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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 > 0369 ~ 0562 ❹ 倭의 介入 |
369년에 왜는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치고 比自㶱, 南加羅, 㖨國, 安羅, 多羅, 卓淳 그리고 加羅를 복속시킨 뒤 서쪽으로 돌아 忱彌多禮를 치자 比利, 辟中, 布彌支 그리고 半古가 항복해 왔다. 왜는 점령 지역을 백제와 나눠 가졌다가 392년에는 백제왕을 교체하면서 대부분 빼앗았다.
이후 백제에게 영토를 조금씩 돌려주고 신라에게는 조금씩 잠식당하다가 562년에 加羅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모두 잃었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任那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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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복강 동조현상
한국의 영산 지역과 일본의 복강 지역이 동일한 고고학적 양상을 띠는 현상을 말한다.
남방계 고인돌, 독널무덤, 전방후원분 등에서 이 현상은 뚜렷하다.
따라서 이 두 지역은 동일한 종족적 유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반도로 유민이 들어오는 경로는 크게 두 갈래다. 전쟁과 재난을 피해 북쪽에서 내려오는 화전민이 하나의 갈래고 장강에서 산동 반도나 유구 열도를 거쳐 들어오는 논농사 주민이 하나의 갈래다. 영산과 복강은 후자에 해당된다.
5999#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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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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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720) 新羅國
소잔오존의 하는 짓이 매우 버릇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그 벌로 많은 재물을 바치게 하고 마침내 쫓아 내었다. 이 때 소잔오존은 그의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가 증시무리란 곳에 살았다. 말하기를 “이 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하고는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출운국 파천 가에 있는 조상봉에 도착했다.
5999#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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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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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720) 韓鋤劍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잔오존이 기도전원과 결혼하고자 하여 청하니 각마유와 수마유가 “바라건대 먼저 저 뱀을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 결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 뱀은 머리에 각각 소나무가 나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산이 있어 매우 무섭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를 죽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소잔오존이 꾀를 내어 독한 술을 빚어서 그에게 먹였다. 뱀이 취하여 잠이 들자 소잔오존이 뱀을 한서검(韓鋤劍)으로 머리와 배를 베었다.
5999#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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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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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에서 출운으로
소잔오존은 신라국(新羅國)에서 바다를 건너 출운으로 갔고 그의 이야기에는 한지(韓地), 한향(韓鄕) , 한서검(韓鋤劍) 등 한국과 관련된 말이 많이 나온다. 또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상이 항상 어둡게 되었다(六合之內常闇)'는 부분은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日月無光)'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연오랑과 세오녀도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5999#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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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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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 任那의 첫 번째 의미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 리 북쪽에 있는데 (축자국과는)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 임나에 대한 일본서기의 최초 기록이다. 여기서의 임나는 축자 및 계림과의 상대적 위치로 보아 南加羅를 뜻한다. 이것이 임나의 첫 번째 의미다. 신라가 국호를 계림으로 바꾼 것은 65년의 일이니 이 설명은 그 이후에 씌어졌다.
5999#8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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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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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 日本書紀(720) 阿羅斯等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어서 흰 돌을 소 값으로 받았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자 그 신석(神石)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했다. 아라사등은 몹시 좋아하여 교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이 다른 곳에 간 사이에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라사등은 크게 놀라 자기 처에게 “소녀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었다. “동쪽으로 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곧 찾아서 멀리 바다를 건너 일본국으로 들어왔다.
5999#7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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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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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脫解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래 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7년에는 등용해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 多婆那는 丹波일 가능성이 있다.
5999#1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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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6~0232 高地性集落
미생 시대 중기부터 들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마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환호집락이 부락 단위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면 고지성집락은 바다를 건너오는 적들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지성집락은 倭國大亂과 연결한 설명이 많이 나오고 있다.
倭國大亂때 일본 서부에서 바다를 통해 동쪽으로 정복활동이 벌어졌고 고지성 집락은 그에 대응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5999#8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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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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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韓
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삼고 남쪽은 倭와 접해 있다. 마한, 진한 그리고 弁韓 세 종족이 있다. 진한과 변한은 모두 24국인데 이 중 열 두 나라는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을 앉혀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변한의 독로국은 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변한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韓, 濊 그리고 倭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사 가며 낙랑과 대방에도 공급되었다.
5999#6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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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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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倭 3
남쪽으로 가면 야마일국에 이르는데, 여왕이 도읍한 곳으로 바닷길로 10일 동안 가고 육상으로 1개월 동안 간다. 관리로는 이지마가 있고, 그 다음은 미마승이라 부르며, 그 다음은 미마획지라 부르고, 그 다음은 노가제라 부른다. 7만여 호 정도가 있다.
▐ 邪馬壹國은 邪馬臺國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대마국에서 야마일국까지 8국이 15만호였다. 마한이 10여만 호고 변진이 4~5만 호였으니 이 8국의 호수가 韓 전체의 호수와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999#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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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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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7~0412 내부 통일 다음엔 외부 정벌?
이 기간에는 중국 사서에 왜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비미호 왕조가 왜5왕으로 그대로 이어졌는지 왕조 교체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신무 천황의 동정 이야기가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일 수 있다.
'구주의 일향에 가라와 동일한 계통의 건국 설화를 가진 집단이 있었고 그들이 동쪽으로 정벌에 나서 내량에 있던 견고한 왕조(비미호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곳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인데, 369년에 있었던 한국 진출도 이 이야기의 끝에 덧붙여 질 수 있다.
5999#8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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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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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 三國史記(1145)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제와 함께 도모해서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왕이 “옳다.”고 하였다.
5999#3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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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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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10.03 日本書紀(720)
和珥津에서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신라왕이 이를 보고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였다. 고려와 백제 두 나라 국왕도 스스로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서약하였다.
▐ 이때는 신라만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이며 임나에 대한 지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5999#1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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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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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 百濟와 왜의 만남
왜가 斯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냈는데 卓淳王 末錦旱岐로부터 백제 이야기를 듣고 종자 爾波移와 탁순인 過古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냈다.
백제 肖古王이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 가지 빛깔의 채견 각 1필과 각궁전 및 철정 40매를 爾波移에게 주었다. 이에 爾波移가 돌아와서 志摩宿禰에게 보고하자 바로 탁순으로부터 돌아왔다.
5999#6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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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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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七枝刀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백제왕이 말하기를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5999#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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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414)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백잔이 항복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그 성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곧 그 성을 에워쌌다. 이에 백잔주가 곤란해져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무릎을 꿇고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5999#8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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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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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廣開土王陵碑(414)
▐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安羅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여기서의 任那加羅는 남가라로 추정된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14) 뿐만 아니라 송서(488), 남제서(537), 양서(636), 남사(659), 일본서기(720), 봉림사진경대사비(924), 삼국사기(1145) 등 광범위한 기록에 등장한다. 이에 비해 加耶는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사용된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의 모형을 따르기로 한다.
5999#6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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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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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 이덕일의 영산 왜
가운데 그림은 영산강 유역에 왜가 있었다는 이덕일의 가설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왜가 391년에 바다를 건너왔고 399년에는 신라를 점령한 상태였으며 400년에는 그 신라 점령군이 고려에 쫓겨 임나가라로 퇴각하였고 404년에는 대방을 침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한반도에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설정해야 자연스러우며 그 주둔지로는 영산강 유역 외에 마땅한 장소가 없다. 이덕일의 가설은 그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5999#1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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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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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 直支(腆支) 귀국
❶ 일본서기(720) 285 백제의 아화왕이 죽자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본국으로 돌아가 왕위를 잇도록 하라며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❷ 삼국사기(1145) 405 아신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가 훈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전지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백제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5999#6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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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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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8 葛城襲津彦
평군목토숙녜, 적호전숙녜를 가라에 보냈다. 정병을 주며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분명히 신라가 방해하여 체류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길을 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목토숙녜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나아가 신라의 국경에 이르렀다. 신라왕은 놀라 사죄하였다.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 이 사건은 열도에서 바다 건너 한국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5999#6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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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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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 0502 倭5王
왜는 438년에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요구했으나 송은 451년에 백제를 빼고 가라를 넣어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만 인정한다. 왜는 다시 478년에 송이 인정한 것에 백제를 넣어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요구했으나 송은 역시 백제를 뺀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만 인정한다. 제는 이것을 그대로 이어 479년에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을 인정한다.
5999#2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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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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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8 宋書(488)
讚이 죽자 아우 珍이 왕이 되어 유송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요청해와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珍이 또 왜수 등 13명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이름을 붙여 달라 하므로 모두 들어 주었다.
5999#7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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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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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後漢書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國皆稱王世世傳統其大倭王居邪馬臺國
倭는 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100여개의 나라로 되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漢과 사신의 왕래가 통하는 곳이 30여개 된다. 나라의 수장은 모두 왕을 칭하는데 대대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 やまたいこく)에 있다.
5999#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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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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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6~0479 웅략천황
478년에 왜 무왕이 유송에 보낸 편지에는 고려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부친과 형이 고려 침공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어 실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475년에 고려는 백제를 침공하여 무령왕의 부친인 개로왕과 왕족들을 몰살했는데, 이때 죽은 사람 중에는 무령왕의 형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 무왕과 백제 무령왕은 이렇게 공통점이 많아 동일인일 가능성이 생긴다.
5999#8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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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1.04 볼모 군군
백제 가수리군(개로왕)은 지진원이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우 군군(곤지)에게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면서 “나의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가는 길에 출산하면 배 한 척에 실어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5999#2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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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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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 전협과 제군의 반란
전협은 궁중에서 시종을 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아내 치원의 미모를 자랑하였다. 천황이 듣고 전협을 임나국사로 보낸 뒤 치원과 동침하였다. 그 소식을 듣은 전협은 신라로 망명할 생각을 하였다.
신라는 이때 倭를 섬기지 않고 있었는데 천황은 전협의 아들 제군에게 신라를 정벌하라 명했다. 제군은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여 신라에 들어가다 되돌아가 섬에 머물렀다.
이를 못마땅해 한 제군의 아내 장원이 제군을 죽이고 천황이 보낸 사람을 따라 복명하였다.
5999#2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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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 新羅 구원
웅략 천황이 즉위한 이후 8년째 신라는 倭를 섬기지 않고 고려와 우호를 맺어 고려의 날랜 병사 100명이 신라를 지켜 주었다.
그러나 고려가 신라를 삼키려 한다는 오해를 한 신라왕이 고려군을 죽이게 하였고 고려는 군사를 일으켜 신라로 쳐들어갔다.
사방에서 고려군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신라는 임나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日本府 行軍元帥로 하여금 구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임나왕이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5999#2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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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5 新羅 침공
천황이 “신라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여러 대에 걸쳐 신하를 칭하며 조빙을 어기지 않았고 공물도 잘 바쳤다. 짐이 천하를 다스리자 고려의 조공을 막고 백제의 성을 병탄하였다. 조빙을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기소궁숙니 등이 신라에 들어가 㖨의 땅을 평정하였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기소궁숙니는 대반담련 등과 만나 군대를 다시 크게 일으켜 남은 무리와 싸웠다.
대반담련은 싸우다가 죽었고 기소궁숙니는 병에 걸려 죽었다.
5999#2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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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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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 고려의 왜 의식
겨울 고려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창하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고려의 장수들이 왕에게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
5999#2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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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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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 任那의 두 번째 의미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일본구기에서는 “久麻那利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久麻那利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 任那는 원래 남가라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의미가 확장되어 백제와 신라를 제외한 한국의 나머지 소국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5999#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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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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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文斤王→東城王
❶ 일본서기(720) 백제의 文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병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東城王이 되었다. ┆ ❷ 삼국사기(1145) 東城王의 이름은 牟大이니 文周王의 아우 昆支의 아들이다. 三斤王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5999#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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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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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5 新羅의 朝貢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상모야군의 선조 죽엽뢰를 파견하여 조공하지 않은 까닭을 묻게 하였다. 또 죽엽뢰의 아우 전도를 파견하며 “만일 신라가 막으면 군사를 일으켜 치라.”고 명하고 정병을 주었다. 이에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막았다. 신라군이 무너지자, 그 틈을 타 군사를 풀어 수백 명의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4읍의 백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5999#2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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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우전팔번신사 인물화상경
우전팔번신사의 인물화상경에는 '계미년에 斯麻가 男弟王의 장수를 기원하며 거울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귀가 있다. 斯麻는 무령왕의 이름이고 계미년도 무령왕의 재위 기간에 들어 있다. 503년 계미년으로부터 4년 뒤 무열천황이 죽자, 지방에 있던 男大迹王이 男大迹天皇으로 추대된다. 男大迹天皇은 백제에게 임나 四縣을 주었고, 己汶을 놓고 백제와 가라가 대립하였을 때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또 가라의 多沙津을 떼어 백제에게 주었다.
5999#2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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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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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四縣 분쟁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치고 따로 표를 올려 任那²國의 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 4현을 청했다. 哆唎國守 수적신압산이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 아뢰었다. 이에 물부대련 추록화를 칙을 선포하는 사신으로 삼았다. 이 때 떠도는 말로 “대반대련과 哆唎國守 수적신압산이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의 원망이 쌓여 갔다.
5999#8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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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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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四縣
▐ 실질적으로 백제는 그 전부터 임나4현과 比利 및 辟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듯하다. 490년과 495년에 남제에 올린 표문에서 동성왕은 공신들에게 阿錯王, 邁羅王, 辟中王 등의 작위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阿錯은 比利고 邁羅는 4현의 하나인 娑陀다. 여기에는 동성왕이 왜왕에 의해 앉혀진 백제왕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5999#6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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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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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영산 마한
양직공도(梁職貢圖 526-539)에는 백제가 521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을 소개했는데, 지방을 22담로로 나누어 통치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60년에 백제가 망할 때는 지방에 37군이 있었다. 한국통일 이후 신라는 옛 백제 지역을 웅주, 전주 그리고 무주로 나누고 각각 13개, 10개 그리고 14개의 군을 두었다. 모두 합하면 37개로 백제가 망할 때의 군과 숫자가 같다. 웅주와 전주만 놓고 보면 23개의 군으로 양직공도에 나오는 담로와 숫자가 ...
5999#6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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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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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梁職貢圖
사라국은 본래 동이 진한의 한 소국이었다. 조위 때에는 신라라 했고 유송 때에는 사라라 했지만 사실은 하나다. 때로는 韓에 속했고 때로는 倭에 속했다.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募秦이라는 왕이 처음으로 백제의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5999#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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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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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 0529.03 多沙津 분쟁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압산신을 통해 가라의 多沙津을 청하자 왜는 이를 주었다. 이에 가라왕은 왜를 원망하며 신라와 우호를 맺고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여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나 의관 문제로 갈등이 생기자 신라는 왕녀를 돌려달라 요청하였다.
가라는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으며 자식이 있는데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신라는 지나는 길에 刀伽, 古跛, 布那牟羅 세 성을 함락시키고 북쪽 변경의 다섯 성도 쳤다.
5999#6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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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三國史記(1145) 新羅
왕이 나아가 남쪽 변방의 새로 확장한 영토를 순행하였는데, 가야국의 왕이 와서 만났다.
▐ 일본서기(720)에는 527년 사건에서 신라가 차지한 南加羅와 㖨己呑의 회복이 언급되고 있고 541년의 사건에서는 卓淳도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신라가 차지했다고 되어 있다. 南加羅는 김해로 㖨己呑은 대구 그리고 卓淳은 마산만으로 비정되므로 여기서 말하는 가야왕은 南加羅의 왕을 말하는 듯하다.
5999#24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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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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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0530 近江毛野臣
527년에 왜는 근강모야신으로 하여금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에 나아가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축자국조 반정이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529년 왜는 다시 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 530년 임나의 사신이 왜에 와서 모야신의 폭정을 폭로하였다. 왜는 목협자를 보내 모야신을 불렀다. 모야신은 가는 도중 대마도에서 병이 나서 죽었다.
5999#2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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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04 任那의 세 번째 의미
任那³王 기능말다한기가 와서 조회하였다. (기능말다란 대개 아리사등이다.) 대반대련금촌에게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 여기에 任那王으로 나오는 阿利斯等은 다사진 분쟁 때 신라 왕녀와 결혼했던 가라왕 阿利斯等이다. 任那는 남가라가 신라에 복속된 후 가라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任那의 세번째 의미다.
5999#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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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2 三國史記(1145) 新羅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아들 무력과 함께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 일본서기에는 527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南加羅와 㖨己呑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南加羅는 그 전에 실질적으로 신라에 종속되었다가 이때 비로소 완전히 왕국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5999#6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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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544 ◾任那² 재건 시도
任那²의 㖨己呑, 南加羅 그리고 卓淳이 신라에 넘어가자, 왜는 529년에 모야신을 任那²에 파견하여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잠잠하다 흠명천황이 즉위 이듬해인 541년부터 다시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백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任那²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를 旱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545년 이후 지지부진하다 554년 이후에는 日本府와 旱岐가 기록에서 사라졌다.
5999#2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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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新羅의 왜 의식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이 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5999#2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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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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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任那² 十國
신라가 任那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湌國 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 任那²의 구성은 계속 변하였고 마지막에는 10국이 있었다.
5999#3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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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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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新羅, 任那³ 병합
일본서기에는 562년에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562년에 가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가 이를 토벌하였다고만 되어 있다. 임나 10국 중 중심이었던 가라가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임나가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격분한 왜는 군사를 보내어 치리와 거증산으로부터 나아가 신라를 치도록 했으나 임나를 복구하지는 못했다.
5999#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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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06 欽明天皇
“신라는 서쪽의 오랑캐로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다. 궁색해서 항복한 것을 불쌍히 여겨 목이 베어질 처지의 신라왕을 온전하게 두었고 신라에게 요충의 땅을 주어 유달리 번영하게 했다. 그러나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임나를 능욕했고 커다란 이빨과 갈고리 같은 손톱으로 중생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쓸개를 쏟고 창자를 꺼내는 심정으로 간악한 역도를 벌주지 못한다면 죽어도 신하와 자식의 도리를 이루지 못한 한이 남을 것이다.”
5999#2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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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1 欽明天皇
3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4월에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밖에 나가 있던 황태자를 역마로 불러들이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 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봉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이 달 내전에서 죽었다.
8월에 신라가 조문사를 보내어 빈소에서 죽음을 애도하게 하였다.
5999#1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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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북사(659)
왜왕 다리사북호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아뢰길 "듣자오니 바다 서쪽 보살천자께서 불법을 다시 일으키신다 하니 사신을 보내 조배드립니다. 아울러 중 수십 명이 여기 와 불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 국서에는 '해 뜨는 곳 천자가 해 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별일 없으신가?' 어쩌고 저쩌고 하였다. 황제가 글을 보고 언짢아 홍려경에게 "오랑캐가 보낸 글이 무례하구나. 다시는 이런 말이 들리지 않게 하라." 하였다.
5999#7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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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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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1864 한치윤, 海東繹史
신공황후 49년에 신라가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자 荒田別 및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고 백제 사람인 久氐 등을 鄕導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여 ... 韓國의 宮倉을 정하여 任那의 왕을 宮倉首로 삼은 다음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과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개의 큰 고을을 임나에 붙여서 宮藏으로 삼게 하였다.
▐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5999#40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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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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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星野恒(ほしの ひさし)
신라왕이 しまね 지방에 정착한 뒤 きんき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神武東征으로 선주민을 정복한 후 태양신 あまてらす를 섬기는 나라를 세웠다. すさのお 또한 신라왕인데 열도 정복 뒤에도 반도와 왕래하였다. 나중에 すさのお와 あまてらす는 사이가 나빠지고 반도가 熊襲를 지원해 반란을 일으키자 반도와 열도는 갈라졌다. 神功皇后의 반도 정벌과 熊襲 진압에 의해 한때 반도와 열도가 통합되었지만 신라가 당과 연합해 白村江에서 백제와 왜를 깨뜨리자 완전히 갈라졌다.
5999#1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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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동국사략
대가야는 또한 任那라고도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344년 전에 新羅 眞興王이 그 땅을 멸하고 대가야군을 설치하였다. 대가야가 예전에 蘇那葛叱知를 日本에 파견하여 화친을 맺고 또 왕자 阿羅斯 등이 일본에 갔다. 그 나라에 南伽耶(소가야) 등 7국이 속하니 총칭하여 임나라 하였다.
대체로 가락과 임나는 하나의 부락이었다. 국력이 미약하여 신라, 百濟, 일본의 견제를 받았다.
▐ はやし たいすけ가 쓴 역사책을 참고했다.
5999#1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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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고등학교 교과서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 영산강 유역의 고고학적 양상에서 백제의 영향이 나타나는 시기는 6세기부터다. 그리고 낙동강 유역의 소국에 지배권을 행사했다고 기록에 나오는 나라는 倭다.
599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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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고등학교 교과서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 가야보다 가라가 더 보편적인 명칭이다. 고령에는 가라가 있었고 김해에는 남가라가 있었다.
5999#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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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 솔까역사 YouTube
임나의 역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369년에 마산에 상륙한 왜군은 백제의 지원군과 합류한 뒤 김해를 거쳐 경주에 있는 신라를 칩니다. 그리고 대구로 돌아나와 고령, 합천, 창녕 그리고 함안을 차례로 쓸고 갑니다.
빨간색 선의 오른편 부분을 말합니다.
397년에는 서울에 있던 백제가 고려에 항복한 책임을 물어 백제 영토 대부분을 빼앗습니다.
왼편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세 지역은 그 일부입니다.
5999#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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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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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ꜛ
그리고 조금씩 돌려주게 되는데요, 405년에는 이천과 진천, 477년에는 공주, 512년에는 대전, 논산, 부여 그리고 청주 그리고 542년에는 마지막으로 영산강 유역을 돌려 줍니다.
낙동강 유역의 경우, 527년경에 대구, 마산 그리고 김해가 신라에 항복하고 562년에는 고령이 신라에 병합되어 임나가 모두 소멸됩니다.
5999#1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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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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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사의 최대 의문
고대 국가의 발전은 큰 강을 끼고 이루어졌다.
대동강변의 조선이 그러했고 한강변의 백제가 그러했다.
그런데 낙동강변에 있던 고대 국가는 크게 발전한 나라가 하나도 없다.
그 대신 유역 바깥에 있던 신라가 성장하여 유역을 차지하는, 다소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이것은 낙동강변의 소국들이 미처 성장하기 전에 왜와 백제가 정복하여 성장을 꺾어놓았기 때문으로 설명이 된다.
다행히 신라는 이 정복의 경로에서 비껴나 있었다.
5999#26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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