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1945 米軍 > 결과적 식민사학

민족사학을 자처하면서 미군철수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민중들의 민족 정서를 지나간 역사 문제로 쏠리게 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민중들의 관심을 미군철수 자주화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니 결과적 식민사학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주로 쓰는 수법은 역사 기록에서 어색한 부분을 골라 이를 크게 비약시키고 민중들의 민족 정서를 만족시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식민 재야사학이라고 한다.
 
-0221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
진서(648)에 낙랑군 수성현이 진나라 장성이 시작되는 곳(秦築長城之所起)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수나라때 수성으로 개칭한 무수와 한나라의 낙랑군 수성을 혼동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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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요동군 험독현
한서(82)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에 후한말 응소가 조선왕의 옛 도읍(朝鮮王舊都)이라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은 위만 조선의 왕험과 혼동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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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032 낙랑왕 최리
삼국사기(1145)에 고구려와 32년에 혼인 관계를 맺었다가 37년에 병합당했다고 나오는 낙랑왕 최리(樂浪王 崔理)는 30년에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낙랑군에서 떨어져나온 예의 현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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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광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한나라가 44년에 바다를 건너 낙랑을 취하고 살수 이남을 한나라의 군현으로 만들었다(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는 삼국사기(1145)의 기록은, 한나라가 30년에 낙랑군의 반란을 진압하고 통치를 회복했다는 후한서(445)의 기록과 낙랑왕 최리가 37년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는 전래 기록을 잘못 종합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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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 高句麗의 하북 침공
맥인이 49년에 우북평, 어양, 상곡 그리고 태원을 침략하자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는 후한서(445)의 기록은 오환의 일이 맥인의 일로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과 오환, 제융 그리고 맥인의 역사가 혼동되어 발생한 착각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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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 百濟의 요서 점유
송서(488) 등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고 되어 있는데, 당시 창려, 요동 등 평주는 모용부 선비가 차지했고 요서, 북평 등 유주는 단부 선비가 차지했었다. 모용이 요동을 차지하자 단은 요서를 차지했다고 해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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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 요동 철령위
결과적 식민사학자들이 명나라가 요동에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들어 철령이 요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사(1451)에는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영흥만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 강계까지 왔었다고 나와 있다. 철령 이북이 영흥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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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미군철수 자주화
미군철수 자주화를 말하지 않는 민족사학은 결과적 식민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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