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ε δ − + ·
start x┆start - 0.1 seconds┆start + 0.1 seconds┆ε↔x┆δ↔ε┆end - 0.1 seconds┆end + 0.1 seconds┆end x ▐ 좌우의 ·은 각각 start와 end 설정을 취소하는 것이고 -와 +는 start와 end를 각각 0.1초씩 앞당기거나 뒤로 물리는 버튼이다. δ는 단어의 뜻일 경우에 설정하고 ε은 단어의 예문일 경우에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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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① 고려와 한국은 서로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② 고려의 대부분을 구성했던 맥, 예, 옥저 그리고 부여는 발해의 압록부, 남해부, 책성부 그리고 부여부가 되었다. 왕씨고려가 고려계승을 내세울 때 이미 고려계승을 내세운 그 발해가 수백년째 건재하고 있었다. ③ 고려의 일부였던 대방만 신라의 땅이 되었고 삼국사기가 고려의 땅으로 분류한 한강 하류는 원래 백제가 있던 곳이다. 왕씨고려는 그런 신라의 후속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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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60 70 80 90 100
volume in percen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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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ᐥ김대중협정은 해방 이후 최대 친일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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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❶ 생산에 기여한 만큼 물질을 분배해야 한다.
공산주의 공동분배는 게으른 자가 부지런한 자의 생산물을 훔쳐간다. 시장을 통해 분배가 이루어지면 이런 도둑질은 사라진다. 시장경제의 정의는 생산에 기여한 만큼 물질을 분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토지의 매매 차익은 생산에 대한 기여 없이 물질을 분배받는 것으로 시장경제의 정의를 훼손한다. 토지공개념은 이런 도둑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므로 당연히 공산주의에서 벌어지는 도둑질도 반대하고 그래서 반공(反共)이다. 또 공기업 민영화와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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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❷ 토지 불산소득을 얻는 사람은 토적이다.
불산소득(不産所得)은 생산에 기여하지 않고 물질을 분배받는 것으로 일종의 도둑질이다. 생산에 대한 기여는 노동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자본의 형태가 될 수도 있으며 땅의 형태가 될 수도 있다. 땅이 생산에 기여하는 정도는 임대료 정도이며 부동산 매매 차익은 생산에 대한 기여 없이 물질을 분배받는 불산소득이다. 토지를 통해 불산소득을 얻는 사람을 토적(土賊)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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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❸ 불로소득이 아니라 불산소득이 나쁘다.
불로소득(不勞所得)이란 표현은 노동을 하지 않고 물질을 분배받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표현은 정당하지 않은 소득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고 물질을 분배받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노동만이 유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공산주의적 발상이다. 시장경제에서는 노동 외에도 자본과 땅 등을 생산에 기여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정당하지 않은 소득에서 그러한 것들은 빼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불산소득(不産所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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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❹ 땅은 나라가 가지고 집은 사람이 가진다.
이것이 토지 불산소득을 없애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기존의 사유 재산권을 존중하면서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면 오랜 기간에 걸쳐 사유지를 사들여 국유지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방법을 써야 한다. 지금 토지공개념이라 불리는 법률은 사유지가 남아 있는 동안만 적용되는 과도기적인 것이다. 국유지에서는 개인이 국가에 임대료를 내고 주택, 공장, 농장 등을 구축하여 이용하거나 거래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하나로 묶여 있는 부동산에서 땅과 집을 분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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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❺ 토지공개념 때문에 위헌 판결을 받은 법률은 없다.
토지공개념이 적용된 법률의 일부가 중복과세, 형평성, 과도한 제한 등의 문제로 위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택지 소유에 상한을 둔다거나 개발 이익을 환수한다거나 토지 초과 이득에 세금을 물린다거나 하는 법률의 기본 취지는 위헌 판결을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위헌 판결을 받은 부분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법률은 계속 살아 있거나 이후의 위헌 소송에서 합헌 판결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토지공개념은 비슷한 개념이 이미 헌법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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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❻ 토지 사유재산권은 이전부터 침해받고 있었다.
토지용도지역은 사유지의 용도를 제한하는 것이고 개발제한구역은 사유지의 개발을 제한하는 것이며 토지거래허가제는 사유지의 거래를 제한하는 것이다. 모두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토지공개념과 맥락이 같다. 다만 토지공개념의 토지초과이득세와 개발이익환수는 토지의 사용이나 거래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 이익의 일부를 환수하는 것이다. 토지의 거래 이익이 불산소득(不産所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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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❼ Henry George의 주장은 한국에 맞지 않는다.
토지의 사유를 허용하되 임대 수익만 몰수하면 된다는데, 이것은 토지가 생산에 기여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토지는 임대료만큼 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임대 수익이 없다면 안쓰는 땅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생산에 활용되지 못하고 놀고 있는 아까운 땅이 많아질 것이다. 또 한국에서는 임대 수익이 아니라 매매 차익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19세기 미국 학자 Henry George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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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❾ 토지 불산소득에 대한 기대감과 소외감
은행에서 많은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것은 이자보다 매매 차익이 훨씬 클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고 또 집값이 오르면 집이 없는 사람은 손해를 보기 때문에 애써 집을 사려고 한다. 모두 토지 불산소득에 대한 기대감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토지 불산소득은 정당하지 못한 분배다. 이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그에 바탕하여 국유지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장기적인 국가 목표를 제시할 때, 토지 불산소득에 대한 기대감도 사라지고 시장경제의 정의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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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荒唐古記 序 1
荒唐古記(황당고기)는 신라말 도인 肝疸夫(간달부)가 저술한 한민족 비밀역사책이다. 황당고기가 씌어질 당시는 신라에서 왕씨고려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였는데, 신라를 멸하고 새 왕조를 세운 왕고는 자신들의 정통성에 해가 될까 우려하여 10만년 한민족 웅비의 역사를 말살하기로 하고 신라에 전해 내려오던 역사책들을 모두 불살라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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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荒唐古記 序 2
그러나 다행히 태워지기 직전에 있던 舊約秘話(구약비화), 半指遺錄(반지유록), 武俠通鑑(무협통감) 세 권의 책을 간달부가 필사해 두었다가 나중에 황당고기 한 권으로 엮어내면서 한민족사는 가까스로 사라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당고기를 가진 자는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므로 간달부는 젊은이들 중에 나은 놈들만 뽑아서 만들었다는 신라의 비밀지하조직 이놈이낫지(Illuminati) 요원들에게 책의 내용을 모두 외우게 한 후 스스로 불태워 없애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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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荒唐古記 序 3
그후 간달부는 금강산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폭포 아래에 있는 구룡 동굴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끝내 왕고가 보낸 자객 척준의 습격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간달부는 죽기 직전 이놈이낫지 요원 관술에게 유언을 남겨 황당고기를 절대 문자로 기록하지 말고 구전으로만 전할 것이며 1000년이 지난 후 麟討耐鬪(인토내투)에 올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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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편찬 시기는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로 추정된다.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한 후 딸에게 맡겼는데 선제(-73 ~ -48) 시대에 이르러 외손자 양운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본래는 太史公書였으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太史公記로도 불리게 되었으며 줄여서 史記라 하게 되었다. 本紀 12권, 表 10권, 書 8권, 世家 30권, 列傳 70권으로 구성된 紀傳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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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漢의 高祖 元年(-206)부터 新의 地皇 四年(23)까지 229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紀12편, 表8편, 志10편, 傳70편 그리고 共10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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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1145년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12권), 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三國史였으나 후대에 三國史記로 불리게 되었다. 같은 紀傳體 사서인 사마천의 太史公書가 太史公記를 거쳐 史記라 불리게 된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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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ᐥ전두환 회고록은 귀중한 역사자료ᐥ
최근 출간된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사이드웨이) 작가 정아은은 이 논픽션을 쓰면서 <전두환 회고록>과 <전두환 육성 증언>을 파고들었다. 책에 가장 많이 인용한 문헌이 이 두 책이다. 이렇게 요긴하게 인용되는 회고록을 출판금지시킨 것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겠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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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ᐥ중국분할공정은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견제ᐥ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중국이 지금은 스스로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내고 가해자가 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명분이 상당히 유치해서 주변국들은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짜증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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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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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卷一 荒國本紀 降臨 2
그리고 나서 桔鰻瓷霰(길만자로)산에 내려와 보리수나무 아래에 신시를 베풀었으니 이 때가 지금으로부터 10만년 전의 일이었다. 여와가 다스린지 9만년이 되자 顧離喇(고리나)와 蘿邇蘊(나이온)이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진화경으로 도모했으나 고리나만 성공하여 閼褒女(알포녀)가 되었으나 나이온은 실패하여 그만 顧囊離(고낭이)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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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卷二 荒國本紀 濁酒大戰 1
황국을 세운 10 탱구리는 2333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아들 紇率靂(흘률력)에게 물려주었고 흘률력은 1501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아들 隷乙猫(례을묘)에게 물려주었다. 례을묘가 황기 4999년(서기전 5001년)에 죽자 그의 아들 催藕(최우)가 4대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화하를 비롯한 6국은 원래 황국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皇帝櫶燼(황제헌신)에 이르러 역심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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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卷二 荒國本紀 濁酒大戰 2
이에 최우천황이 친히 100만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 탁주에 이르러 화하의 군대와 맞섰다. 臍桔骨桶(제길골통)이 묘책을 내어 광우병 공포를 퍼뜨리니 화하의 군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두 도망가 버렸다. 이후에도 최우천황은 황제헌신과 70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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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羅民族論
漢나라는 위만朝鮮 병합과 漢사군 설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箕子동래설을 부풀렸다. 이어서 반도의 중남부 지역마저 차지하려고 韓王 이야기를 날조해 내서 옛 眞番 지역을 韓國이라 부르고 辰國도 이 韓國에 넣어 辰韓이라 불렀다. 辰韓에서 나온 新羅는 옛 眞番 지역과 濊를 통합하였는데, 이때 우리 민족이 형성되었다. 新羅 왕조를 교체한 王氏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高麗를 韓國史에 끼워넣고 三國史記를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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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韓
왜는 512년에 다시 대전, 논산, 부여 그리고 청주를 돌려주었다. 따라서 東韓은 이들 지역의 북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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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의 변천
1897년 이조가 선포한 大韓帝國의 어원은 三韓이다. 1919년 임시정부는 이것을 이어 大韓民國이라 했고 1948년 반도 남부에 수립된 국가도 이 국호를 계승하였다. 대한민국은 간단히 韓國이라 부른다. 이후 한국과 반도 북부에 수립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정통성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韓은 한국에서 우리를 지칭하는 유일한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전에는 스스로를 朝鮮人이라 불렀는데 민족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남북은 각각 韓民族과 朝鮮民族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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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 신공황후조 이야기의 출처
①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건 및 인명과 일치한다. 그래서 신라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③는 삼국지 기록이다. ④와 ⑤는 백제 기록이다. ⑤는 삼국사기와 일치하나 ④는 대응하는 기록이 다른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왜가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며 한국을 장악한 정황은 광개토왕릉비(414) 및 송서(488)의 기록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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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南扶余是韩国。남부여는 한국이다.
百济王朝与高丽王朝一起来自扶余,国名和王姓也被称为扶余,但百济的居民是韩国人,百济是韩国。 백제 왕조는 고려 왕조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고 국호와 왕성도 부여라고 했으나 백제의 주민들은 한국인이고 백제는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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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45 ◾發朝鮮
일주서에 나오던 發人과 良夷가 나오지 않고 發朝鮮이 등장했다. 發朝鮮의 發은 發人일 것이니 朝鮮은 良夷일 가능성이 있다. 穢와 貉을 묶어 穢貉이라 한 것처럼 發과 朝鮮을 묶어 發朝鮮이나 했다는 것이다.
http://qindex.info/i.php?x=31245
 001
조선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91년에 편찬된 사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동쪽에 요동과 조선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 일대에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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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
오늘은 고려계승에 대해 고찰해 보겠습니다. 고려는 맥인이 세운 나라인데 조선의 북쪽에 있었습니다. 조선은 한나라에 멸망당하며 낙랑으로 불리게 되는데 그 낙랑의 남쪽을 갈라 대방을 만들었고 그 대방의 남쪽에 한국이 있었습니다. 고려와 한국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백년의 시차를 두고 각자 발생하였고 그 이전에도 하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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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
고려와 한국에서 나온 신라가 성장하여 국경을 맞대고 있을 때도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한 흔적이 없습니다. 고려는 신라를 동이라 했고 신라는 고려를 예맥이라 불렀죠.
http://qindex.info/i.php?x=31463
 0011
오늘은 낙랑공주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낙랑공주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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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2
고려의 왕자 호동이 옥저에 놀러갔다가 낙랑왕 최리를 만났는데 최리가 호동을 보고 북국 신왕의 아들이라며 자기 나라로 데려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후에 호동은 고려로 돌아갔는데,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어 무기고에 있는 북과 나팔을 파괴하게 합니다. 이 북과 나팔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신기한 힘이 있었죠. 그리고 고려왕에게 낙랑을 치게 합니다.
http://qindex.info/i.php?x=31668
 002
연나라는 국력이 강성해지자 동호를 쳐서 1천여리 물러나게 한 뒤 요동까지 장성을 쌓아 요동군을 설치합니다. 이는 요동반도의 등뼈에 해당하는 천산 산맥까지 영토를 넓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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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
당시 왕고와 여진의 경계는 영흥만에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윤관이 이끄는 17만 대군은 황초령에서 개마대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동편을 따라 올라가며 동쪽으로는 화곶령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궁한령까지 점령합니다. 그리고 화곶산 아래에 웅주를 설치하고 궁한촌에 길주를 설치하는 등 영주, 복주, 웅주 그리고 길주 이렇게 네 개의 주를 설치합니다.
http://qindex.info/i.php?x=31568
 002
5주갑은 60년이 다섯번 반복된 햇수 즉, 300년을 말하고 5주갑인상은 사건들을 5주갑 전의 일로 잘못 기록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라에서 국사를 편찬했다는 기록은 545년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 600여년 전인 기원전 57년의 일은 그 이후 한동안의 사건들과 함께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건국되고 그 뒤를 이은 사건들이 쭉 기록되어 있죠.
http://qindex.info/i.php?x=31576
 002
중국에는 이 당시의 기록이 많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삼국사기 초기 기록 300여년간이 중국의 기록과 모순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8년에 망했다고 되어 있는데 중국 진서에는 290년까지 조공을 왔다고 되어 있죠.
http://qindex.info/i.php?x=31588
 002
삼국사기 초기 300여년간의 기록을 5주갑 뒤로 물리면 그제서야 중국의 기록과 어울립니다. 따라서 이 기록들은 후대의 사건을 5주갑 앞당겨 놓았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삼국사기 5주갑인상입니다.
http://qindex.info/i.php?x=31595
 002
고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나팔이 망가진 것을 알게 된 최리는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게 됩니다. 삼국사기에는 낙랑이 여럿 등장합니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이 그 하나고 백제 북쪽의 말갈과 함께 백제를 자주 침공해 오던 백제 동쪽의 낙랑이 또 그 하나이며 신라 북쪽에서 신라를 여러 차례 침공해 오던 낙랑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낙랑공주의 낙랑이 있죠.
http://qindex.info/i.php?x=31684
 003
그러나 여진도 반격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동계에 가까운 웅주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즈음 왕고는 함주와 공험진에도 성을 쌓아 이전 네 개 주의 성과 함께 6성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공험진에 정계비를 세우게 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공험진은 웅주보다도 경계에 더 가까웠던 듯합니다. 왕고는 이어서 의주, 통태 그리고 평융에도 성을 쌓아 모두 9성을 구성합니다.
http://qindex.info/i.php?x=31552
 003
이후 연나라는 다시 요동을 지나 조선과 진번을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게 되죠. 연나라는 진나라에 병합되는데, 연나라를 병합한 진나라는 이곳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킵니다. 그러나 진나라를 이은 한나라는 이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며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까지 국경을 물립니다. 패수는 지금의 청천강이죠. 이때 연나라의 위만이 패수를 건너 이곳으로 도망와 위만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http://qindex.info/i.php?x=31572
 003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낙랑은 -15년부터 -1년까지 7회 등장합니다. 이후 사라졌다가 304년에 2회 등장하고는 다시 사라집니다. 앞의 기록을 5주갑 뒤로 물리면 286년에서 300년 사이가 되어 뒤의 기록과 잘 어울립니다. 춘천의 옛 지명인 우두산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 낙랑은 춘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죠. 이 낙랑을 낙랑군과 구별하기 위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표현대로 동유낙랑으로 지칭하겠습니다.
http://qindex.info/i.php?x=31649
 0031
중국 사서에서 마한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245년 전후의 일을 기록한 삼국지에서입니다. 진서에는 290년까지 조공을 왔다고 되어있죠. 삼국사기의 마한 기록들을 5주갑 뒤로 물리면 281년에서 316년 사이의 기록이 되어 이러한 중국 사서들과 잘 어울립니다.
http://qindex.info/i.php?x=31574
 0031
동유낙랑은 철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북유말갈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한 것으로 보아 낙랑군의 부용국이었던 거 같습니다.
http://qindex.info/i.php?x=31653
 0033
역시 백제와 신라의 기록을 5주갑 뒤로 옮기면 서진의 멸망을 전후해서 반도의 삼한이 백제와 신라 중심으로 재편되는 이야기가 되어 자연스러워집니다. 반도의 변화는 항상 중국의 변화에 연동되어 있었죠.
http://qindex.info/i.php?x=31589
 004
그러나 한나라는 국력이 강성해지자 월남을 침공하여 아홉 개의 군을 설치하고 몇 년 뒤에는 다시 조선을 침공하여 낙랑군 등 네 개의 군을 설치합니다. 이후 조선은 낙랑으로 많이 불려지게 되죠.
http://qindex.info/i.php?x=31540
 004
여진의 반격은 점점 심해졌는데, 길주성을 포위했을 때는 오연총이 구원하러 가다가 공험진에서 여진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험진이 길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죠. 오연총의 출발지로는 전방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웅주가 어울립니다. 이때의 패배가 타격이 컸는지 왕고는 9성을 모두 돌려주게 되죠.
http://qindex.info/i.php?x=31556
 004
왕고가 편찬한 삼국사기에 발해가 발해말갈로 표기된 이유도 고려계승이라는 명분에서 왕고가 발해에 가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http://qindex.info/i.php?x=31623
 004
한편, 4년, 14년 그리고 36년에 신라를 침공했다가 37년에 고려에 망해 5천명이 신라로 투항한 낙랑은 5주갑인하로 304년, 314년 그리고 336년에 신라를 침공했다가 337년에 고려에 망해 5천명이 신라로 투항한 낙랑이 되는데, 연대와 위치가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동유낙랑으로 어울립니다. 북유말갈을 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하게 했듯 동해안의 소국을 동원하여 신라를 침공하게 한 듯합니다.
http://qindex.info/i.php?x=31658
 004
한나라가 예 지역에 임둔군을 설치했다가 이내 폐지하고 15개 현 중 7개 현만 낙랑군에 소속시킨 바 있는데, 나머지 8현이 여전히 낙랑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춘천을 구심점으로 삼았던 듯합니다.
http://qindex.info/i.php?x=31654
 0042
단군설화는 평양에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조건에 맞는 나라로는 위만조선과 위만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조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이 세웠다'는 조건을 추가하면 범위가 위만조선으로 좁혀집니다.
http://qindex.info/i.php?x=31598
 0043
이를 뒷받침하는 흔적이 몇 개 있습니다. 단군은 왕검이라고도 했는데, 왕검은 위만이 도읍을 했고 위만조선 이후에는 쓰이지 않게 된 지명 왕험과 비슷합니다. 이를 놓고 왕험에서 왕검이 나왔다는 설명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을 수 없죠. 또 삼국사기에는 왕검에 대해 설명하며 王之都王險 즉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기에서 위만에 대해 설명하며 王之都王險이라 한 부분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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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3
위만의 건국과 단군설화는 이야기 구조도 비슷합니다. 위만은 무리 천여명을 모아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다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고, 환웅은 무리 삼천명을 거느리고 인간세상에 내려와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열었는데 그의 아들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나라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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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
여진에 돌려준 지역은 나중에 원나라의 영토가 되는데 원나라가 쫓겨나자 빈틈을 타서 왕고가 차지하게 됩니다. 왕고는 옛 웅주와 길주를 합쳐 웅길주 만호부를 설치하는데, 옛 치소가 있던 서지위에서 남쪽으로 40리 되는 부서평에 치소를 두었습니다. 길주 서쪽을 흐르는 강을 부서천이라 하였으니 치소를 두었다는 부서평과 연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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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
훗날 왕고는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원래 백제와 예의 땅이었던 한주, 삭주 그리고 명주를 옛 고려 지역이라 기술해 놓았습니다. 이는 그때의 궁색했던 기억을 되살려 자신이 비록 신라에서 나왔지만 그 신라 안에 고려가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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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
요약하면, 춘천에 낙랑군의 부용국이 있었는데 서진이 망하고 고려가 낙랑군을 병합하자 딸을 고려에 시집보내며 생존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병합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로써 서진의 멸망을 전후해서 이루어진 반도의 재편은 동유낙랑이 고려에 병합됨으로써 중국의 잔재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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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 在子(良夷) → 점박이 물범
주나라 때의 일을 기록한 일주서에는 양이가 나타납니다. 후대의 주석이지만 양이는 낙랑 오랑캐라고 되어 있죠. 낙랑은 조선의 다른 이름이니 양이 또한 조선이 됩니다.┆이 양이는 재자를 바쳤다고 나옵니다. 재자는 몸이 화폐 모양이고 머리는 사람을 닮았으며 배에 기름이 있어 불에 구워 짜낸다고 합니다. 이러한 재자에 대한 묘사는 요동만과 백령도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점박이 물범에 어울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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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2
위만조선에 건국설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왕씨고려때 나타난 단군설화와 연결짓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천여 년의 시차가 있고 그 기간에 이야기가 전승된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단군설화는 평양이 우리 민족의 영역이 된 이후, 즉 평양 성주 검용이 궁예고려에 투항한 이후 위만조선에 관한 역사 기록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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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
옛 길주는 새 길주에서 북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하므로 지금의 풍계리가 어울립니다. 그리고 새 길주에서 서쪽으로 90리 되는 곳에 갑산과의 경계가 되는 대산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산의 북쪽을 돌아 넘어가는 고개가 옛 궁한령으로 어울리죠. 그리고 웅길주 만호부가 길주목으로 바뀌면서 사라졌던 웅주란 지명은 길주 남쪽에 설치된 웅평역에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정주가 정평으로 개칭되듯 웅주가 웅평으로 개칭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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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 鮮(貉) → 점박이 물범 → 在子(良夷)
왼쪽의 글자는 물고기를 뜻하는 어의 옛 한자고 오른쪽의 두 글자는 활어의 뜻으로 많이 쓰이는 선의 옛 한자인데 왼쪽의 글자가 먼저 쓰였고 오른쪽의 글자는 나중에 쓰인 것입니다. 설문해자에는 맥국에서 이 선이란 어류가 났다고 되어 있죠. 그런데 한자 어와 한자 선의 옛 형태를 비교해 보면 한자 선은 물개나 물범의 모양을 딴 글자라는 의심이 듭니다. 어와 달리 머리와 몸통이 구분되어 있고 머리에는 뿔처럼 보이는 수염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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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 鮮(貉) → 점박이 물범 → 在子(良夷)
맥국은 조선과 인접해 있었으므로 맥국에서 선이 났다면 조선에서도 선이 났을 수 있습니다. 점박이 물범같은 경우, 요동만과 백령도 사이를 오가며 사는데 맥국은 그 사이에 있었죠. 앞서 양이는 조선의 옛 이름인데 이곳에서 재자를 바쳤다고 했으므로 조선에서도 선이 났다면 선이 곧 재자일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러면 조선에서 선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조선의 어원으로 '선을 조공하는 종족'이라는 뜻을 생각해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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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2
공산주의의 붕괴로 통치 이념을 상실하자 황급히 단군릉을 찾아 피라미드를 쌓던 김일성을 보며, 없는 정통성을 날조하기 위해 평양의 황무지를 헤매고 다녔을 왕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씨 왕조가 그토록 소원하던 정통성 확보는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고려를 한국사에 끼워넣음으로써 마침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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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5 三國史記(1145)
▐ 閼智→勢漢→阿道→首留→郁甫→仇道→末仇→奈勿→巴胡→習寶→智證→立宗→眞興→眞智→龍樹→武烈→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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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71
점박이 물범의 가죽은 아주 귀한 특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나라 때의 일을 기록한 관자에는 각지의 귀한 특산물인 황금, 진주, 옥 등과 함께 발과 조선에서 나는 문피 즉, 무늬가 있는 가죽을 언급하고 있죠. 표범의 가죽이라고도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표범은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 볼 때 바다 표범입니다. 그리고 조선과 묶여 언급되는 발은 정황상 맥국입니다. 그러면 발과 조선에서 났다는 문피는 설문해자에서 맥국에서 났다는 선의 가죽일 가능성이 생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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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8 皮服(鳥夷) → 文皮(發·朝鮮)
사기에는 하나라 때 조이가 피복 즉, 가죽옷을 싣고 갈석을 돌아 바다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부분은 황하로 들어간다고 해야 할 것을 잘못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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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8 皮服(鳥夷) → 文皮(發·朝鮮)
그렇다면 조이의 조공 경로는 황해에 배를 띄워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 요동 반도를 돌고 갈석산을 지나 황하를 거슬러 올라갔을 조선의 교역로로 어울립니다. 싣고 왔다는 피복 즉, 가죽옷도 조선에사 났다는 문피 즉, 무늬가 있는 가죽을 연상시키므로 조이 또한 조선의 옛 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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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9
그런데 공주가 들어가는 바람에 경계였던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에서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에 이르면 공험진이 공주 북쪽 7백리에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게 되죠. 이 주장은 세종이 추진한 6진 개척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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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設位
參祀者가 손을 씻은 다음 진설 순서에 의해 祭需를 陳設하고 참사자가 배열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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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就神位
지방이나 사진을 교의에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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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三國志(289) 요약 2
朝鮮을 멸하고 樂浪郡, 真藩郡 그리고 臨屯郡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에는 沃沮에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얼마 후 真藩과 臨屯을 폐하여 樂浪과 玄菟에 합쳤다. 玄菟는 高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沃沮는 樂浪에 소속시켰다. 다시 樂浪의 단단대령 동쪽을 갈라 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가 濊人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樂浪郡의 남쪽은 분할하여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馬韓, 辰韓 그리고 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馬韓은 서쪽이고 辰韓은 馬韓의 동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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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05 ◾馬韓
잠부론(163)에서 遷居海中이라 한 것이 삼국지(289)에서 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으로 바뀌더니 다시 후한서(445)에서 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로 바뀌었다. 바다 가운데가 韓地로 바뀌고 다시 馬韓으로 바뀐 것이다. 삼국지(289)에서 將其左右宮人이라 한 것은 후한서(445)에서 將其餘衆數千人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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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⑦ ◾辰王✘
진왕에 대해 삼국지와 후한서는 이런 차이가 있다. 治月支國 → 都目支國┆其十二國屬辰王 → 盡王三韓之地┆辰韓이 韓의 일부분이니 辰王도 韓의 일부분을 다스리는 게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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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65± 三國志(魏略) -0109⁻
▐ 準이 衛滿에게 쫓겨나 韓으로 갔다면 右渠와 틀어진 歷谿卿도 韓으로 갔을 법한데 辰國으로 간 것을 보면, 右渠의 시기에도 韓이 없었을 것이라는 데 심증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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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9
오늘은 6가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가야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에서 변진 24국의 하나인 구야한국으로 처음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면 대마국이라고 되어 있는데, 훗날 김해에 남가야가 있었던 것과 연결지어 보면 구야는 김해에 있었던 거 같습니다. 일본서기에 와서는 가야가 가라와 남가라 이렇게 둘로 나타납니다. 남가라는 삼국지에 나오는 구야인 듯한데, 이 시기에 가라라는 나라가 또 있어서 남가라로 구별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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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焚香 降神
신위께서 降臨하시어 음식을 드시도록 청하는 뜻으로 祭主를 위시하여 모든 참사자가 신위 앞에 선 다음 제주는 꿇어앉아 분향하고 잔이 차지않게 따른 술잔을 右執事(대개 제주의 子姪이 함)로부터 받아서 茅沙에 세 번으로 나누어 부은 후에 빈 잔은 우집사에게 건네주고 일어나서 재배한다.┆姪 조카 질┆茅 띠 모┆沙 모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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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降神 ❶ ↆ
제주가 향을 피운다. 집사가 잔에 술을 부어주면 제주가 退酒 그릇에 3번 나누어 붓고 두 번 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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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7~0534 선비 왕조
● 서진이 망하면서 남가라에 선진 문물을 제공하는 역할은 연나라가 맡게 된 것이 아닐까? 남가라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유목 민족의 문화는 이때 연나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연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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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69
369년에 왜는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치고 탁순, 남가라, 녹국, 가라, 다라, 비자발 그리고 안라를 복속시켜 왜가 갖습니다. 각각 오늘날의 마산, 김해, 대구, 고령, 합천, 창녕 그리고 함안입니다. 그리고 서쪽으로 돌아 침미다례, 반고 그리고 포미지를 복속시켜 백제가 갖습니다. 각각 제주도, 반남 그리고 나주입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삼한이 백제와 신라 중심으로 재편될 때 그 두 나라에 통합되지 않고 남은 지역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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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0404
그러나 아신왕도 396년에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아 항복하고 58성 700촌을 바칩니다. 마한이 54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백제 영토 대부분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자 이듬해에 왜가 와서 그 항복을 엎어버리고 침미다례, 동한, 현남, 지침 그리고 곡나를 빼앗아갑니다. 이는 영산강 유역을 제외한 백제 영토 대부분을 망라하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404년에는 고려의 대방을 침공하여 보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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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參神
참신은 강신을 마친 후에 제주 이하 일동이 일제히 신위를 향하여 재배한다. 神主를 모시고 올리는 제사인 경우에는 참신을 먼저 하고 紙榜인 경우에는 강신을 먼저 한다.┆榜 붙일 방┆參 참여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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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參神 ❷ ↆↆ
일동이 모두 두 번 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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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廣開土王陵碑
▐ 이 설화는 고려 왕조의 공식적인 이야기다. 고려의 高씨가 顓頊高陽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이 설화와 모순되고 또 고려 왕조에 의해 언급된 적도 없으므로, 북연의 고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 餘씨가 夫餘에서 따온 것처럼 고려 高씨도 高麗라는 나라 이름에서 따왔다고 보아야 한다.
http://qindex.info/i.php?x=15235
 0475┆0512
475년에 백제의 한성이 고려 장수왕에게 함락되었을 때는 왜가 구마나리를 주어 백제의 재기를 돕습니다. 이즈음 침미다례도 백제에게 돌려준 듯합니다. 구마나리는 지금의 공주고 침미다례는 지금의 제주도죠. 512년에는 백제가 왜에 상치리, 하치리, 사타 그리고 모루를 달라고 하자 이들 지역도 돌려줍니다. 각각 지금의 대전, 논산, 부여 그리고 청주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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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初獻
제주는 강신 때와 같이 꿇어앉아 분향한 후 좌집사로 부터 받은 잔에 우집사가 술을 가득히 부어주면 오른손으로 잔을 들어 모사에 조금씩 세번에 기울여 부은 뒤에 양손으로 받들어 집사에게 준다. 집사는 이를 받들어 먼저 考位 앞에 올린다. 다음으로 비위앞에 올리는 잔은 모사에 기울이지 아니하고 그대로 받아서 올리고 저를 고른 후에 재배한다.
http://qindex.info/i.php?x=28388
 05. 初獻 ❸ ↆ
집사가 잔을 제주에게 주고 술을 부어준다. 제주는 잔을 향불 위에 세 번 돌리고 집사에게 준다. 집사가 술을 올리고, 젓가락을 음식 위에 놓는다. 제주가 두 번 절한다.
http://qindex.info/i.php?x=28402
 0542
다시 백제는 542년에 하한 또는 남한이라 불리는 지역도 차지합니다. 이곳은 지금의 영산강 유역입니다.
http://qindex.info/i.php?x=30475
 0552.05 ◾
백제 성왕이 왜왕에게 한 『高麗與新羅 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고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를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는 말은 일본서기에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리자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고 기록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新羅取東北鄙置新州 신라가 동북 변경을 가져 신주를 설치했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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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5 北齊書(636)
▐ 백제의 餘씨 왕성은 근초고왕이 고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듬해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고, 고려의 高씨 왕성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내쫓은 지 7년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며, 신라의 金씨 왕성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임나를 병합한 지 3년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났다. 패권을 장악했을 때 왕성이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http://qindex.info/i.php?x=7386
 0565 北齊書(636)
▐ 백제 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 高씨는 高麗에서 따왔는데 신라 金씨는 新羅와 상관없는 이름이라 특이하다. 진짜 金日磾의 후손이라 그럴 수도 있고 국명 대신 도읍 金城에서 따왔을 가능성도 있다. 가라 金씨도 백제나 고려처럼 金官國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으나, 신라에 병합된 이후 신라가 金씨 왕성을 도입할 때 같이 편입되었을 수도 있다.
http://qindex.info/i.php?x=14901
 0568 ❷ 金氏┆建号┆朕┆太祖
建号는 551년에 開國 연호를 만든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朕이라는 호칭과 함께 제국을 자처한 것이다. 太祖도 이즈음에 추존된 듯한데, 金氏 왕성도 이즈음에 나타난다.
http://qindex.info/i.php?x=15520
 06. 讀祝
축문 읽는 것을 독축이라 하며 초헌 후에 일동이 꿇어앉으면 제주옆에 앉은 축관이 천천히 크게 축문을 읽는다. 다 읽고나면 일동은 기립하여 재배한다. 독축은 초헌에 한한다.
http://qindex.info/i.php?x=28389
 06. 讀祝 ❹ ↆↆ
모두 잠시 꿇어 않았다가 다같이 두 번 절한다.
http://qindex.info/i.php?x=28403
 0663.09.24 日本書紀(720)
▐ 삼한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왕조를 무너뜨리고 도성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지방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은 주류성에 모여 왕조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663년에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한국에 백제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다.
http://qindex.info/i.php?x=4418
 0684 장회태자묘(章怀太子墓) 백라관과 새깃쓰개
새깃쓰개를 한 사신의 국적에 대해서는 신라라는 견해와 고려라는 견해가 병존한다. 차남이었던 이현이 태자로 책봉된 해는 형이 죽은 675년인데 이때는 이미 고려가 망한 후이기 때문에 고려의 사신일 수는 없다는 것이 전자의 논거다. 신라는 649년에 관복을 당나라 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사신이 조우관을 썼을 수 없고 고려가 망한 후에도 고려왕은 요동도독조선군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고려의 옷차림을 한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후자의 논거다. 
http://qindex.info/i.php?x=2282
 0695 ❹ 少皥金天┆太祖漢王
少昊 昊又作皞 皓 顥 又稱青陽氏 金天氏 窮桑氏 雲陽氏 或稱朱宣 신라와 가라 金씨가 少昊金天의 후예를 자처한 것은 북연의 고운이 顓頊高陽의 후예를 자처한 것처럼 성씨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 가미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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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 亞獻
둘째번 잔을 올리는 것을 아헌이라 하며 주부[주부는 재배가 아닌 四拜]가 올리는 것이 관례이나 제주 다음의 근친자가 초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올릴 수도 있다.
http://qindex.info/i.php?x=28390
 0706 ◾金日磾
문무왕릉비(681), 흑치상지묘지명(699)이 그리고 흑치준묘지명(706)에서 보는 것처럼 秺侯와 그 후손이 七葉에 걸쳐 西漢에 참여한 것은 흔히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문무왕릉비의 다른 점은 秺侯를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했다는 점이다. 신라김씨가 閼智 대신 秺侯를 뿌리로 내세운 것은 당시 秺侯에 대한 국제적 평가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http://qindex.info/i.php?x=15233
 08. 終獻
아헌자 다음가는 근치자가 끝잔으로 올리는 것을 종헌이라고 하는데, 종헌자는 잔을 받아서 초헌 때와 같이 모사에 세번 기울였다가 올린다.
http://qindex.info/i.php?x=28391
 0801 通典
① 晉太康地志同'秦築長城所起自碣石' ② 遂城(古遂武也秦築長城之所起) ③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 태강지리지에는 애초에 秦築長城所起自碣石이라고만 되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던 것에 사기색은이 ②의 영향으로 생겨나 당시에 퍼져 있던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이라는 이야기를 반영하여 大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樂浪遂城縣有를 떼어내고 碣石山長城所起라고만 했어야 했다.
http://qindex.info/i.php?x=20865
 0864 ❺ 少昊氏金天┆日磾·秺亭侯
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은 문무왕릉비(681)에 나오는 (秺)侯祭天之胤傳七葉과 내용이 일치하므로 신라 金씨 왕조가 金日磾의 후손을 자처한 것은 더욱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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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 啓飯揷匙
메 그릇 뚜껑을 열어 놓고 수저를 꽂는 것으로서 이때 수저 바닥이 동쪽(신위를 향해 선 제주의 오른편)으로 가게하여 꽂는다. ┆啓 열 계┆飯 밥 반┆揷 꽂을 삽┆匙 숟가락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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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侑食 ❺ ↆ
집사가 밥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은 뒤 젓가락을 내려 놓는다. 제주가 두 번 절한다.
http://qindex.info/i.php?x=28405
 10. 添酌
초헌자가 신위 앞에 꿇어앉아 우집사가 새로운 술잔에 술을 조금 따라주면 받아서 좌집사에게 준다. 좌집사는 이것을 받아, 종헌자가 종헌때 모사에 기울였기 때문에 차지 않은 잔에 세 번으로 나누어 첨작하고 재배한다. 첨작을 侑食이라고도 한다.┆添 더할 첨┆酌 술 부을 작┆侑 권할 유
http://qindex.info/i.php?x=28393
 11. 闔門
합문이란 참사자 일동이 강림하신 신위께서 진설한 제주 음식을 흠향 하시도록 한다는 뜻으로 방에서 나온 후 문을 닫는 것을 말하는데 대청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에는 뜰 아래로 내려와 조용히 기다린다.┆闔 문짝 합
http://qindex.info/i.php?x=28394
 11. 闔門 ❻
일동 무릎을 꿇고 잠시 기다린다.
http://qindex.info/i.php?x=28406
 1109.05.16◾公嶮鎭 ②
그러나 追及于曷懶水高麗人爭走冰上(갈라수까지 추격하니 왕고인들이 다투어 얼음 위로 달아났다)는 5월에 벌어졌던 공험진 전투와 어울리지 않고 하루에 수만명이 참여하는 전투를 세 번이나 벌였다는 점도 비현실적이다.
http://qindex.info/i.php?x=23370
 11451
가라, 안라, 다라 등은 백제식 표기인데 백제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왜와 고려도 이 표기를 썼습니다. 신라는 가라를 가야 또는 가량, 안라를 안량, 다라를 대야 또는 대량이라 하였습니다. 일본서기에서 가라와 남가라로 구별되던 가야는 삼국사기에서 대가야와 남가야로 구별되었죠. 그런데 남가야는 주로 금관국 또는 금관가야로 불려졌습니다.
http://qindex.info/i.php?x=31717
 11452
그런데 삼국사기는 가야를 낙동강 유역의 작은 나라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오인하였습니다. 그래서 특정 국가를 지칭할 때 가야 앞에 고유명사나 접두사를 붙이려 했고 고유명사만 있을 때는 그 끝에 가야를 붙이려 했습니다. 고령의 가야에 대를 붙여 대가야라 한 것은 전자의 예고 함안의 안량에 가야를 붙여 아나가라라 한 것은 후자의 예입니다. 고령의 가야를 대가야라 한 것은 대야의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http://qindex.info/i.php?x=31733
 11453
한편, 가야는 강주 고령군에 있었는데 같은 발음의 고령군이 상주에도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는 상주의 고령군에 대해 원래 고령가야였는데 신라가 병합하여 고동람군 또는 고릉현이라 하였다가 통일 후 고령군으로 고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대에 생겨난 지명이 그 오래 전의 소국 이름이라는 부분이 어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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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4
신라가 감문국을 병합해서 감문군으로 했다가 통일 후 개령군으로 바꾼 사례를 볼 때, 상주의 고령군도 고동람국 또는 고릉국을 병합해서 고동람군 또는 고릉현으로 했다가 통일 후 고령군으로 바꿨다고 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옛 기록에 강주 고령군은 옛 가야라고 되어 있었는데 삼국사기는 이를 상주 고령군이 옛 가야라는 것으로 오독하고 여기에 가야가 보통 명사라는 착각이 더해져 상주의 고령가야가 생겨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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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5
이렇게 해서 삼국사기에는 대가야, 남가야, 아나가야 그리고 고령가야 이렇게 네 개의 가야가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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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開門
개문이란 문을 여는 것을 말하는데 제주는 문을 열기전에 우선 기침을 세 번하고 난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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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11
가야가 낙동강 유역의 소국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라는 인식은 이후 계속 가야가 늘어나게 만듭니다. 본조사략에 와서는 성산가야가 추가되었고 삼국유사에 와서는 소가야가 추가되었죠. 소가야는 왕씨고려 초기에 편찬된 가락국기를 보고 가야가 여섯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삼국유사의 저자가 기존의 다섯 가야에 대가야에 대응하는 소가야를 만들어 추가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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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12
이렇게 해서,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 구야로 처음 등장한 가야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가라와 남가라 2개로 분화되었고,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아나가야와 고령가야가 추가되어 4개가 되었으며,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성산가야와 소가야까지 추가되어 6가야가 되었습니다. 가야가 이렇게 늘어난 것은 우연히 고령과 김해에 있던 나라 이름이 가야로 같았던 것을 보통명사로 오인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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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13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오류를 인정해 버리면 그 빈 자리를 일본서기의 임나로 채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것이 싫어서 뭉개고 있는 사이에 가야는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장수가야, 운봉가야, 전북가야 등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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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獻茶
숭늉을 갱과 바꾸어 올린 다음 수저로 메를 조금씩 세 번 떠서 말아놓고 著를 고르고 난 후에 참사자 일동은 잠시 揖한 자세로 있다가 제주의 기침 소리에 따라서 고개를 든다. ┆著 나타날 저┆揖 읍┆獻 바칠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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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獻茶 ❼
국을 물리고 숭늉을 올린다. 밥을 숭늉에 세 번 말아 놓고 수저를 숭늉 그릇에 놓는다. 잠시 무릎을 꿇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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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撤匙復飯
철시복반이란 숭늉 그릇에 놓인 수저를 거둔 다음 메 그릇에 뚜껑을 닫는 것을 말한다.┆메 제사 때 神位 앞에 놓는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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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辭神
참사자 일동은 재배한 다음 신주는 본래의 사당으로 모시고 지방과 축문은 불사른다. 즉 신위와 작별을 뜻하는 것이다.┆辭 말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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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辭神 ❽ ↆↆ
숭늉의 수저를 거두고 밥그릇을 닫는다. 일동 두 번 절한다. 지방을 불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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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撤床
모든 제수를 물리는 것을 철상이라 하며 제수는 뒤쪽에서부터 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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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飮福
음복이란 조상께서 주시는 복된 음식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제사가 끝나는 대로 참사자와 가족이 모여서 함께 먹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 나누어주기도 하고 또 이웃 어른들을 모셔다가 대접하기도 한다.
http://qindex.info/i.php?x=28384
 1980.05.26 Korea Situation Report Number 8
미국무부가 제네바 주재 미국 대표부에 보낸 한국 상황 보고 제8호 - 반란 세력이 인민재판소를 설치하고 처형까지 했다는 이전의 보고는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신중하게 취급해야 한다.
http://qindex.info/i.php?x=9374
 1980.05.26 Korea Situation Report Number 8
미국무부가 제네바 주재 미국 대표부에 보낸 한국 상황 보고 제8호 - 반란 세력이 인민재판소를 설치하고 처형까지 했다는 이전의 보고는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신중하게 취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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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05.26 Korean Situation Report, May 26
주한 미대사관에서 미국무부에 보낸 5월 26일자 한국 상황 보고 - 자치조직들이 만들어졌고, 강경 세력이 이전에 반납했던 무기를 되찾아 다시 무장했으며,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 인민재판과 처형 부분은 전날의 전문 내용을 반복하면서 '이러한 보고들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참고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주의가 덧붙여져 있다.
http://qindex.info/i.php?x=9329
 1980.05.26 Korean Situation Report, May 26
주한 미대사관에서 미국무부에 보낸 5월 26일자 한국 상황 보고 - 자치조직들이 만들어졌고, 강경 세력이 이전에 반납했던 무기를 되찾아 다시 무장했으며,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인민재판과 처형 부분은 전날의 전문 내용을 반복하면서 '이러한 보고들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참고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주의가 덧붙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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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05 제5공화국 전사
▐ 1980년 5월 21일에 주한 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와 그 2년 뒤에 제5공화국에서 펴낸 전사의 내용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광주□□는 전라도의 피해의식과 전라도 정치인 김대중의 구속 그리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의 유포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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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 독도 밀약 핑계
독도 밀약에는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는데, 전두환은 헬기장을 만들었고 김영삼은 접안 시설을 만들어 이를 지키지 않았다. 김대중만 지켰다면 그의 다른 친일 행위들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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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5 원래 평균값에 가까운 분포가 많다
한국 남자들 중에서 두 명씩 뽑아 키 차이를 구해보면 키 차이가 작을수록 분포는 많아진다. 예를 들면, 키 차이가 1cm 이내인 경우는 키 차이가 1cm에서 2cm사이인 경우보다 많다. ● 2020년 총선은 문재인 민주당이 잘했다기보다 종미기독(從米基督) 세력이 미운 짓을 한 결과다. 당연히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개표조작 논란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며 이것이 흐려졌다. 그 결과 종미기독 세력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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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 둑만의 문제인가?
원칙적으로 물이 넘쳐도 둑은 터지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섬진강과 낙동강 모두 둑에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섬진강의 경우 둑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물이 넘칠 정도로 수위가 높고 낙동강은 수위가 둑 높이에 비해 많이 낮아 둑이 터지지 않았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둑의 붕괴라는 공통점을 빼면 한 쪽은 범람 위기가 있었고 한 쪽은 없었다는 차이점이 드러난다.
http://qindex.info/i.php?x=10279
 2020.08¦ 보의 문제인가?
○ 낙동강 둑이 터진 것은 합천보의 물이 빨리 빠지지 못해 수위가 올라가 일어났으므로 보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 둑을 만들 때에는 그 높이까지 물이 차도 터지지 않으라고 만든 것이다. 운전하다 타이어가 터져 사고가 나면 타이어 때문이지 자동차를 운전한 때문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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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4ꜛ
그리고 조금씩 돌려주게 되는데요, 405년에는 이천과 진천, 477년에는 공주, 512년에는 대전, 논산, 부여 그리고 청주 그리고 542년에는 마지막으로 영산강 유역을 돌려 줍니다. 낙동강 유역의 경우, 527년경에 대구, 마산 그리고 김해가 신라에 항복하고 562년에는 고령이 신라에 병합되어 임나가 모두 소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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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2 ↑
「仁祖實錄」 汗張黃屋而坐 甲冑而帶弓劍者 爲方陣而擁立左右 청태종이 황옥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하였다. 上行三拜九叩頭禮 인조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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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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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gislation
In this _____ a provision known as the "Wolf Amendment" was passed to forbid NASA and U.S. companies from sharing technological advancements with the Chinese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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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limpsest
Later populations emerged and spread and covered up the evidence of some of the earlier mixture. Human populations in their genetic history are we archeologists would call a palimps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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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加羅는 고령과 김해에만 있었다.
삼국사기가 이 두 나라를 보고 加耶를 낙동강 서쪽의 소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오인하면서 安耶에도 加耶를 붙여 阿那加耶라 했고 古寧에도 加耶를 붙여 古寧加耶라 했다. 삼국유사(1281)에 와서는 小伽耶와 星山(碧珎)伽耶가 추가되었다. 古寧과 星山 그리고 碧珎이란 지명이 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니 그 지명이 붙은 加耶도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小伽耶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6가야에 맞추기 위해 大加耶에 대응하는 이름을 붙여 끼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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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氏
潛夫論에 姓이 韓인 韓西가 衛滿에게 쫓겨났다고 되어 있으므로 韓으로 도망가서 韓王을 칭한 것이 아니라 韓王을 칭하면서 그곳이 韓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해야 어울린다. 또 아들과 친척 중에 조선에 남은 사람들은 쫓겨난 왕이 韓王을 칭하는 것을 보고 韓氏 성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韓氏 성을 쓰고 있었다고 해야 앞뒤가 맞다. 쫓겨난 왕이 세운 나라의 이름을 따 쫓아낸 나라에 남은 아들과 친척이 성씨로 삼는다는 것은 어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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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❶ 김일성의 항일 운동은 부정할 수 없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항일 운동이나 토지 개혁과 같이 그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왔다. 전두환에 대해서도 동일한 현상이 존재한다. 그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잘 활용한 것은 아무도 반박을 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윤석열처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반발을 불러온다. 지금 한국 사회는 ᐥ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게ᐥ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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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❷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한서(82)는 騶를 高句驪侯라 명시하였고 광개토왕릉비(414)도 鄒牟를 王이라 명시하였다. 여기서 侯는 王을 낮춰부르는 말이다. 한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보아도 騶가 고구려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병력이 이탈한 것에 대해 신나라 내에서 騶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가장 먼저 나왔다거나 騶에게 죄를 물으면 부여와 예맥이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거나 하는 부분이다. 騶가 일개 장수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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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❷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한다.
홍길동은 재상과 계집종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조시대에는 부모의 어느 한 쪽이 종이면 그 자식도 종이 되었다. 그래서 홍길동은 친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홍길동이 이를 하소연하자 친부는 속으로 가엽게 여기면서도 사회가 다 그러니 거스르지 말라고 도리어 꾸짖는다. 지금 한국 사회도 그렇다. 전두환의 용인술이 좋았다고 다들 속으로 인정하지만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LA riot은 LA폭동이지만 riot in Kwangju는 광주폭동이라 부르지 못한다.
http://qindex.info/i.php?x=17356
 ❸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광개토왕릉비(414)에는 鄒牟王이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 있고 제왕운기(1287)에는 東明이 승천하여 구름수레를 타고 돌아오지 않아 유리가 와서 왕위를 잇고 추모왕이 남긴 옥채찍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모두 시신없이 鄒牟王을 장사지낸 듯한 이야기다. 한서(82)에 나오는 騶도 엄우가 유인하여 죽인 뒤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으므로 고구려에서는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것이다.
http://qindex.info/i.php?x=12917
 ❸ 용기있는 자에게만 사람이 따른다.
근대 이전에는 병력의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그들은 전투의 경험도 없었고 싸울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이끄는 장수의 역할이 중요했다. 장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농민들 앞에 서서 가장 먼저 적과 부딪히는 일이었다. 가장 위험한 이 일을 두려워하여 장수가 농민들 뒤로 숨으면 그 군대는 바로 무너진다. 정치 지도자와 지지자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윤석열처럼 돌 맞을 각오를 하고 옳은 말을 하는 자에게만 따르는 사람이 생긴다.
http://qindex.info/i.php?x=17347
 ❸ 위만의 건국과 단군설화는 이야기 구조가 비슷하다.
聚黨千餘人 → 率徒三千 위만은 무리 천여명을 모아 망명했고 환웅은 무리 삼천명을 거느리고 내려왔다.┆渡 → 降 위만은 패수를 건넜고 환웅은 인간세상에 내려왔다.┆秦故空地 上下鄣 → 太伯山頂 神壇樹下 위만은 일단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고 환웅은 일단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열었다.┆王之都王險 → 王之都王險 위만과 왕검 모두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
http://qindex.info/i.php?x=31424
 ❹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삼국사기(1145)가 한서(82), 삼국지(289) 그리고 후한서(445)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왕망에 의해 살해된 인물만 고구려후 騶에서 고구려 장수 延丕로 바꾸어놓았다. 延丕 이야기는 다른 기록으로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당연히 삼국사기의 기록을 왜곡된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http://qindex.info/i.php?x=12921
 卷三 沙伐世家 晩得女王傳
晩得女王 曰,今用等國力 而必對以刀 爲其時 備驪蝸秘訣。 以使沕璃 建據彿壇 開發壘窟離禦也。 晩得女王(만득여왕)이 가로되, "지금은 等國(등나라)의 힘을 이용하지만 언젠가 등나라와 칼을 맞댈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를 대비하여 驪蝸(여와)로부터 전해 내려온 비결을 준비하도록 하라." 이에 沕璃(물리)로 하여금 據彿壇(거불단)을 짓고 壘窟離娥(누굴리아, nuclear)를 개발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399
 卷三 沙伐世家 儼親王傳
以等國之人海溢戰 國危,乃儼親王命 用討飜彈。 討飜彈之威力至大 方數百里 無生者也。 乃惻隱無腦退軍也。 等國(등나라)의 인해일전으로 나라가 위태해지자 마침내 儼親王(엄친왕)은 討飜彈(토번탄)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토번탄의 힘은 매우 대단하여 사방 수 백 리에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마침내 惻隱無腦(측은무뇌)는 군대를 물리었다.
http://qindex.info/i.php?x=1386
 太守
472 帶方太守(張茂) ➔ 490² 廣陽太守→帶方太守(高達)┆朝鮮太守→廣陵太守(楊茂)┆清河太守(會邁) ➔ 495² 樂浪太守(慕遺)┆城陽太守(王茂)┆朝鮮太守(張塞) ▐ 중국의 지방관이다. 백제가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지 않거나 당시에는 사라져 없어진 지역이다. 받은 사람의 이름에서 백제의 왕성이나 토착 성씨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중국계 관료에게 주어진 듯하다.
http://qindex.info/i.php?x=22664
 姓·名
餘禮┆張茂┆姐瑾┆餘古┆餘歷┆餘固┆高達┆楊茂┆會邁┆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慕遺┆王茂┆張塞┆陳明 ▐ 餘씨는 백제의 왕성이고 沙씨는 부여의 호족이며 解禮는 웅진도독부 지심주의 현으로 편제되었던 지역이다.
http://qindex.info/i.php?x=25095
 姓·名 - 茂
465~471년에 茂는 유송에 사신으로 갔었고┆472년에 龍驤將軍 帶方太守 司馬 張茂는 북위에 개로왕의 사신으로 갔으며┆490²년에 建威將軍 朝鮮太守 兼 司馬 臣 楊茂 → 廣陵太守는 남제에 동성왕의 사신으로 갔고┆495²년에 城陽太守 兼 司馬 臣 王茂는 남제에 동성왕의 사신으로 갔다. ▐ 모두 동일인으로 보이는데 司馬와 茂만 같을 뿐, 장군과 태수 그리고 성씨가 모두 다르게 나타나고 있어, 사신으로 파견될 때마다 만들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
http://qindex.info/i.php?x=30431
 王·侯
472 弗斯侯(餘禮) ➔ 490¹ 面中王→都漢王(姐瑾)┆八中侯→阿錯王(餘古)┆邁盧王(餘歷)┆弗斯侯(餘固) ➔ 495¹ 邁羅王(沙法名)┆辟中王(贊首流)┆弗中侯(解禮昆)┆面中侯(木干那) ▐ 성씨로 보아 백제의 왕족이나 토착 세력에게 주어진 듯하다. 邁盧 또는 邁羅는 지금의 부여고 辟中은 지금의 김제다. 동성왕은 토착 세력인 王·侯와 중국계 관료인 太守를 번갈아 사신으로 보냈다.
http://qindex.info/i.php?x=22661
 王·侯 - 弗
472 弗斯侯(餘禮)┆490¹ 弗斯侯(餘固)┆495¹ 弗中侯(解禮昆)
http://qindex.info/i.php?x=30432
 遼河
at a confluence locally referred as the "Trident River" (三岔河), where it then adopted the new name Daliao River (大辽河, "Great Liao River") and drained into the Liaodong Bay just west of Yingkou.
http://qindex.info/i.php?x=15128
 김대중협정을 변명하는 다람쥐 쳇바퀴 논리
국제법상 부득이한 협정이었다. ➔ 구지 한일공동수역의 모양을 괴상하게 만들어 독도를 넣어야 했냐? ➔ 김영삼 정부가 협상했으므로 김대중에게는 책임이 없다. ➔ 협정을 체결한 대통령에게 최종 책임이 있지 않느냐? ➔ 국제법상 부득이한 협정이었다.
http://qindex.info/i.php?x=26198
 문제 6. 사형미집행은 민주주의에 어긋난다.
사형제도는 법률로 규정되어 있고 헌법재판소는 그 법률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 국민들도 대다수 사형 집행을 원한다. 그렇다면 정부가 사형 집행을 하는 것이 국민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http://qindex.info/i.php?x=27793
 왜, 高句麗 그리고 한복(韓服) - 足結
はにわ에서 나타나는 족결은 이조의 풍속화에도 나타난다. 천년이 넘는 시차가 있으나 이조 이전에는 족결이 없었다는 정황이 없으므로 이조의 족결은 삼한 시대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바지 저고리 문화가 왜로 건너갈 때 족결도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http://qindex.info/i.php?x=11538
 왜, 高句麗 그리고 한복(韓服) - 고름
고구려의 벽화에는 허리띠로 윗도리를 묶을 뿐, 별도의 고름이 없다. 그러나 왜의 はにわ에는 고름처럼 묶는 부분이 있어 이조의 고름과 통하는 면이 있다. 바지 저고리 문화가 왜로 건너갈 때의 한국 저고리도 はにわ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조 한복의 고름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양직공도에 나오는 신라 사신이 입은 옷에 고름이 없는 것은 일반인의 옷이 아니라 예복이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http://qindex.info/i.php?x=11537
 전임 정부 탓이 어려운 이유
김대중이 독도영유권을 훼손하는 어업협정을 맺으러 갈 때, 기존에 일왕이라 칭하던 호칭을 천황으로 바꾸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보상을 한국 정부가 하고 일본에는 문제삼지 않기로 하는 등 다른 친일적인 행위를 동반하였기 때문에, 전임 정부의 탓으로 돌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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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못
○ 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단밀의 북쪽에 大堤池가 있었다고 하는데, 방향으로 보아 삼분에서 시작된 물길 막은 것으로 보인다. 효제리에는 大堤마을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노연 서쪽의 墨溪(미끼)마을 앞에는 미끼못의 둑이 있었다는 전승이 있는데, 이는 商山誌(1617)에 나오는 墨池 또는 未溪堤와 연결될 수 있다. ○ 용기의 동쪽에도 1957년까지 돌못이 있었는데, 지금도 제방의 흔적이 남아 있다.
http://qindex.info/i.php?x=26665
 한국인들이 밥을 많이 먹은 이유...
기생충 감염이 사라진 것은 인분 사용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 달리 농경지가 적다. 그래서 좁은 땅에서 많은 생산을 얻기 위해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인분을 사용하면 기생충에 감염되기 쉽다. 그리고 기생충에 감염되면 양분을 많이 뺏겨 밥을 많이 먹게 된다. 그렇다면 인분 사용 > 기생충 감염 > 식사량 증가라는 인과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들은 청결해서 덜했을 수 있다.
http://qindex.info/i.php?x=26418
 ¦어느 강변에 살고 싶습니까?
한 쪽은 건기에 강이 바닥을 드러내며 재래식 보 주변에만 물이 조금 괴어 있다가 우기가 되면 물이 금새 차올라 둑을 언제 넘을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한 쪽은 사시사철 물이 찰랑차랑 차 있고 우기에도 물 높이가 둑보다 여유있게 낮아 범람의 걱정이 없습니다.
http://qindex.info/i.php?x=10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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