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 인근에서 출토된 진(秦 BC221~AD206)의 화상전에 개마무사로 보이는 그림이 확인된다. 삼국시대(220~280)의 벽화와 화상전에는 개마무사가 많이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대동강 유역에 있는 낙랑의 고분 벽화에도 개마 무사가 등장하는데, 이후 이곳을 차지한 고려의 고분 벽화에 그대로 이어졌다. 16국시기(304~439)에는 안라와 신라의 고분에서도 마갑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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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0± Hittite Chariot
가축이 끄는 수레는 기원전 3500년경 Botai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레는 전차로 발전하여 기원전 1274년에 일어난 Kadesh전쟁에 쓰인 것이 확인된다. 전차를 끄는 말에 갑옷을 입히는 것은 기원전 750년경의 Hittite화상석에 나타난다. 전차는 기원후 1세기경부터 전쟁에서 쓰이지 않게 되었으나 말에 갑옷을 입히는 것은 기병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개마무사다.
10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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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0106 Dacian Wars
로마군이 Sarmatians 개마무사들을 격퇴하는 장면이다. 말의 다리에까지 마갑이 씌워져 있는 것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각을 만들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 사건 이후 로마도 개마무사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었다. Sarmatians는 초원의 유목 민족이니 개마무사 또한 초원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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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0~0250 낙랑 고분벽화
지하에 돌로 무덤칸을 만들고 흙을 씌운 외칸으로 된 돌칸흙무덤이다. 동쪽 벽에는 3열로 구성된 개마무사 대열이 형상되어 있다. 무덤의 구조 형식과 벽화의 내용, 그곳에서 나온 유물 등으로 보아 이 무덤이 3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366#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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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246-08) 三國史記(1145)
위(曹魏)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1만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략해왔다. 왕이 보기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위에서 이를 패배시켜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이었다. 또 양맥의 골짜기에서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인이었다. 왕이 철갑기병(鐡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는데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크게 패배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인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기를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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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7 안악 동수묘(佟壽墓)
○ 개마무사가 등장하는 행렬도라는 점에서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의 고분벽화(200~250)를 잇는다.
○ 이 지역은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군현이 된 이후 314년에 고려에 병합되기 전까지 400여년간 중국의 영역이었다.
○ 동수는 燕에서 망명하여 대동강 유역으로 들어온 사람인데, 위만조선 왕조를 세운 위만과 사례가 비슷하다.
11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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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 덕흥리 진묘(鎭墓)
유주자사를 지낸 중국계 진(鎭)의 무덤이다.
개마무사가 등장하는 행렬도는 평양의 낙랑고분(200~250)에 등장한 후 안악의 동수묘(357)를 거쳐 덕흥리의 진묘(408)로 이어졌다.
1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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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0± 통구12호분
집안의 대왕촌에 있다.
친족관계에 있는 2사람의 묘주인이 무덤방을 별도로 하면서 한 무덤 안에 매장된 경우이다.
무덤방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쌓고 그 위에 석회를 입힌 뒤 다시 아교성 물질을 바르고 벽화를 그려 장식하였다.
1366#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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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三國史記(1145)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 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의 모범이 되리라!”고 하였다. 관장이 “예!”라 하고는 갑옷을 입힌 말(甲馬)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달려 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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