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발표 > YouTube > videos > 檀君의 정체

檀君(단군) 王儉(왕검)은 王險(왕험)에 도읍했던 衛滿(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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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91#31608 SIBLINGS CHILDREN 3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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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단군의 정체에 대해 고찰해 보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조선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간단히 알아 보겠습니다. 하나라때 가죽옷을 싣고 갈석을 지나 황하로 들어왔다는 조이가 있었는데, 주나라때 점박이 물범으로 추정되는 재자를 바쳤다는 양이 그리고 무늬가 있는 가죽이 났다는 조선은 모두 이 조이와 동일 종족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이란 명칭도 선이라 불리던 점박이 물범을 조공한다는 뜻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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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에 연나라는 요동을 지나 조선과 진번을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습니다. 연나라를 병합한 진나라는 이곳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키죠. 진나라를 이은 한나라는 이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며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까지 국경을 물립니다. 이때 연나라의 위만이 패수를 건너 이곳으로 도망와 위만조선을 세우게 되죠. 그러나 한나라가 국력이 강성해지자 조선을 침공하여 낙랑군 등 네 개의 군을 설치합니다. 이후 조선은 낙랑으로 불려집니다.
31591#31602 SIBLINGS CHILDREN 3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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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微子去之 箕子為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尙書大傳」 武王勝殷 釋箕子囚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既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史記」 武王既克殷 訪問箕子 箕子対曰 天乃錫禹鴻範九等 常倫所序 「漢書」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魏略」 箕子之後朝鮮侯
31591#31597 SIBLINGS CHILDREN 31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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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은나라가 주왕의 실정으로 주나라 무왕에 의해 망하던 시기에 은나라에 기자가 있었습니다. 논어에는 당시 주왕과 불화를 겪던 기자가 노비로 전락했다고만 되어 있는데, 연나라의 위만이 조선으로 도망가 왕이 된 이후 기자 또한 조선으로 달아났고 그러자 무왕이 조선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상서대전에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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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유학을 숭상하는 한나라의 분위기 속에서 기자가 홍범구등을 무왕에게 전했다는 이야기가 사기에 수록되었고,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병합한 후에는 위만조선의 범금8조도 기자가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한서에 수록되었습니다. 이어서 위만에 의해 멸망당한 조선의 왕조가 기자의 후손이었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져 위략에 수록되었죠.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낙랑의 명망 가문은 기자의 후손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자 이야기는 대부분 논어 이후 만들어진 것이죠.
31591#31594 SIBLINGS CHILDREN 3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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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都王險 「三國史記」 平壤者 夲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史記」 聚黨千餘人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王之都王險 「三國遺事」 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神壇樹下 謂之神市 號曰壇君王倹 即位 都平壤城 始稱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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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설화는 평양에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조건에 맞는 나라로는 위만조선과 위만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조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이 세웠다'는 조건을 추가하면 범위가 위만조선으로 좁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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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뒷받침하는 흔적이 몇 개 있습니다. 단군은 왕검이라고도 했는데, 왕검은 위만이 도읍을 했고 위만조선 이후에는 쓰이지 않게 된 지명 왕험과 비슷합니다. 이를 놓고 왕험에서 왕검이 나왔다는 설명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을 수 없죠. 또 삼국사기에는 왕검에 대해 설명하며 王之都王險 즉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기에서 위만에 대해 설명하며 王之都王險이라 한 부분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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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의 건국과 단군설화는 이야기 구조도 비슷합니다. 위만은 무리 천여명을 모아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다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고, 환웅은 무리 삼천명을 거느리고 인간세상에 내려와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열었는데 그의 아들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나라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31591#31607 SIBLINGS CHILDREN 3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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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왕국은 모두 건국 설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주몽설화, 백제는 온조설화, 신라는 혁거세설화 그리고 가라는 구지설화를 가지고 있었죠. 건국설화는 통치에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고대 왕조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위만조선도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죠.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한나라에 병합될 때 기자 이야기로 덮여졌을 겁니다. 기자 이야기는 한나라의 위만조선 정벌과 낙랑군 설치를 정당화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죠
31591#31609 SIBLINGS CHILDREN 3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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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에 건국설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왕씨고려때 나타난 단군설화와 연결짓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천여 년의 시차가 있고 그 기간에 이야기가 전승된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단군설화는 평양이 우리 민족의 영역이 된 이후, 즉 평양 성주 검용이 궁예고려에 투항한 이후 위만조선에 관한 역사 기록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31591#31596 SIBLINGS CHILDREN 31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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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고려를 이은 왕씨고려는 새로 확보한 평양 지역 곳곳에 역사 기록에 나오는 고려의 시조 주몽과 기자조선의 이야기를 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고분에는 동명왕릉과 기자릉의 이름을 붙이고 사당을 세웠으며 강변의 암굴에는 주몽이 기린을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입히고 옛 성터에는 기자가 쌓고 정전제로 땅을 구획하였다는 이야기를 입혔습니다.
31591#31614 SIBLINGS CHILDREN 31614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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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왕씨 왕조가 원하지 않았던 위만조선까지 이야기로 되살아나 단군설화가 된 듯합니다. 사실 주몽은 평양과 연관이 없고 기자는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며 평양과 진짜 연관이 있는 인물은 위만이었죠. 위만은 몽치 머리를 했다고 합니다. 위만이 살았던 시기와 멀지 않은 진나라때 만들어진 진시황 병마용을 통해 위만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31591#31610 SIBLINGS CHILDREN 3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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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5 단군설화의 유래
외부에서 평양으로 들어와 왕조를 세운 사례는 위만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단군이 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위만조선의 건국이 씨앗이 되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볼 수 밖에 없다. 두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王之都王險이 이를 뒷받침한다.
31591#30476 SIBLINGS CHILDREN 30476
 
2024.08.17 箕子
箕子에 대한 이야기는 원래 殷에 있었다는 이야기만 있었고 그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燕의 滿이 朝鮮으로 가 왕이 되자 이에 영향을 받아 漢이 尙書를 복원할 때 '箕子 또한 朝鮮으로 달아나자 周가 그를 朝鮮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31591#31429 SIBLINGS CHILDREN 31429
 
YouTube
31591#31619 SIBLINGS CHILDREN 31619
 
壇君朝鮮
고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라 모두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다. 건국설화는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고대 왕조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도구다. 위만조선도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위만조선을 내쫓고 세워진 낙랑군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을 듯하다. 그래서인지 위만조선의 건국설화는 역사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31591#31601 SIBLINGS CHILDREN 31601
 
王氏高麗의 역사왜곡
왕씨고려는 영토와 백성은 신라 그대로고 왕조만 바뀐 것이다. 왕씨왕조가 고려계승을 내세운 것은 신라왕조에 한참 뒤지는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왕고는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고려를 한국사에 끼워넣었다. 그런데 왕고가 내세운 고려계승은 봉건적 지배권을 말하는 것이었지 종족적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옛 고려 지역의 주민들은 내쫓기도 하고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31591#31606 SIBLINGS CHILDREN 31606
 
貉, 穢, 鮮 그리고 韓의 뿌리를 찾아서
① 發(麃) → 貉(鮮) ② 長夷 → 穢 ③ 鳥夷(皮服) → 良夷(在子) → 朝鮮(文皮) → 樂浪
31591#31592 SIBLINGS CHILDREN 3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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