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궁예는 북원에서 독립한 양길의 부하로 있다가 901년에 송악에서 高麗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지난날 新羅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高麗를 깨뜨렸다. 그런 까닭에 평양 옛 도읍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新羅 및 견훤百濟와 경쟁해야 하는 궁예의 입장에서는 髙麗계승만큼 좋은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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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0901
天復元秊辛酉 善宗自稱王
천복 원년 신유에 선종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사람들에게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런 까닭에 평양 옛 도읍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였으므로 이런 말을 한 듯하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 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다. 그 칼 자욱이 지금도 남아 있다.
1750#40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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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三國遺事
辛酉称髙䴡 신유년에 (궁예는) 고려를 칭하였다. ▐ 삼국사기(1145)는 견훤에 대해서 自稱後百濟王(후백제왕을 칭했다)고 하면서 궁예에 대해서는 自稱王(왕을 칭했다)고만 해 놓았다. 삼국유사(1281)에는 궁예가 称髙䴡(고려를 칭했다)고 되어 있어 삼국사기가 의도적으로 高麗란 명칭을 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高句麗라 되어 있는 명칭을 대부분 高麗로 표기하고 있다.
1750#14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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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궁예의 아버지는 신라 헌안왕이라고도 하고 경문왕이라고도 하는데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궁예의 어머니는 이름 모를 궁녀였는데 궁예는 단오 날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날 때부터 이가 나고 이상한 빛까지 나타났으므로 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라 명했다. 그러나 바닥에 던져진 그를 마침 밑에 있던 유모가 받아내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애꾸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유모에 의해 길러지다 ...
1750#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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