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한 가라와 신라는 고고학적 양상이 백제나 고려과는 이질적이고 초원과 닮은 점이 있다. 금동관, 적석목곽분 그리고 순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 두 나라를 초원에서 흘러온 세력이 세운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중국에서 대동강 유역을 거쳐 낙동강 유역으로 유민이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초원에서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따라서 고고학적 양상은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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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길
유라시아 초원은 서쪽으로 헝가리 평원에서부터 동쪽으로 만주 평원까지 이어져 있다. 초원은 말을 타기 시작한 인류에게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였다.
초원길은 유목 문화 뿐만 아니라 로마의 문화도 한국에 전해 주었지만 이 길을 통해 초원의 주민이 한국으로 이동해 온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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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7~0370 前燕
가라와 신라에 금동관, 적석목곽분, 순장 등이 성행하던 시기에 초원길 끝에는 선비족이 있었다.
모용 선비는 前燕(0337~0370), 後燕(0384~0407) 그리고 北燕(0407~0436)으로 이어가며 요서 지역을 차지하였고 탁발 선비는 北魏(0386~0534)를 세워 모용 선비에 이어 요서 지역을 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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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
나뭇가지라는 동일한 기원에서 나왔고 서로 인접한 나라에서 만들어졌지만 고려-백제-마한과 가라-신라에서 만든 금동관은 확연하게 다르다. 고려-백제-마한은 비단길을 지나며 모양이 세련되어진 금동관을 도입하였고 가라-신라는 투박한 모양의 금동관을 가지고 있었다. 가라-신라의 금동관은 다른 지역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모양이라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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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인물형 토기에는 청동솥이 실려있다?
위의 왼쪽 사진은 신라의 기마인물형 토기이다. 흔히 말등에 북방 유목민들이 애용하던 청동솥이 실려있는 형상이라고 말해왔다.
위의 가운데 사진 역시 신라의 서수형 토기이다. 이 토기는 주전자처럼 사용된 것으로 술이나 물을 채워넣을 입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계룡의 등에 주입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으로 기마인물형 토기의 등에 돌출되어 있는 구조물도 청동솥이 아니라 술이나 물을 채워넣는 부분이라고 설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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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지정학
서라벌은 서쪽으로는 낙동강 물길에서 금호강을 따라 올라온 길과 만나고, 북쪽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거나 영일만에서 형산강을 따라 올라온 길과 만나며, 동남쪽으로는 태화강을 따라 내려가 울산만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가지산 동쪽의 지구대를 따라 내려가 낙동강 하구에 이르러 남해와 연결된다.
서라벌은 외부의 영향이 미치기 어려운 외진 곳이지만 이러한 길을 통해 낙랑, 가라, 예 그리고 왜와 골고루 교류하였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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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
가라와 신라 지역에서 3세기 말부터 6세기 전엽까지 만들어진 고분에서 순장이 확인된다. 출현은 대형 목곽묘가 만들어지던 시기와 일치하며 소멸은 가라가 망할 때 즈음이다.
순장 고분은 초원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초원에서 이들 지역으로 주민이 이동해 온 흔적이 없다.
또 기록상으로는 부여, 고려 그리고 왜에도 순장이 있었다.
따라서 가라와 신라의 순장은 문화의 전파나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2~3백여년 유행하고 사라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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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
역사 기록에는 중국, 특히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유민이 흘러가고 또 조선에서 진한으로 유민이 흘러간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온다. 조선이 낙랑이 된 이후에도, 그리고 진한이 신라가 된 이후에도, 이러한 사례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초원에서 가라나 신라 지역으로 유민이 흘러갔다는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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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석목곽분
돌무지덧널무덤은 구덩이나 땅 위에 나무로 덧널을 만들고, 그 안에 피장자와 껴묻거리 그리고 순장자를 안치한 다음, 그 위에 돌무지를 쌓고, 또 그 위에 봉토를 덮어 만든 무덤이다. 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경주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초원의 Kurgan과 구조가 비슷하나 축조 연대가 800여년 차이가 나므로 연결짓기가 어렵다.
덧널, 돌무지, 봉토 등의 요소가 결합하여 신라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져 유행하다 사라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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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의 견해
새로운 발굴은 의외의 고고학적 양상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이때 강한 자극을 받은 학자들은 그것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문화의 전파를 주민의 이동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양상을 근거로, 흉노 유민이 신라를 세웠다거나 부여 유민이 남가라를 세웠다거나 또는 기마 민족이 왜 왕조를 세웠다거나 하는 주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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