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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05 ❰❰ 0392 「三國誤記」
夏五月王薨葬於故國壤號為故國壤王
여름 5월에 왕이 서거하여 고국양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고국양왕이라 하였다.
┆고국양왕은 384년에 즉위하였으니 고국양왕 9년은 392년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永樂五年歲在乙未(영락5년은 395년)와 以六年丙申(6년은 396년)에 의해 광개토왕의 즉위년인 영락 1년은 辛卯年(391년)이다.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없으므로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고국양왕 9년의 기록으로 잘못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7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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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 三國史記(1145)
九年春遣使新羅修好新羅王遣姪實聖為質
9년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사이좋게 지내니 신라 왕이 조카 실성을 보내서 인질로 삼았다.┆三十七年春正月髙句麗遣使王以髙句麗強盛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나물 이사금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죽기 직전의 왕이 한 일로는 어울리지 않고 새 왕이 즉위하여 한 일로 어울린다.
7966#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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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
永樂 5년 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永樂 6년 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永樂 5년이 乙未(395)고 永樂 6년이 丙申(396)이라면 永樂 1년은 辛卯(391)가 되어야 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양왕 9년인 392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어 어긋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없는데, 9년의 기록을 8년 기록의 오기로 보면 앞뒤가 잘 들어맞는다.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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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광개토왕, 장수왕 그리고 청태종
남한산성 아래 한강 이남은 한국의 왕이 외세의 침공에 여러 번 무릎을 꿇은 곳이다.
아신왕은 광개토왕 앞에 무릎을 꿇고 여러 성과 백성을 바쳤으며, 개로왕은 장수왕의 장수에게 잡혀 아차산 아래로 끌려가 처형당했고, 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9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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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2.10 ❰❰ 0413 「三國誤記」
長壽王諱巨連一作璉開土王之元子也體貌魁傑志氣豪邁開土王十八年立爲太子二十二年王薨即位
장수왕은 이름이 거련이다. 연이라고도 한다. 광개토왕의 원자이다.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으며 뜻과 기운이 호걸을 초월하였다. 광개토왕 18년에 책립하여 태자를 삼았고 22년에 왕이 서거하여 즉위하였다.
7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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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송서(488)
高句驪王高璉晋安帝義熙九年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고구려왕 고연(장수왕)이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를 바쳤다. (東晋의) 안제는 고연을 사지절도독 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 송서에 나오는 이 사건을 장수왕 원년의 일로 설정하는 바람에 고국양왕의 사망 및 광개토왕의 즉위와 사망이 1년씩 뒤로 밀린 게 아닐까?
7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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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三國誤記」
(元年→)二年遣長史髙翼入晉奉表獻赭白馬安帝封王髙句麗王(樂安郡公→)樂浪公
2년에 장사 고익을 진에 들여보내 표를 올리고, 붉은 빛이 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가 왕을 봉하여 고구려왕 낙랑공이라 하였다.
┆313년은 장수왕 원년이 아니라 2년이다. 송서(488)에는 樂安郡公이 아니라 樂浪公으로 되어 있다.
7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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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甲寅年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모시었다.
▐ 광개토왕은 辛卯年(391)에 18세로 왕이 되었다가 39세에 죽었으니 죽은 해는 壬子年(412)이다. 甲寅年은 414년이다.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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