨天嶺이다)과 豆乙外嶺(州 남쪽에 있는데, 곧 磨雲嶺이다)이다.
20656#22986 SIBLINGS CHILDREN 22986
 
1451 高麗史 褭弗·史顯
20656#23285 SIBLINGS CHILDREN OPEN
 
1451 高麗史 오연총
20656#23326 SIBLINGS CHILDREN OPEN
 
1451 高麗史 윤관
20656#23013 SIBLINGS CHILDREN OPEN
 
1451 「三國誤記」 高麗史 (吉州→)公嶮鎭
後沒於元 稱海洋(一云三海陽) 恭愍王時 收復舊疆 恭讓王二年 置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在北 雄州在南) 有卵島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해양(삼해양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렀다가, 공민왕 때에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90년에 웅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州가 북쪽에 있고 웅주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난도가 있다. ▐ 公嶮鎭을 두었던 곳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했고 훗날 吉州가 되었다.
20656#29284 SIBLINGS CHILDREN 29284
 
1451 「三國誤記」 高麗史 吉州¹
吉州久爲女眞所據 號弓漢村 睿宗三年 置州 爲防禦使 (六年→)四年 築(中城→)重城 尋以地 還女眞 길주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궁한촌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09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 1109년에 길주가 포위당하자 許載가 重城을 쌓아 버틴 바 있다. 길주를 포함한 9성은 그 해에 돌려주었다.
20656#29283 SIBLINGS CHILDREN 29283
 
1454 世宗實錄地理志 宣德
속진이 1이니 宣德이다. 1055년에 새로 宣德城을 쌓고 진으로 삼았다.
20656#23234 SIBLINGS CHILDREN 23234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옛 孔州로서 혹은 匡州라고도 하는데 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었다.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 1398년에 德陵과 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을 수축하다가 匡州防禦之印이라 되어 있는 인신을 얻었다. 1409년에 목책을 所多老의 營基에 설치하고 부를 옮겼고 1410년에 야인의 난리로 인하여 鏡城郡에 합쳤다가 1417년에 鏡城의 豆籠耳峴 이북을 떼어서 다시 도호부로 삼고 富家站에 목책을 세우고 치소로 삼았다.
20656#23236 SIBLINGS CHILDREN 23236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20656#22970 SIBLINGS CHILDREN 22970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다. 巨陽城이 있는데 본래 고려 대장 윤관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英哥沙吾里站 북쪽으로 蘇下江 가에 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이다.
20656#23064 SIBLINGS CHILDREN 23064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1
慶源 古孔州 或稱匡州 경원은 옛 공주다. 광주라고도 한다. 本朝太祖戊寅 陞爲慶源都護府 修城堀地 得印一顆 匡州防禦之印 1398년에 경원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을 수리하려 땅을 팠더니 광주방어사라 새겨진 인장이 나왔다. 北距公險鎭七百里 東北距先春峴七百餘里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고 동북쪽으로 선춘현에 이르기 7백여 리다.
20656#23182 SIBLINGS CHILDREN 23182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2
▐ 고려사(1451)에는 公嶮鎭을 一云孔州 一云匡州라고 했는데, 이는 慶源과 혼동한 듯하다. 公嶮鎭이 慶源에서 북쪽으로 7백리 되는 곳에 있고 先春峴이 慶源에서 동북쪽으로 7백리 되는 곳에 있다면 公嶮鎭은 先春峴 서편에 있게 되는데, 이는 고려사에 公嶮鎭(一云 在先春嶺東南)과 어긋난다.
20656#23214 SIBLINGS CHILDREN 23214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3
東林城 東控豆滿江 太宗元年辛巳 修其城爲慶源府山城 阿吾知古城 在東林城南 孔州城在阿吾知城南豆滿江邊 동림성은 동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다. 1400년에 수축하여 경원부의 산성으로 삼았다. 아오지 고성이 동림성 남쪽에 있고 공주성이 아오지성 남쪽 두만강 가에 있다.
20656#23209 SIBLINGS CHILDREN 23209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4
東林城 → 北去五里 所多老 → 其北三十里 → 越江十里 → 其北九十里 → 其北三十里 → 其北六十里 → 其東北七十里 巨陽城 城本高麗大將尹瓘所築 → 西距六十里 先春峴 卽尹瓘立碑處 有高麗之境四字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강을 건너 10리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동북쪽으로 70리 윤관이 쌓은 거양성 → 서쪽으로 60리 윤관이 비를 세운 선춘현.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20656#23212 SIBLINGS CHILDREN 23212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5
東林城 → 北去五里 所多老 → 北去三十里 → 其北六十里 → 其北三里 豆滿江灘 → 北去九十里 → 其北六十里 → 其北一百里 英哥沙吾里 → 其北 蘇下江邊有公險鎭卽尹瓘所置鎭┆英哥沙吾里 → 西去六十里 白頭山
20656#23211 SIBLINGS CHILDREN 23211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6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3리 두만강탄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1백 리 영가 사오리 → 북쪽 소하강 가에 윤관이 설치한 공험진이 있다.┆영가 사오리 → 서쪽으로 60리 백두산 ▐ 고려사(1451)에 나오는 公嶮鎭(白頭山東北 一云 在蘇下江邊)과 일치한다.
20656#23210 SIBLINGS CHILDREN 23210
 
1454 世宗實錄地理志 洪原
속현이 1이니 洪原이다. 예전에는 洪獻이라 일컬었는데, 遼陽志에는 紅坑이라 일컬었다. 1398년에 洪原縣으로 개칭하여 내속시켰다.
20656#22982 SIBLINGS CHILDREN 22982
 
1736 盛京通志
原作僕散渾坦扶餘地名
20656#23062 SIBLINGS CHILDREN 23062
 
1736 盛京通志
原作乙離骨托卜正也
20656#22995 SIBLINGS CHILDREN 22995
 
1834 靑邱圖 吉州
20656#22966 SIBLINGS CHILDREN 22966
 
1834 靑邱圖 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
▐ 雄州가 나타나는 드문 지도다. 그러나 이 지도의 雄州는 吉州에 가깝다는 조건 외에 雄州가 가져야 할 다른 여러 조건들은 만족시키지 못한다.
20656#23133 SIBLINGS CHILDREN 23133
 
1884
1884
20656#23134 SIBLINGS CHILDREN 23134
 
1884 吉州
20656#23137 SIBLINGS CHILDREN 23137
 
1884 明川
20656#23138 SIBLINGS CHILDREN 23138
 
1884 길주
1884 길주
근대 이전에는 길주가 압록강 유역의 갑산에서 개마대산을 넘어오는 길과 단천에서 해안을 따라 올라오는 길 그리고 두만강 유역에서 명천을 거쳐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20656#23110 SIBLINGS CHILDREN 23110
 
1884 북청 단천
1884 북청 단천
근대 이전에는 압록강 유역의 갑산에서 개마대산을 넘어 동해안으로 오는 길은 북청으로 오는 길과 단천으로 오는 길이 있었다.
20656#23108 SIBLINGS CHILDREN 23108
 
1884 북청 단천
1884 북청 단천
근대 이전에는 압록강 유역의 갑산에서 개마대산을 넘어 동해안으로 오는 길은 북청으로 오는 길과 단천으로 오는 길이 있었다.
20656#22980 SIBLINGS CHILDREN 22980
 
1884 함흥
1884 함흥
함흥은 황초령을 넘어 압록강 유역으로 향하는 길과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안변을 향하는 길 및 역시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길주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20656#23112 SIBLINGS CHILDREN 23112
 
1950 흥남철수
1950 흥남철수
황초령 너머 장진호에서 미군은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황초령을 도로 넘어와 흥남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20656#21189 SIBLINGS CHILDREN 21189
 
@조가령 @趙哥嶺
20656#23262 SIBLINGS CHILDREN 23262
 
② 蒙羅骨嶺
▐ 을리골에서 개마대산을 넘어 갈라로 가는 고개는 여러 개 있지만, 완안부와 왕고가 처음 교류할 때부터 이용하였을 듯한 고개는 몽라골령이다. 그 아래에서 사갈과 석적환이 갈라를 경영한 거 같다.
20656#23350 SIBLINGS CHILDREN 23350
 
③ 압록강 유역
③ 압록강 유역
▐ 발해와 그 뒤를 이은 여진은 중국과 교류할 때 압록강을 이용하였다. 허천강은 압록강의 지류이니 완안부와 허천강 유역의 교류도 아주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20656#23347 SIBLINGS CHILDREN 23347
 
④ 蓋馬大山
④ 蓋馬大山
▐ 허천강 유역에서는 동해안을 따라 길게 분포하는 갈라 지역의 어디든, 개마대산을 넘어 불시에 공격할 수 있었다.
20656#23348 SIBLINGS CHILDREN 23348
 
北靑
20656#23237 SIBLINGS CHILDREN 23237
 
厚致嶺
20656#23270 SIBLINGS CHILDREN 23270
 
咸興
20656#23239 SIBLINGS CHILDREN 23239
 
夫租薉君 印章
平壤市 樂浪區域 貞栢洞
20656#41278 SIBLINGS CHILDREN COMMENT 41278
 
夫租長印
壤市 樂浪區域 貞栢洞 2號墳
20656#41553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53
 
宣德
20656#23233 SIBLINGS CHILDREN 23233
 
平戎
20656#21405 SIBLINGS CHILDREN OPEN
 
弓漢嶺
弓漢嶺
두리산 남쪽의 물은 단천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지만 두리산 북쪽의 물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허천강을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또 한 갈래는 북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가며 나머지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러 길주를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고대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났으므로 세 물길이 만나는 이곳이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동해안 지역이 교류하는 통로였다.
20656#23430 SIBLINGS CHILDREN 23430
 
慶源
20656#23235 SIBLINGS CHILDREN 23235
 
於乙買串
본래 백제의 천정구현(泉井口縣)이었는데, 뒤에 고구려가 취하였다가 신라의 영토가 된 뒤에 교하군(交河郡)으로 바뀌었다.
20656#26805 SIBLINGS CHILDREN 26805
 
曷懶甸
曷懶甸位於今天朝鮮咸鏡南道咸興市一帶。是滿族人祖先居住地之一。
20656#23069 SIBLINGS CHILDREN 23069
 
曷懶甸의 역사 (3)
曷懶甸의 역사 (3)
발해가 망하고 100여년이 지난 후 蓋馬大山 동쪽은 曷懶라는 이름으로 요나라에 귀부하였고 금나라 때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20656#23338 SIBLINGS CHILDREN 23338
 
沃沮→夫租→柵城→曷懶→吉州
沃沮→夫租→柵城→曷懶→吉州
▐ 길주는 -107년에 한나라가 현도군을 설치하고 치소를 두었던 옥저성으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이곳은 개마대산 동쪽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그래서 갈라로 명칭이 바뀐 후에는 曷懶라는 명칭이 두만강 유역에서 함흥까지 아우르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20656#23351 SIBLINGS CHILDREN 23351
 
通泰
20656#21396 SIBLINGS CHILDREN OPEN
 
香嶺
20656#23268 SIBLINGS CHILDREN 23268
 
高麗史(1451)
여진의 병사 수만 명이 와서 雄州를 포위하였다. 그 때 척준경이 성 안에 있었는데, 州守가 말하여 이르기를, “성을 지키는 것이 오래되어 군량이 떨어질 것 같은데 밖에서 도움이 오지 않으니, 공이 성을 나가서 군대를 거두고 돌아와 성 안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졸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 하였다. 척준경은 밤에 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와서 定州로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通泰鎭을 통과하고 也等浦에서 吉州까지 적을 만나 싸워 크게 패배시켰다.
20656#23279 SIBLINGS CHILDREN 23279
 
高麗史(1451)
권지승선 왕자지가 公嶮城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도독부로 오다가, 갑자기 오랑캐의 추장 史現의 병사를 만나 싸우다가 패하고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렸다. 척준경이 즉시 굳센 병졸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고 적을 물리쳤으며 갑옷 입은 말까지 잡아서 돌아왔다.
20656#23213 SIBLINGS CHILDREN 23213
 
高麗史(1451)
1108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정예병사 8,000명을 거느리고 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나갔다. 적이 갑자기 공격하니 군사가 모두 궤멸되고 10여명만 남았다. 적이 윤관 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고 오연총은 화살에 맞았다.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이끌고 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여 10여 명을 때려 죽였다. 최홍정과 이관진 등이 골짜기에서 병사를 이끌고 오니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윤관 등은 날이 저물자 돌아와 英州城으로 들어왔다.
20656#23290 SIBLINGS CHILDREN 23290
 
高麗史(1451) 윤관 열전
伊位의 경계 위로 산이 잇달아 연결되어 있는데, 동해안으로부터 우뚝 솟아 우리의 북쪽 변방에 이르기까지 매우 험하고 황량하여 사람이나 말이 넘어갈 수가 없었다. 틈새로 길이 하나 있고 속칭 甁項이라 하였는데, 출입하는 구멍이 하나뿐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공을 세우려는 사람이 때때로 의견을 올리기를, 그 길을 막아버리면 오랑캐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군사를 내어 그들을 평정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20656#23373 SIBLINGS CHILDREN 23373
 
고지도
1712~1750 左海圖 함경도1800~1808 地圖摠覽 함경도1895 地圖 함경도1898 朝鮮地圖 함경남도1898 朝鮮地圖 함경북도영흥만
 
길주
길주명천지구대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고 농경에 적합한 평지가 비교적 넓어 고대에 정치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20656#15029 SIBLINGS CHILDREN 15029
 
낙랑공주는 춘천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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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56#22170 SIBLINGS CHILDREN OPEN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
20656#5912 SIBLINGS CHILDREN 5912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개마대산을 위와 같이 설정해서 부조를 함흥에 비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어색한 점이 몇 가지 있다.
20656#21245 SIBLINGS CHILDREN 21245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不耐縣
245년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도읍을 점령하고 현도태수 왕기로 하여금 도주하는 동천왕을 쯫게 하였는데, 왕기는 옥저를 파괴하고 숙신까지 쫓다가 돌아갔다. 같은 해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군대를 일으켜 단단대령 동쪽의 예를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만약, 옥저와 예가 모두 영흥만에 있었다면 왕기는 옥저를 정벌하고 인접한 예는 먼 낙랑과 대방에서 군대를 보내 정벌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매우 어색해진다.
20656#5900 SIBLINGS CHILDREN 5900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東暆縣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 동이가 진번군의 치소 삽현보다 장안에서 1500리 가깝다고 되어 있다. 진번군은 낙랑군과 차현 사이의 지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곳의 치소보다 1500리 가까운 곳이 되려면 동이는 영흥만 지역에 있는 것이 적당하다. 그런데 현도군의 치소 옥저성이 영흥만 지역에 있었다면, 임둔군의 치소 동이와 함께 좁은 지역에 두 군의 치소가 있게 되어 매우 어색하다.
20656#21256 SIBLINGS CHILDREN 21256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蒼海郡
예는 원래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한 듯하다. 그런데 위만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예군 남려는 28만구를 들어 한나라에 투항하는데, 이때는 단단대령 북쪽을 돌아 압록강을 거쳐 요동으로 가는 경로였을 듯하다. 이때 창해군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되는데 20여년 후 설치된 임둔군 또한 예를 다스리는 군이었다. 단단대령 북쪽을 돌아가는 길은 황초령을 넘어가므로 예가 이 길을 이용했다는 것은 황초령 아래도 예라는 정황을 말해준다.
20656#21257 SIBLINGS CHILDREN 21257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영흥만
¦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영흥만
지형상 영흥만은 하나의 문화권으로 보이는데 별개의 종족인 예와 옥저에 의해 양분되어 점유되는 것이 가능한가?
20656#21258 SIBLINGS CHILDREN 2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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