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좌장군의 행보는 수나라 우문술의 행보와 비슷하다.
"既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우문술은 이미 잦은 승리를 거둔데다 여러 의견도 있어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하여 살수를 건너 평양성으로부터 30리 떨어진 곳에다가 산에 의지하여 군영을 세웠다."
•-0109 史記(-91)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를 따라 발해에 배를 띄우고,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준비하였다.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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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 0108 史記(-91)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도 또한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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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구당서(945)
總章元年 命勣為遼東道行軍總管 率兵二萬略地至鴨綠水 賊遣其弟來拒戰 勣縱兵擊敗之 追奔二百里 至於平壤城
이세적은 668년에 요동도행군총관이 되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압록수에 이르니 고려왕이 동생을 보내어 항거하였으나 병사를 풀어 격패시키고 2백리를 추격하여 평양성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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