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史書 > 1145 三國史記(王高 金富軾) > 三國史記의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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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三國史記(1145)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다.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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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고려의 시조는 동명이 아니다."
▐ 고려의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모두루묘지명,광개토왕릉비),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등으로 나타난다. 騶(한서,후한서)와 騊(삼국지)도 鄒牟의 다른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 東明은 부여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부여의 시조다.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고려의 시조 鄒牟를 東明이라 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현재까지는 삼국사기가 오류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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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三國史記(1145)
유리왕 31년에 왕망이 우리의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게 되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서울에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의 명칭을 하구려후로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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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왕망에게 살해된 사람은 장수 연비가 아니라 추모왕이다."
▐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같은 이야기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인물은 달라,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왜곡된 것으로 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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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三國史記(1145)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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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동유낙랑 또는 최리낙랑을 낙랑군과 혼동하였다."
▐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유낙랑과 최리낙랑은 한나라가 대동강 유역에 설치한 낙랑군과 어울리지 않고 중국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지역에서는 낙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위세로 삼는 경우가 있었을 듯하다. 동유낙랑과 최리낙랑은 그런 경우의 사례로 설명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전래 기록에 나오는 낙랑과 후한서에 나오는 낙랑군을 짜맞추다보니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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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5 三國史記(1145)
築遼西十城以備漢兵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려는 이때 요동을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후한서에는 이 당시 요동 태수가 오환과 선비를 잘 제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서 당시 정황과 맞지 않는다. 이 기록은 다른 기록과의 교차검증도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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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6 三國史記(1145)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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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6 "百濟가 낙랑을 침공한 일은 304년에 있었다."
▐ 이 기록은 한인들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는 삼국지(289)의 245년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삼국지에도 당시 대방태수가 궁준이고 낙랑태수는 유무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당시 백제가 마한 50여국의 하나에 불과했다고 되어 있어 이 기록과 큰 차이가 난다. 진서(648)에도 이 당시 조공의 주체로 백제왕이 나오지 않고 마한왕이 나와서 삼국지의 정황을 뒷받침한다. 이 기록에서처럼 백제가 낙랑을 공격하는 일은 304년 즈음에나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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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 ❰❰ 0253 「三國誤記」
우로가 왜국의 사신 갈나고를 접대하며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를 듣고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치니 우로가 "내가 당해내겠다"하고 왜군에게로 갔다. 왜인이 잡아서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미추왕 때에 왜국의 대신이 왔는데 우로의 아내가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죽였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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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 "왜군에게 살해된 우로는 新羅 장수가 아니라 新羅왕이다."
▐ 왜가 신라를 침공하여 죽인 인물에 대해 일본서기(720)는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라 하고 삼국사기(1145)는 신라 장수 우로(于老)라 했다. 가라가 포상8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 신라의 원군을 인솔해간 장수를 삼국사기는 태자 우로라 소개해 놓았다. 우로의 아들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굳이 어린 아이를 왕으로 앉힌 이유로는 왕이 급사했고 그 아이가 태자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우로는 신라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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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三國史記(1145)
北齊封王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髙勾麗王 북제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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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북제는 高句麗왕이 아니라 고려왕으로 책봉하였다."
▐ 추모가 세운 왕조는 처음에 고구려 현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 국호도 고구려라 했다. 이후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와 함께 쓰이다 점차 이 고려로 통일되었다. 삼국사기는 중국의 기록을 많이 참고하였는데, 중국의 기록에 고려라 되어있는 것을 모두 고구려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추모가 세운 왕조는 고려라 하고 왕건이 세운 왕조는 왕씨고려로 구별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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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1~0578 三國史記(1145)
후주 무제가 군사를 내어 遼東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의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이 되었는데 힘을 다해 싸워서 참수한 것이 수십 급이었다. 여러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맹렬히 공격해서 크게 이겼다. ▐ 북주의 무제는 575년 말에 북제 정벌에 나서 577년에 완성했다. 그러자 같은 해에 토욕혼, 백제, 고려 등으로부터 조공이 왔고 무제는 그들을 책봉했다. 북주와 고려가 전투를 치르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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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2~0765 三國史記(1145)
於故髙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 그 다음 동쪽을 삭주, 그 다음 동쪽을 명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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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2~0765 "三國史記는 고려를 한국사에 끼워넣었다."
▐ 여기서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고려가 망하기 100여년 전부터 신라의 영토였었다. 또 고려가 점유하기 전에는 백제의 영토였었고 그 전에는 마한의 영토였었다. 한성만 놓고 보자면 백제가 도읍한 기간이 500여년에 달하는데 비해, 고려가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왜 고려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강조했을까? 목적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라에서 나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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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 궁예가 세운 나라는 후高句麗가 아니라 고려다.
0901 궁예가 세운 나라는 후高句麗가 아니라 고려다.
▐ 삼국사기(1145)는 견훤에 대해 '후백제왕을 칭했다(自稱後百濟王)'고 하면서 궁예에 대해서는 '왕을 칭했다(自稱王)'고만 해 놓았다. 삼국유사(1281)에는 궁예가 '고려를 칭했다(称髙䴡)'고 되어 있어 삼국사기가 의도적으로 고려란 명칭을 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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