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018 百濟 遷都 > -0018 溫祚都(河南✗)❶慰禮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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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0018 古典記
東明王第三子温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夲扶餘 至慰礼城 立都稱王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였다.
33053#1876 SIBLINGS CHILDREN COMMENT 1876
 
-0018 三國史記(1145) 朱蒙
北扶餘의 朱蒙이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로 와 扶餘왕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沸流와 溫祚 두 아들을 낳았는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두 사람은 남쪽으로 가서 미추성과 위례성에 각각 나라를 세웠다. 나중에 합쳐서 百濟라고 불렀다.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33053#32176 SIBLINGS CHILDREN 32176
 
-0018 三國史記(1145) 優台
北扶餘왕 觧扶婁의 서자인 優台는 卒夲 사람 召西奴에게 장가들어 沸流와 温祚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가 죽고 나서 소서노는 扶餘에서 도망온 朱蒙에게 시집을 가서 高句麗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는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33053#32181 SIBLINGS CHILDREN 32181
 
-0018 三國史記(1145) 仇台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33053#32182 SIBLINGS CHILDREN 32182
 
-0018 ◾仇台┆優台
仇台가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고 優台는 그 仇台의 와전이다.
33053#32904 SIBLINGS CHILDREN 32904
 
-0018  ◾沸流와 温祚의 이동 경로 1
-0018 ◾沸流와 温祚의 이동 경로 1
①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②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이 두 기록으로 보아 沸流와 温祚는 일단 弥鄒城에 정착했던 듯하다. 당시 浿水와 帶水는 각각 樂浪郡과 南部都尉의 영역이었으므로 이곳에는 물길로 이르렀을 것이다. 국호에 濟가 들어 있어 이를 암시한다.
33053#32905 SIBLINGS CHILDREN 32905
 
-0018  ◾沸流와 温祚의 이동 경로  2
-0018 ◾沸流와 温祚의 이동 경로 2
물길로 弥鄒城에 이르렀듯이 다시 물길로 慰禮城에 이르렀을 듯하다. 중량천을 따라내려오는 북쪽 길과 탄천을 따라 올라가는 남쪽 길이 만나는 漢水의 나루가 좋은 정착지고 慰禮城은 그곳에 있었을 듯하다.
33053#32906 SIBLINGS CHILDREN 32906
 
-0018 「솔까역사」 百濟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濵 十臣諌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冝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 沸流欲居於海濵 分其民 歸弥鄒(忽→)城以居之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자 하여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성으로 돌아가 살았다. ┆温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33053#32177 SIBLINGS CHILDREN 32177
 
-0018   ◾河南 慰禮城
-0018 ◾河南 慰禮城
북으로 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는 河南之地에 慰禮城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慰禮城에서 漢水之南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기록과 모순된다. 河南之地에 대한 묘사는 漢水之南에 대한 묘사로도 어울리기 때문에, 원래 漢水之南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慰禮城에 대한 이야기로 변질된 듯하다.
33053#1833 SIBLINGS CHILDREN 1833
 
-0018 ◾至漢山 登負兒嶽
至漢山 登負兒嶽은 温祚가 慰禮城에 도읍한 후 순행하다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漢山은 남한산이고 負兒嶽은 북한산 인수봉이므로 至漢山 登負兒嶽은 남한산에 이르러 북한산 인수봉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되어 모순된다. 漢山을 훗날 신라의 北漢山州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모순이 해소되나 그것은 고려에서 나와 한국으로 올 때의 이야기에서나 필요했던 구절로, 慰禮城에서 나와 순행하는 이야기에서라면 필요없는 구절이다.
33053#1900 SIBLINGS CHILDREN 1900
 
-0018 ◾弥鄒(忽→)城
33053#32897 SIBLINGS CHILDREN 32897
 
-0018 三國史記(1145)
비류는 미추성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그 후 올 때 百姓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百濟로 고쳤다.
33053#32175 SIBLINGS CHILDREN 32175
 
-0018 솔까역사 百濟
그 계통은 高句麗와 더불어 扶餘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氏로 삼았다.✘
33053#32179 SIBLINGS CHILDREN 32179
 
2025.04.17 #youtube
위례성은 강북에 있었다.
33053#1874 SIBLINGS CHILDREN 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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