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險鎭(공험진)의 위치는 지금의 吉州(길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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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오늘은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습니다.
왕씨고려때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아홉 개의 성을 쌓았다가 바로 돌려준 사건이 있었는데요, 공험진은 그 아홉 개의 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때 정계비를 세운 곳이기도 해서 공험진은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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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당시 왕고와 여진의 경계는 영흥만에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윤관이 이끄는 17만 대군은 황초령에서 개마대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동편을 따라 올라가며 동쪽으로는 화곶령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궁한령까지 점령합니다. 그리고 화곶산 아래에 웅주를 설치하고 궁한촌에 길주를 설치하는 등 영주, 복주, 웅주 그리고 길주 이렇게 네 개의 주를 설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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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그러나 여진도 반격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동계에 가까운 웅주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즈음 왕고는 함주와 공험진에도 성을 쌓아 이전 네 개 주의 성과 함께 6성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공험진에 정계비를 세우게 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공험진은 웅주보다도 경계에 더 가까웠던 듯합니다.
왕고는 이어서 의주, 통태 그리고 평융에도 성을 쌓아 모두 9성을 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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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여진의 반격은 점점 심해졌는데, 길주성을 포위했을 때는 오연총이 구원하러 가다가 공험진에서 여진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험진이 길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죠.
오연총의 출발지로는 전방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웅주가 어울립니다.
이때의 패배가 타격이 컸는지 왕고는 9성을 모두 돌려주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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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여진에 돌려준 지역은 나중에 원나라의 영토가 되는데 원나라가 쫓겨나자 빈틈을 타서 왕고가 차지하게 됩니다.
왕고는 옛 웅주와 길주를 합쳐 웅길주 만호부를 설치하는데, 옛 치소가 있던 서지위에서 남쪽으로 40리 되는 부서평에 치소를 두었습니다.
길주 서쪽을 흐르는 강을 부서천이라 하였으니 치소를 두었다는 부서평과 연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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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옛 길주는 새 길주에서 북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하므로 지금의 풍계리가 어울립니다.
그리고 새 길주에서 서쪽으로 90리 되는 곳에 갑산과의 경계가 되는 대산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산의 북쪽을 돌아 넘어가는 고개가 옛 궁한령으로 어울리죠.
그리고 웅길주 만호부가 길주목으로 바뀌면서 사라졌던 웅주란 지명은 길주 남쪽에 설치된 웅평역에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정주가 정평으로 개칭되듯 웅주가 웅평으로 개칭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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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옛 길주와 웅주의 위치가 이러하다면, 오연총이 웅주에서 길주를 구원하러 가다가 여진의 습격을 받았다는 공험진은 지금의 길주가 어울립니다.
이곳은 웅평역과 풍계리 사이에 있고 명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아래에 있어 정계비도 세울만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험진이란 지명의 흔적이 사라진 것도 이렇게 공험진 자리에 길주를 설치했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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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왕고말에 원나라를 쫓아낸 명나라가 원나라가 차지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으려 하자 우왕은 철령에서 함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는 지역이 원래 왕고의 땅이었는데 원나라가 우겨서 빼앗은 것이라는 주장을 서신에 담아 명나라에 보냅니다.
그런데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서, 당시까지는 철령에서 함주 이남까지가 왕고의 땅이고 함주에서 공험진까지는 여진의 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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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이조초에는 명나라가 이 지역의 여진에게 손을 뻗치자 태종은 우왕이 주장했던 영토에 두만강의 공주까지 끼워넣어 이조의 영토라 주장합니다.
대마도를 정벌할 때 태종은 대마도가 원래 경상도 계림에 속했다며 정벌의 명분으로 삼은 적이 있는데요, 이때 공주를 끼워넣은 것도 영토 확장의 계산이 있어서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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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그런데 공주가 들어가는 바람에 경계였던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에서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에 이르면 공험진이 공주 북쪽 7백리에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게 되죠. 이 주장은 세종이 추진한 6진 개척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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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왼쪽 사진은 신라 마운령비가 발견될 당시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 지도는 길주 일대의 위성 사진입니다. 두 강이 만나는 왼쪽 아래가 길주고 명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마루는 십자로 표시하였습니다. 공험진 정계비가 남아 있다면 오른쪽 지역에 왼쪽과 같은 형태로 발견이 되겠지요.
그러나 땅을 돌러받은 여진이 가장 먼저 했을 일은 정계비를 때려부수는 일이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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