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요흑사 > 종족 > 0926 여진이 된 부여·예·맥·옥저 > 西女眞
 
 0926 요사(1343)
高麗貊鐵驪來貢 고려, 맥 그리고 철려가 조공을 보내왔다. -- 발해가 망한 직후의 이야기다. 철려는 鐵利라고도 하는데 발해의 도읍이 있던 영고탑의 북쪽에 살던 말갈의 한 부족이다. 발해 15부 중 하나인 철리부였다가 발해가 망한 뒤 철리국을 세웠다. 여기에 나오는 貊은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일 가능성이 높다. 발해 15부 중 하나인 압록부였다가 발해가 망한 뒤 옛 이름인 貊을 자칭하거나 요나라에서 貊으로 칭해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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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1 송사(1345)
여진의 사신이 조공하러 오는 길이 정안국(定安國)을 거치게 되자, 여진의 사신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부쳐 올렸는데, “정안국왕 신(臣) 오현명(烏玄明)이 말씀드립니다. ... 그 표문의 끝에, “원흥 6년 10월 일에 정안국왕 신 현명은 성스러운 황제 앞에 표를 올립니다.”라고 제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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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4 고려사(1451)
女眞 형관어사 이겸의에게 명하여 압록강 가에 성을 쌓아 관문으로 삼게 하였는데 여진이 군사를 동원하여 그것을 막고 이겸의를 사로잡아 돌아가니 군대가 무너져 성을 쌓지 못하였으며 돌아온 자는 셋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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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85 고려사(1451)
女眞 남은 족속들이 도망쳐서 우리나라의 회창(懷昌)·위화(威化)·광화(光化)의 땅으로 들어오니 거란 군사가 쫓아와 사로잡아 가면서 우리 수졸에게 이르기를, ‘여진이 매번 우리 국경 시골을 쳐들어와 도적질하므로 이제 우리는 그 원수를 갚고 군사들을 정비해서 돌아간다.’라고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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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1 고려사(1451)
女眞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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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3 고려사절요(1452)
生女眞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의 안북부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에 의해서 점유되었는데 광종께서 그 곳을 취하여 가주·송성 등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 서희가 한 말이다. 거란의 동경은 지금의 요양인데 요하의 동쪽에 있다. 안북부는 청천강을 건너기 전에 있었고 가주와 송성은 청천강 건너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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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3 요사(1343)
女直國 왕치(성종)가 박랑유를 파견하여 표를 올려 죄를 자인하므로 조칙을 내려 여직국 압록강 동쪽 수백리 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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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3-05 고려사(1451)
西北界女眞 서북계의 여진에서 거란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략하려 계획한다고 알려 왔으나,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들이 우리를 속인 것으로 여기고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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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3-08 고려사(1451)
女眞 여진이 거란의 군대가 침략하였음을 다시 알려오자, 비로소 일의 위급함을 알고 각 도에 병마제정사를 나누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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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4 고려사(1451)
女眞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게 하고 장흥(長興)·귀화(歸化) 두 진과 곽주(郭州)·구주(龜州)에 성을 쌓게 하였다. -- 두 진과 두 성은 모두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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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3-05 고려사(1451)
女眞 여진이 거란군을 인도하여 압록강을 건너려 할 때에 대장군 김승위 등이 공격하여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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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7 고려사(1451)
西女眞 揩信 서여진의 개신이 거란 동경에 있는 숭성사의 승려 도준을 사로잡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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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7-07 고려사(1451)
女眞靺鞨 木史 여진말갈의 목사가 부락을 인솔하여 내조하였으므로 관작과 옷, 물품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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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 고려사(1451)
西女眞 未閼達 서여진의 미알달 등 7인이 와서 갑옷과 투구 및 말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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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01 고려사(1451)
東女眞 鋤栗弗 西女眞 阿主 동여진의 서율불과 서여진의 아주 등 40여 인이 와서 말과 갑옷 및 투구, 깃발, 초서피와 청서피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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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04 고려사(1451)
東女眞 仇陁囉 西女眞 渠逸 西女眞 木史 木開 동여진의 구타라, 서여진의 거일 등 20여 인이 와서 토종말과 무기를 바치자 의복과 허리띠, 화폐와 물품을 하사하였고, 서여진의 목사와 목개 등 2백 호가 내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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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8-10 고려사(1451)
女眞木史 귀주에 사는 여진의 목사 등 34인에게 비단과 명주, 베 5백 여 필을 하사하여 적을 사로잡은 공을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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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3-10 고려사(1451)
西女眞 大師 阿角八 東女眞 元甫 烏頭那 서여진의 대사 아각팔 등 14인과 동여진의 원보 오두나 등 63인이 내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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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1-08 고려사(1451)
西女眞 漫豆 黑水女眞 서여진의 만두 등 17인이 가족을 거느리고 내투하였으므로 예빈성에서 아뢰기를, “옛 제도에는 우리나라의 변방 사람으로 일찍이 번적에게 납치되었다가 고향을 생각하여 스스로 돌아온 자와, 송인으로 재능이 있는 자 이외에 흑수여진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두 등도 또한 옛 규정에 의하여 돌려보내소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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