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 험독을 사기에 나오는 왕험의 자리에 넣으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조선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도읍이었던 왕험에는 조선현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왕험은 모든 지명에서 사라졌다. 도읍이 지명에서 사라지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응소가 비슷한 이름의 험독을 왕험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
-0108 漢書(82)
稍伇屬真番朝鮮(조선)蠻夷及故燕齊亡在者王之 都王險(왕험)┆左將軍破浿水(패수)上軍乃前至城下┆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열구)當待左將軍┆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왕험)城未下
❶ 위만 조선은 왕험에 도읍을 두고 세워졌다가 위만의 손자에 이르러 왕험성이 함락되며 망했다. 위만 조선이 험독에 도읍한 흔적은 없다.
13841#13854
SIBLINGS
CHILDREN
13854
•
0008 漢書(82)
樂浪郡(낙랑군) 縣二十五 朝鮮(조선) 俨邯 浿水(패수)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열구)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 東暆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❸ 낙랑은 물론 그 현으로 들어간 조선, 패수 그리고 열구 모두 위만 조선이 패망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이것은 낙랑군이 위만 조선이 있던 자리에 설치되었다는 방증이다.
13841#15084
SIBLINGS
CHILDREN
15084
•
0207? 應劭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 만의 옛 도읍이다. 물이 험한 곳에 있다고 해서 험독이라 부른다.
▐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조선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도읍이었던 왕험에는 조선현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왕험은 모든 지명에서 사라졌다. 도읍이 지명에서 사라지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응소가 비슷한 이름의 험독을 왕험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13841#13851
SIBLINGS
CHILDREN
13851
•
0276 진서(648)
우임금 시절을 상고해 보면 기주 지역은 周의 유주가 되었고 漢의 우북평군과 접하였다.
後漢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하였고 그의 아들 강, 강의 아들 문의가 멋대로 요동을 점거하고 동이 9종을 모두 복종시켰다.
曹魏가 동이교위를 양평에 두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을 갈라 평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를 만들었다. 문의가 죽자 나중에 호동이교위를 양평에 두었다.
276년 10월에 평주를 설치하였다.
13841#13848
SIBLINGS
CHILDREN
13848
•
1145 三國史記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왕이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13841#13843
SIBLINGS
CHILDREN
13843
•
1281 삼국유사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새에 와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예전의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차츰 복속시키고 임금이 되어 王儉(李는 땅이름이라 하고 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13841#13844
SIBLINGS
CHILDREN
13844
•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衛滿朝鮮의 도읍지인 王險(『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王儉’으로 表記)의 위치에 대하여『史記集解』에서는 ‘昌黎有險瀆縣也’라는 徐廣의 말을 인용하고,『史記索隱』에서는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는 應劭의 注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條 險瀆의 註에는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日險瀆’이라는 應劭의 견해와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라는 臣瓚의 해석이 附記되어 있다.
王險城의 위치는 古朝鮮이나 衛滿朝鮮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
13841#13840
SIBLINGS
CHILDREN
13840
•
이덕일
이덕일은 1차사료인 한서(82)에 險瀆이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되어 있다며 조선이 險瀆이 있는 요하 유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한서가 편찬되고 100여년이 지난 후에 응소가 붙인 주석이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도읍이었던 王險에 朝鮮縣을 설치하면서 王險이란 지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도읍의 지명이 사라지는 것을 생각못한 응소가 險瀆을 王險으로 착각한 것이다.
13841#31489
SIBLINGS
CHILDREN
314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