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295 漢水┆漢城┆漢山

漢江의 남쪽 가에 있는 풍납토성은 漢나라 진번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漢水, 漢城 그리고 漢山의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한수는 한강으로 명칭이 변했고 한산은 남한산으로 변했으며 북한산으로 불리던 산은 지금 아차산으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0018 慰禮城
1905#4257 SIBLINGS CHILDREN 4257
 
0295 漢城
1905#30677 SIBLINGS CHILDREN 30677
 
0475 ⁺ 漢山┆南川(南買)┆北漢山(平襄)
1905#30678 SIBLINGS CHILDREN 30678
 
0553 新州
1905#30679 SIBLINGS CHILDREN 30679
 
0557 北漢山州
1905#30680 SIBLINGS CHILDREN 30680
 
0568 南川州
1905#30681 SIBLINGS CHILDREN 30681
 
0604 北漢山州
1905#30682 SIBLINGS CHILDREN 30682
 
0757 漢州
1905#30683 SIBLINGS CHILDREN 30683
 
 東北亞 古代史 槪念圖
東北亞 古代史 槪念圖
1905#1895 SIBLINGS CHILDREN COMMENT 1895
 
-0018 「三國誤記」 百濟
비류는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로 돌아가 살았고 온조는 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그 후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百濟로 고쳤다.
1905#41265 SIBLINGS CHILDREN COMMENT 41265
 
-0018 古典記
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温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夲扶餘 至慰礼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고전기를 살펴보니,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였다.
1905#1876 SIBLINGS CHILDREN COMMENT 1876
 
0245 三國志(289) 馬韓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1905#30672 SIBLINGS CHILDREN 30672
 
0245 이후 三國誤記 三國志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마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마한 8국은 진번군이 폐지될 때 낙랑군으로 합쳐지지 않고 남은 8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이 자리에 세워졌었다.
1905#4298 SIBLINGS CHILDREN COMMENT 4298
 
0290.02 ❰❰ -0011 三國誤記 百濟
靺鞨²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1905#30671 SIBLINGS CHILDREN 30671
 
0290.07 ❰❰ -0011 三國誤記 百濟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 樂浪²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이로 말미암아 樂浪²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1905#4263 SIBLINGS CHILDREN 4263
 
0292 ❰❰ -000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靑木山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烽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1905#13494 SIBLINGS CHILDREN 13494
 
0293 ❰❰ -0008 04 三國誤記 百濟
樂浪²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905#13496 SIBLINGS CHILDREN 13496
 
0293 ❰❰ -0008 07 三國誤記 百濟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樂浪²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1905#13495 SIBLINGS CHILDREN 13495
 
0295.05 ⁻ ❰❰ -0018 「三國誤記」 百濟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冝乎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고,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않겠나?”라고 하였다.
1905#13465 SIBLINGS CHILDREN 13465
 
0295.05 ⁻ ◾遂至漢山 登負兒嶽
漢山은 남한산이고 負兒嶽은 북한산이므로 성립할 수 없는 표현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漢山은 일대 지명을 말하는 것으로 至漢山은 至漢水와 비슷한 뜻인 듯하다. 고구려에서 나와 한국으로 올 때의 이야기에서 필요했던 구절로, 위례성에서 나와 순례하는 이야기에서라면 필요없는 구절이다.
1905#1901 SIBLINGS CHILDREN OPEN
 
0295.05 ❰❰ -0006 三國誤記 百濟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東有樂浪 北有靺鞨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漢水之南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1905#13497 SIBLINGS CHILDREN 13497
 
0295.05 ◾北有靺鞨
철원에 있었던 이름모를 소국으로 추정된다.
1905#1871 SIBLINGS CHILDREN 1871
 
0295.05 ◾東有樂浪
춘천에 있었던 樂浪郡의 부용국이었던 듯하다.
1905#4264 SIBLINGS CHILDREN 4264
 
0295.05 @한수(漢水) @한성(漢城) @한산(漢山) @위례성(慰禮城)
0295.05 @한수(漢水) @한성(漢城) @한산(漢山) @위례성(慰禮城)
서울 송파는 북쪽으로는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남한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탄천변의 벌판을 바라본다. 다만 서쪽으로 황해가 조금 떨어져 있으나 그 사이에는 적대 세력이 살만한 공간이 없다. 이곳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자주 변경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없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묘사는 백제가 한수 이북 위례성에서 한수 이남으로 도읍을 옮길 때 했을 것으로 적당하다.
1905#578 SIBLINGS CHILDREN COMMENT 578
 
0295.07 ❰❰ -0006 三國誤記 百濟
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戸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
1905#1920 SIBLINGS CHILDREN 1920
 
0295.08 ❰❰ -0006 三國誤記 百濟
遣使馬韓 告遷都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으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1905#13498 SIBLINGS CHILDREN 13498
 
0343 고려의 평양 천도
0343 고려의 평양 천도
서쪽으로부터 거듭된 침공을 받아 도읍이 망가지자 고려는 평양 동쪽에 있는 황성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백제와 싸우기 시작했다.
1905#5503 SIBLINGS CHILDREN COMMENT 5503
 
0371 古典記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髙句麗南平壤 都漢城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 ▐ -18년으로부터 389년이 지난 후는 371년이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으로 보아 이 해에 백제가 공격한 곳은 한강변의 남평양이 아니라 대동강변의 평양이 어울린다. 또 백제가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이 기록은 당시의 정황과 맞지 않는다.
1905#4267 SIBLINGS CHILDREN COMMENT 4267
 
0371.10 三國史記(1145) 高句麗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백제 개로왕이 위에 표를 보내어 말하기를, “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라고 하였는데 지나친 말이다.)
1905#1869 SIBLINGS CHILDREN COMMENT 1869
 
0371.10 ꜛ 三國史記(1145) 百濟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髙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겨울에 왕이 태자와 정예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 왕 사유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1905#1906 SIBLINGS CHILDREN 1906
 
0371.10 「三國誤記」 百濟
移都漢山✘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 古典記의 取髙句麗南平壤都漢城(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과 이 해에 있었던 백제의 평양성 침공을 연결하여 만든 이야기인 듯하다. 그러나 이전에 就漢山下立柵移慰禮城民戸(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라고 하여 이미 漢山下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이 기록은 잘못되었다.
1905#1912 SIBLINGS CHILDREN COMMENT 1912
 
0396 廣開土王陵碑(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阿旦城(阿且城이라고도 표기되어졌는데 서울의 광나루 북쪽 기슭에 있는 峨嵯山城으로 비정된다.) ... 백잔이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가 곤핍해져, 남녀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
1905#4256 SIBLINGS CHILDREN COMMENT 4256
 
0475 古典記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髙句麗南平壤 都漢城 105년을 지나 22세 문주왕에 이르러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 371년으로부터 105년이 지난 후는 475년이다.
1905#1907 SIBLINGS CHILDREN 1907
 
0475.0561 百濟의 남하
0475.0561 百濟의 남하
1905#5499 SIBLINGS CHILDREN COMMENT 5499
 
0475.09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漢城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개로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阿且城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1905#1911 SIBLINGS CHILDREN COMMENT 1911
 
0551 高句麗 漢山州
漢山 → 漢州 → 廣州
1905#30676 SIBLINGS CHILDREN 30676
 
0551 高句麗 漢山州
南川(南買) → 黃武 → 利川
1905#5500 SIBLINGS CHILDREN 5500
 
0551 高句麗 漢山州
1905#5501 SIBLINGS CHILDREN 5501
 
0551 高句麗 漢山州
北漢山郡(一云平襄)┆骨衣内縣┆王逢縣(一云皆伯 漢氏羙女 迎安臧王之地 故名王逢)
1905#5508 SIBLINGS CHILDREN 5508
 
0551 高句麗 漢山州 北漢山郡
1905#9518 SIBLINGS CHILDREN 9518
 
0551 日本書紀(720)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³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³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平壤을 대동강 유역의 平壤²으로 보기에는 정황상 무리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서울 광진구에 있었던 平壤³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1905#5510 SIBLINGS CHILDREN COMMENT 5510
 
0551 三國史記(1145)
진흥왕이 거칠부 및 대각찬 구진, 각찬 비태, 잡찬 탐지, 잡찬 비서, 파진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대아찬 비차부, 아찬 미진부 등 여덟 장군에게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平壤³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거칠부 등은 승리를 틈타서 죽령 바깥, 고현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1905#1880 SIBLINGS CHILDREN COMMENT 1880
 
0551 三國史記(1145)
진흥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서 10개의 郡을 빼앗았다.
1905#1879 SIBLINGS CHILDREN COMMENT 1879
 
0551 日本書紀(720)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平壤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1905#1874 SIBLINGS CHILDREN COMMENT 1874
 
0552_ 日本書紀(720)
백제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1905#1875 SIBLINGS CHILDREN COMMENT 1875
 
0553.07 三國誤記 新羅
取百濟東北鄙置(新興→)❶新州以阿湌武力爲軍主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여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1905#5497 SIBLINGS CHILDREN 5497
 
0555.10 三國史記(1145)
진흥왕이 北漢山에 순행하여 강역을 넓혀 정하였다.
1905#1909 SIBLINGS CHILDREN COMMENT 1909
 
0557 三國史記(1145)
新州를 폐지하고 ❷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1905#1910 SIBLINGS CHILDREN COMMENT 1910
 
0561 창녕新羅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漢城軍主
1905#1902 SIBLINGS CHILDREN COMMENT 1902
 
0568 북한산新羅진흥왕순수비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문 중에 ‘南川軍主’란 표현을 단서로 하여 568년 10월 이후로 본다. 한편 일부 학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영토로 차지한 후인 555년에 북한산을 순행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555년에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비문의 일부를 '路過漢城'으로 판독하는 학자도 있다.
1905#38056 SIBLINGS CHILDREN COMMENT 38056
 
0568.10 三國史記(1145)
北漢山州를 폐지하고 ❸南川州를 설치하였다.
1905#1893 SIBLINGS CHILDREN COMMENT 1893
 
0603.08 三國史記(1145)
영양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 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 진평왕이 병력을 이끌고 漢水를 건너오니, 성안에서는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이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어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퇴각하였다.
1905#1890 SIBLINGS CHILDREN COMMENT 1890
 
0604 三國史記(1145)
南川州를 폐지하고 ❹北漢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1905#1889 SIBLINGS CHILDREN COMMENT 1889
 
0661.05.09 三國史記(1145)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의 장군 생해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北漢山城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1905#1924 SIBLINGS CHILDREN 1924
 
0667.10.02 三國史記(1145)
영공이 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 촌주 대나마 강심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 기병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을 거쳐 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1905#1868 SIBLINGS CHILDREN COMMENT 1868
 
0668 高句麗 漢山州
漢城郡은 漢忽이라고도 하고 息城이라고도 하고 乃忽이라고도 한다.
1905#4311 SIBLINGS CHILDREN COMMENT 4311
 
0757    九州五小京
0757 九州五小京
1905#30684 SIBLINGS CHILDREN 30684
 
0757 九州五小京 漢州
於故髙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 그 다음 동쪽을 삭주, 그 다음 동쪽을 명주라고 말한다. ▐ 이 지역은 고려가 망하기 100여년 전부터 신라의 영토였었다. 또 고려가 점유하기 전에는 백제의 영토였었고 그 전에는 마한의 영토였었다. 한성만 놓고 보자면 백제가 도읍한 기간이 500여년에 달하는데 비해, 고려가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1905#4458 SIBLINGS CHILDREN COMMENT 4458
 
0757 九州五小京 漢州
漢山郡 → 漢州 → 廣州 ┆漢州 夲髙句麗漢山郡 新羅取之 景徳王改爲漢州 今廣州
1905#30675 SIBLINGS CHILDREN 30675
 
0757 九州五小京 漢州
南川縣(南買) → 黃武縣 → 利川縣 ┆黃武縣 本髙句麗南川縣 新羅并之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徳王改名 今利川縣
1905#5504 SIBLINGS CHILDREN 5504
 
0757 九州五小京 漢州
1905#5505 SIBLINGS CHILDREN 5505
 
0757 九州五小京 漢州
骨衣奴縣 ➔ 荒壤縣 → 豐壤縣┆荒壤縣 夲髙句麗骨衣奴縣 景徳王改名 今豐壤縣
1905#7509 SIBLINGS CHILDREN 7509
 
0757 九州五小京 漢州
皆伯縣 ➔ 遇王縣 → 幸州┆遇王縣 本髙句麗皆伯縣 景徳王改名 今幸州
1905#21948 SIBLINGS CHILDREN 21948
 
0757 九州五小京 漢州
北漢山郡 ➔ 漢陽郡 → 楊州舊墟┆漢陽郡 夲髙句麗北漢山郡(一云平壤)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徳王改名 今楊州舊墟
1905#30674 SIBLINGS CHILDREN 30674
 
0757 九州五小京 漢州 漢陽郡
1905#30673 SIBLINGS CHILDREN 30673
 
0825.01 三國史記(1145)
春正月 憲昌子梵文與髙逹山賊夀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³ 攻北漢山州 都督聦明率兵 捕殺之 平壤³今楊州也 太祖製□義寺齋文 有高麗舊壤平壤³名山之句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 산적 수신 등 1백여 명과 반역을 모의하고 평양³에 수도를 세우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하니, 도독 총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를 잡아 죽였다. 평양³은 지금의 양주이다. 왕건이 지은 장의사 제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³의 명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1905#1896 SIBLINGS CHILDREN COMMENT 1896
 
1145 三國史記 漢水(13)
1905#30718 SIBLINGS CHILDREN 30718
 
1145 三國史記 漢江(6)
漢水와 漢江이 구별되지 않는다.
1905#30717 SIBLINGS CHILDREN 30717
 
1451 高麗史
남경유수관 양주는 본래 고구려의 北漢山郡(南平壤城이라고도 한다)으로 백제의 근초고왕이 차지하였다. 근초고왕 25년에 南漢山에서 도읍을 옮겼다. 개로왕 20년에 이르러 고구려 자비왕이 쳐들어와서 漢城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나와 도망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그 해 아들 문주왕이 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뒤에 신라 진흥왕 15년에 北漢山城으로 와서 국경을 정하였다. 진흥왕 17년에 北漢山州를 창설하고 軍主를 두었다. 경덕왕 14년에 漢陽郡으로 고쳤다
1905#1855 SIBLINGS CHILDREN COMMENT 1855
 
1451 高麗史
長漢城은 신라의 국경인 漢山의 북쪽, 漢江 가에 있었다. 신라가 重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고구려에게 점거되자 신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그 성을 다시 찾고, 이 노래를 지어 그 공로를 기념하였다.
1905#1894 SIBLINGS CHILDREN COMMENT 1894
 
1451 高麗史
1067년에 승격시켜 南京留守官이 되었는데, 근처 고을의 백성을 이주시켜 채웠다. 숙종 원년(1096)에 위위승동정 김위제가 도선밀기에 의거하여 南京으로 천도할 것을 요청하면서 양주에 木覓壤이 있어 도성을 세울 만하다고 말하였다.
1905#1921 SIBLINGS CHILDREN COMMENT 1921
 
1451 高麗史
三角山(新羅稱負兒嶽) 漢江(卽沙平渡) 楊津(新羅時 北瀆漢山河 躋中祀) 삼각산(신라에서는 부아악이라 불렀다) 한강(곧 사평도다) 양진(신라 때의 북독인 한산하로서 중사에 올라 있었다.)
1905#1922 SIBLINGS CHILDREN COMMENT 1922
 
1856~1861 東輿圖 고양주
1905#21961 SIBLINGS CHILDREN 21961
 
2016 아차산성 발굴
1990년대 두 차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漢, 北漢, 國, 官 등의 명문 자료와 함께 이번에 山城, 北漢山城이라고 쓰여진 기와가 처음으로 출토됐다. 신라가 아차산성을 점유한 후 북한산성으로 부르며 운영해 왔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명문자료다.
1905#1919 SIBLINGS CHILDREN COMMENT 1919
 
@중랑천
중랑천은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으로 내려오는 통로의 역할을 했다. 그 끝에 아차산이 있고 거기서 양나루를 건너면 풍납토성이다.
1905#9517 SIBLINGS CHILDREN COMMENT 9517
 
@풍납토성
1905#1238 SIBLINGS CHILDREN 1238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漢水·漢城·漢山 고찰
백제는 '북쪽으로는 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힌'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고려는 백제의 漢城을 함락시킨 뒤 漢山 남쪽에 漢山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얼마못가 이곳은 신라가 차지하는데 경덕왕은 이곳을 漢州로 바꾸었다. 그전에 고려는 漢水 이북을 차지하고 北漢山郡을 설치하였는데 신라는 이를 北漢山州로 바꾸었다. 이러한 명칭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 ...
1905#4266 SIBLINGS CHILDREN COMMENT 4266
 
낙랑토성
성 안에서는 집터·관청·도로·하수도 등의 자취가 발굴되었고, 유물로는 막새기와·벽돌·封泥·거울·화폐와 화폐를 주조하였던 틀, 구리화살촉·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글자가 새겨진 기와·벽돌·거울·도장 등이 많이 나왔다.
1905#5513 SIBLINGS CHILDREN COMMENT 5513
 
아차산성 장대지
아차산성 장대지
1905#6200 SIBLINGS CHILDREN COMMENT 6200
 
중국계 토성
중국계 토성은 중원지방으로부터 중국세력이 동북지방으로 뻗어나감에 따라 요동·만주지방에서 그들의 지방행정 중심지의 관아가 있는 치소에 만들어졌다. 대부분 벌판 가운데 위치하며 부근에 강이 흐르고 전망이 좋은 그리 높지 않은 둔덕에 자리잡고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형이다.
1905#5506 SIBLINGS CHILDREN COMMENT 5506
 
풍납토성
중국에서 신석기시대 이래 사용된 토루 축조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출토된 목탄 12점에 대해 방사성탄소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그 중심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 BC 199년으로 나왔고 가장 늦은 것은 AD 231년으로 나왔다.
1905#5514 SIBLINGS CHILDREN COMMENT 5514
 
한양이란 이름의 비밀
신라의 북독은 양나루인 漢山河(한산하)였고, 동독은 영일군의 곡강천 또는 형산강 하류로 추정되는 吐只河(토지하), 남독은 양산군 낙동강가의 가야나루에 있었던 黃山河(황산하), 서독은 공주의 금강에 있었던 熊津河(웅진하)였다.
1905#4293 SIBLINGS CHILDREN COMMENT 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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