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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왜에 볼모를 보낸 기록은 397년의 태자 전지, 461년의 왕자 곤지, 513년의 태자 순타, 631년의 왕자 풍장 등이 확인된다. 전지의 경우 397년과 405년의 사건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하다. 부여풍의 경우도 일본서기와 당서의 기록이 일치하므로 또한 역사적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씨조선이 태자 이은을 일본에 유학보낸 것과 비교해 볼 만하다.
 
0397 볼모 直支(腆支)
❶ 일본서기(720) 277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백제의 침미다례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왜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 ❷ 삼국사기(1145) 397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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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 直支(腆支) 귀국
❶ 일본서기(720) 285 백제의 아화왕이 죽자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본국으로 돌아가 왕위를 잇도록 하라며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❷ 삼국사기(1145) 405 아신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가 훈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전지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백제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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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1.04 日本書紀(720)
백제 가수리군(개로왕)은 지진원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군군(軍君, 곤지)에게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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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文斤王→東城王
❶ 일본서기(720) 백제의 文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병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東城王이 되었다. ┆ ❷ 삼국사기(1145) 東城王의 이름은 牟大이니 文周王의 아우 昆支의 아들이다. 三斤王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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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8 日本書紀(720)
백제 태자 순타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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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7.04.01 日本書紀(720)
백제왕이 왕자 아좌(阿佐)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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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660 豐章(扶餘豊)
❶ 日本書紀(720) 황태자가 직관을 백제 왕자 豐璋에게 주고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에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복신이 맞이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 ❷ 舊唐書(945) 백제의 중 도침과 옛 장군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유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옛 왕자 扶餘豐을 맞아다 왕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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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9.12.14 속일본기(797)
황태후의 성은 화(和)씨이고 이름은 신립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純陁)태자에서 나왔다. 금상(환무천황)과 한량친왕, 능등내친왕을 낳았다. 그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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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이은이 살았던 동경의 저택
1930 이은이 살았던 동경의 저택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이은은 순종에게 아들이 없자 황태자로 선정되었다.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황족과 결혼하였다.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이 죽었을 때는 잠시 귀국하여 이왕의 작위를 계승하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나왔으며 계급은 육군 대장에 이르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은을 친일인명사전에서 빼면서 그가 사실상 볼모였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은은 백제의 볼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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