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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37 삼국사기(1145)
始祖東明聖王姓髙氏諱朱蒙一云鄒牟一云衆解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다.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 於沸流水上居之國號髙句麗因以髙爲氏 비류수 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로 씨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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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37 고려의 시조는 동명이 아니다
고려의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모두루묘지명,광개토왕릉비),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등으로 나타난다. 騶(한서,후한서)와 騊(삼국지)도 鄒牟의 다른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 東明은 부여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부여의 시조다.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고려의 시조 鄒牟를 東明이라 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현재까지는 삼국사기가 오류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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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37 고려의 시조는 고씨 성을 만들지 않았다
송서(488)의 413년 기록에 장수왕의 이름이 고연(高璉)이라 표기된 것이 현재까지 고려왕의 성이 나타나는 가장 이른 기록이다. 그 이전에는 이름만 나타나고 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이 고씨로 고정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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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37 고구려란 명칭은 고려의 시조가 만든 게 아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듬해에 옥저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고구려는 현으로 만들어 이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낙랑군에 소속시켰다. 그래서 현도군에는 고구려, 상은태 그리고 서개마 3현이 있었다. 고구려란 명칭은 기원전 37년 이전에 이미 이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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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한서(82)
왕망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경을 더욱 침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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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삼국사기(1145)
유리왕 31년에 왕망이 우리의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게 되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서울에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의 명칭을 하구려후로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때부터 도적들이 한(漢)의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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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연비가 아니라 추모가 살해되었다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같은 이야기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인물은 달라,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왜곡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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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0037 삼국사기(1145)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 우리 병력이 갑자기 성 밑에 도달한 연후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낙랑왕 최리는 낙랑예후로 보아야 한다.
5908
 
0309(<0200) 일본서기(720)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을 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한 다음, 목을 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두어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신라왕의 처가 재상을 유인하여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재상이 알려 주자, 나라 사람들과 재상을 죽였다. 천황이 이를 듣고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신라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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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0253) 삼국사기(1145)
우로가 왜국의 사신 갈나고를 접대하며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를 듣고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치니 우로가 "내가 당해내겠다"하고 왜군에게로 갔다. 왜인이 잡아서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미추왕 때에 왜국의 대신이 왔는데 우로의 아내가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죽였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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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우로는 신라왕이다
왜가 신라를 침공하여 죽인 인물에 대해 일본서기(720)는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라 하고 삼국사기(1145)는 신라 장수 우로(于老)라 했다. 가라가 포상8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 신라의 원군을 인솔해간 장수를 삼국사기는 태자 우로라 소개해 놓았다. 우로의 아들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굳이 어린 아이를 왕으로 앉힌 이유로는 왕이 급사했고 그 아이가 태자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우로는 신라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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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북제서(636)
以散騎常侍車騎將軍領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麗王成為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王公如故 차기장군 영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려왕 성(양원왕)을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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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북사(659)
齊文宣加成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如故 북제의 문선은 성(양원왕)을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으로 가봉하고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은 그대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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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삼국사기(1145)
北齊封王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髙勾麗王 북제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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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고구려가 아니라 고려다
추모가 세운 왕조는 처음에 고구려 현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 국호도 고구려라 했다. 이후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와 함께 쓰이다 점차 이 고려로 통일되었다. 삼국사기는 중국의 기록을 많이 참고하였는데, 중국의 기록에 고려라 되어있는 것을 모두 고구려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추모가 세운 왕조는 고려라 하고 왕건이 세운 왕조는 왕씨고려로 구별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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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2~0765 삼국사기(1145)
於故髙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 그 다음 동쪽을 삭주, 그 다음 동쪽을 명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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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2~0765¦고려를 한국사에 끼워넣었다
여기서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고려가 망하기 100여년 전부터 신라의 영토였었다. 또 고려가 점유하기 전에는 백제의 영토였었고 그 전에는 마한의 영토였었다. 한성만 놓고 보자면 백제가 도읍한 기간이 500여년에 달하는데 비해, 고려가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왜 고려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강조했을까? 목적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라에서 나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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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 삼국사기(1145)
天復元秊辛酉善宗自稱王 천복 원년 신유에 선종(궁예)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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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 삼국유사(1281)
辛酉称髙䴡 신유년에 (궁예는) 고려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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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궁예는 고려를 세웠다
삼국사기(1145)는 견훤에 대해서 '후백제왕을 칭했다(自稱後百濟王)'고 하면서 궁예에 대해서는 '왕을 칭했다(自稱王)'고만 해 놓았다. 삼국유사(1281)에는 궁예가 '고려를 칭했다(称髙䴡)'고 되어 있어 삼국사기가 의도적으로 고려란 명칭을 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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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갑조정
일본서기의 2주갑인상처럼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도 5주갑인상을 하면 자연스러워지는 경우가 많다.
7508#2487 COMMENT
 
천문현상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현상을 현대 천문학으로 계산해 보면 중국에서 관측되었을 것으로 나온다. 또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현상은 중국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중국 사서의 기록을 옮겨적은 것으로 설명이 된다. 신라는 600여년 뒤인 545년에 가서야 국사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 편찬자는 한국과 중국에서 관측되는 천문현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7508#4116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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