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2 이후 미국은 전두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체포에 대한 반발로 폭동이 발생해서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자,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전두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고 그를 반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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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5.21 공수부대 외곽 철수
자정에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공수부대의 외곽 철수를 건의하였다.
이를 수락한 계엄사령관은 오전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오후에 진종채 2군 사령관을 만나 이를 지시하였다.
2군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전남도청을 경비하고 있던 11여단 61, 62, 63대대와 7여단 33, 35대대 1,212명은 저녁에 숙영지인 조선대로 철수했다.
4207#8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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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5.23 2군사령부 재진입 작전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2군사령부는 재진입 작전계획을 짰다. 23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의 이 계획을 건의했다. 이때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비롯해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참석했다. 그러나 24일 오전 2시 실시될 예정이었던 이 작전은 미국의 요청으로 국방부장관이 지침을 내려 25일 오전 2시 이후로 연기하였다.
4207#9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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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허구가 무너지고 있다
1980년대에 학생들을 자극했던 광주□□ 이야기는 대부분 거짓으로 드러났다.
미국배후설을 믿고 미국을 공격하던 학생들은 지금 집권 세력이 되어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사대역적이 되었고 전두환개입설을 믿고 30여년간 증거를 찾던 사람들은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자 사과 또는 자백을 받아 그것을 입증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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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6.17 전두환
미상공회의소 간부들이 6월 4일에 전두환과 만찬을 하고 6월 13일에 미대사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광주에 대해 질문을 받자, 전두환은 열을 내며 길게 설명했다. 그는 김대중이 무리를 조종하여 혼란을 일으킨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에서 사망자가 나온 것은 김대중에게 책임이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22구의 시신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모두 조선의 간첩일 수 있다고도 말했다.
4207#20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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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02.02 미군철수 철회
1979년에 미국은 대만주둔 미군을 철수시킨 데 이어 주한미군도 철수시키려 했으나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1981년까지 연기했다. 그러나 1981년에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전두환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해 미군 철수를 철회했다. 1979년과 1981년 사이에 광주□□가 있었다. 이때 주한미군이 없었다면 한국은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 1975년에 월남이 공산화되는 등 당시까지도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4207#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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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03.18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최인순, 김은숙, 문부식, 김현장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저지른 사건으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동아대학교 재학생 장덕술(당시 22세)이 사망했고, 역시 동아대학교 학생 김미숙, 허길숙 외 3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유인물에는, '미국은 더 이상 남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민주주의를 원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4207#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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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유엔본부에서 미국 책임론 공방
브루스 커밍스는 광주□□때 한국 정부를 지지했던 미국을 비판하였다.
▐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미국이 이북에 투하한 폭탄은 63만5천t으로, 2차대전 때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한 50만3천t보다 많았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 18개 도시는 최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등 북한의 도시와 마을이 40∼90%까지 파괴된 것으로 추산했다.
4207#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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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9 Wickham ⪢⪢
And I would also have been calling for assistance to suppress the unrest and if more thing to a bigger thing we would have been much more aggressive in dealing with it.
"또한 나는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지원도 요청했을 것이다. 만일 더 큰 사태가 벌어졌다면 더 공격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4207#6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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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7 미국대사 광주방문 항의
"80년 5월 당시 미국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작전통제권을 활용해 공수부대의 광주 투입을 승인했고, 이는 1990년대 미국 팀 셔록 기자의 취재로 밝혀진 사실"
▐ 공수부대의 이동은 미국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 공수부대는 지역을 방어하는 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인민군과의 전력균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원했던 것은 군대를 동원해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4207#5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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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8 김용장/허장환
김용장, "광주항쟁 3~4일 전, 광주에 있던 미국인 시민권자 전부를 대피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미 국방성의 지시였다. 대피 명령이 나온 건 광주뿐이었다. 미국은 광주항쟁 발발 이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장환, "광주에 20사단이 투입된다. 20사단 병력 이동은 협정 규정상 미국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외교적으로 어떠한 제재도 없었다. 방관한 것이다."
4207#5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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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광주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는데?
거짓말이다. 미국은 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내려보낸 공수부대가 사람을 마구 구타하고 짓밟는 등 매우 공격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전두환 신군부가 소요사태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를 동원했을 당시, 미국은 여기에 반대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 1980년에 공수부대가 투입된 곳은 서울, 대전, 전주 그리고 광주였다. 그런데 소요사태가 발생한 곳은 광주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공수부대 투입이 문제인가, 광주가 문제인가?
4207#4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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