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遼黑史 > 1115~1234 金 > 0886? 金祖宗 > ⑨ 金主九代祖

1156 松漠紀聞 → 龕福(감복) ┆ 1174~1244 九朝編年備要 ┆ 1194 三朝北盟會編 → 掯浦(긍포) ┆ 1202 建炎以來朝野雜記 → 指蒲(지포) ┆ 1208 建炎以來繫年要錄 → 堪布(감포) ┆ 1317 文獻通考 ┆ 1344 金史 → 函普(함보) ┆ 1451 高麗史 → 今俊·金克守(금준·김극수)
 
0779 高震 墓誌銘
고려 보장왕은 당나라로 귀화하여 아들과 손자 고진에 이르기까지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그러나 고진의 묘지명에는 고진을 渤海人으로 표기해 놓았다. 100여년 전에 고려는 사라졌고 당시 그 자리에는 발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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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松漠紀聞(宋 洪皓)
女真酋長乃新羅人 號完顏氏 完顏猶漢言王也 女真以其練事 後隨以首領讓之 兄弟三人 一為熟女真酋長 號萬戶 其一適他國 完顏年六十餘 女真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即胡來也 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姪阿骨打之弟謚曰文烈者為子 其後楊哥生子闥辣 乃令文烈歸宗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 하였다. 완안은 중국말로 왕과 같다. 여진이 그가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므로 수령을 양보하고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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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松漠紀聞(宋 洪皓)
형제가 세 명인데 한 명은 숙여진의 추장이 되어 만호라 칭하였다. 또 한 사람은 타국으로 갔다. 완안이 60여 세였는데 여진 여자로써 처를 삼았는데 역시 60여 세였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장자가 곧 호래다. 이로부터 세 사람이 이었는데 양가 태사에 이르러 자식이 없어 그 조카 아골타의 동생이고 시호가 문열이란 자를 아들로 삼았다. 그 후 양가가 아들 달랄을 낳자 문열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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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松漠紀聞(宋 洪皓)
▐ 금시조와 호래 사이에 4대가 빠져있다. 반도에서 신라가 고려로 교체되어 사라지고 난 뒤 2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반도에서 온 옛 사람을 신라인이라 한 것을 보면 그가 반도를 떠난 시기는 신라 때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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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松漠紀聞(宋 洪皓)
金主九代祖名龕福(감복) 追謚景元皇帝 號始祖 配曰明懿皇后 ▐ 여기서 9대조는 금태조의 손자로부터 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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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4~1244 九朝編年備要(南宋 陳均)
女真其初部族本新羅人號完顏氏完顏猶漢呂王 여진은 그 처음 부족이 본래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의 추는 중국말로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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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 三朝北盟會編(南宋 徐夢莘) 1
神麓記曰 女真始祖掯浦(긍포) 出自新羅奔至阿觸胡(아촉호) 無所歸遂依完顏 因而氏焉 신록기에서 말하길, 여진의 시조 긍포는 신라에서 도망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는데 돌아갈 곳이 없어 완안에 의지하여 그것이 성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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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 三朝北盟會編(南宋 徐夢莘) 2
六十未娶 是時酋豪以强陵弱無所制度 掯浦劈木為剋如文契約 教人舉債生息勤於耕種者遂致巨富 若遇盜竊雞豚狗馬者 以桎梏拘械用柳條笞撻外賠償七倍法令嚴峻果斷不私由 是達近皆伏號為神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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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 三朝北盟會編(南宋 徐夢莘) 2
60이 되도록 아내를 얻지 못하였다. 이때 이곳은 센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여 법이 없었다. 긍포가 나무를 쪼개 문서처럼 사용하고 사람들을 가르쳐 빚을 내어주고 이자를 받게 하였으며 열심히 들에 씨를 뿌리게 하여 마침내 부자가 되게 하였다. 만약 닭, 돼지, 개, 말을 훔치다가 걸리면 쇠고랑과 차꼬를 채워 형틀에 묶고 버드나무 가지로 때렸으며, 훔친 물건의 7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그러자 주변이 모두 복종하였으며 그를 신명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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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 三朝北盟會編(南宋 徐夢莘) 3
有隣寨鼻察異酋長 姓結徒姑丹小名聖貨者 有室女年四十餘尚未婚 遂以牛馬財用農作之具嫁之於掯浦 後女眞眾酋結盟推為首領 인근 마을 비찰이 추장의 성은 결도고단이고 어릴 적 이름은 성화였는데 40여 세의 미혼인 딸이 있었다. 마침내 소와 말 등의 농사의 기구를 재물로 삼아 긍포에게 시집가게 하였다. 후에 여진의 추장 무리들이 결맹하여 긍포를 추대하고 수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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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建炎以來朝野雜記
完顏之始祖指蒲(지포)者新羅人自新羅奔女真女真諸酋推為首領 완안의 시조 지포는 신라인인데, 신라에서 여진으로 도망가자 여진의 여러 추장이 수령으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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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 建炎以來繫年要錄
苗耀神麓記云 女真始祖堪布(감포) 出自新羅 奔至安春(안춘) 無所歸 遂依完顏 因而氏焉 後女真眾人結盟 推為首領 묘요신록기에는 여진의 시조가 감포인데 신라에서 도망나와 안춘에 이르렀으나 갈 곳이 없어 완안에 의탁하고 이로써 성씨를 삼았다고 되어 있다. 뒤에 여진인들이 수령으로 추대하였다. ▐ 신록기는 송막기문(1156)과 출처가 달라보이는데 이 신록기를 통해서도 금시조가 신라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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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7 文獻通考(元 馬端臨)
又云其酋本新羅人號完顏氏猶漢言王也 또 그 추장은 원래 신라인인데 완안씨라 불렀다. 한자음으로 왕과 같다. 龕福(감복) - 訛魯(와로) - 洋海(양해) - 隨闊(수활) - 實魯(실로) - 胡來(호래)... 호래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核裏頗(핵리파)이고 둘째는 蒲刺束(포자속)이고 셋째는 楊割(양할)이다. 핵리파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吳刺東(오자속)이고 둘째는 阿骨打(아골타)이고 셋째는 吳乞買(오걸매)이고 넷째는 撒(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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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1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 兄阿古迺好佛 留高麗不肯從曰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顏部僕乾水之涯 保活里居耶懶 금시조는 이름이 함보인데 고려에서 나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형은 아고내인데 불교를 좋아해서 따라오지 않고 고려에 남으며 말하길 "후손들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니 나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우인 보활리만 데리고 왔다. 시조는 완안부 복간수 물가에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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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1
▐ 금시조에 대해 송막기문(1156) 이후 금사(1344) 이전의 모든 기록에 신라인으로 기술되어 있다. 금사가 편찬될 당시는 신라가 고려로 바뀐지 매우 오래 되었으므로 신라를 고려로 바꾸어 기술한 듯하다. 이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손자 묘지명에 그를 발해인으로 기록한 것과 유사하다. 보장왕 손자의 묘지명은 고려가 망하고 발해가 세워진 지 100여년이나 지난 후였다. 僕乾水는 현재의 牡丹江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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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2
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 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蓋自謂阿古乃之後 石土門迪古乃 保活里之裔也 그후 호십문이 갈소관을 들어 태조에게 귀부하며 그 조상 형제 3인이 서로 떨어져 나갔다고 말했으니, 아고내의 후손임을 자처한 것이다. 석토문과 적고내는 보활리의 후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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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3
及太祖敗遼兵于境上 獲耶律謝十 乃使梁福斡荅刺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아골타가 국경에서 요나라 병사를 깨뜨릴 때 야율사십을 사로잡았는데, 양복과 알답자로 하여금 발해인을 회유하며,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물길의 7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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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4
始祖至完顏部 居久之 其部人嘗殺它族之人 由是兩族交惡 哄鬥不能解 完顏部人謂始祖曰 若能為部人解此怨 使兩族不相殺 部有賢女 年六十而未嫁 當以相配 仍為同部 始祖曰 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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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4
시조가 완안부에 이르러 오래 머물렀는데, 그곳 사람이 다른 부족 사람을 죽여 양 부족간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완안부 사람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이 부족간 원한을 풀어 서로 싸우지 않게 해 주면 부족에 사는 60된 노처녀를 짝지어 주고 부족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겠다고 하자, 시조가 응했다. ▐ 금시조는 3남매를 두었는데 60세 부인과 결혼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삼조북맹회편에 나오는 40세가 더 자연스럽다. 금시조의 나이와 혼동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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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5
乃自往諭之曰 殺一人而鬥不解 損傷益多 曷若止誅首亂者一人 部內以物納償汝 可以無鬥 而且獲利焉 怨家從之 乃為約曰 凡有殺傷人者 徵其家人口一 馬十偶 牸牛十 黃金六兩 與所殺傷之家 即兩解 不得私斗 曰 謹如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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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1344 金史(元 脫脫) 5
시조가 가서 "사람을 죽인 일로 시작된 싸움이 끝이 없어 피해가 너무 크다. 싸움의 원인이 된 사람을 응징하고 재물로 보상을 받은 뒤 싸움을 멈추면 좋지 않겠는가?"고 하자 피해 집안에서 이에 응했다. 시조가 "말 10마리와 암소 10마리 그리고 황금 6량으로 보상하고 그 집안 사람 한 명을 데려가 피해를 당한 사람 집에서 부리게 하겠다. 삼가 약속 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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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6
女直之俗 殺人償馬牛三十 自此始 既備償如約 部眾信服之 謝以青牛一 并許歸六十之婦 始祖乃以青牛為聘禮而納之 并得其貲產 後生二男 長曰烏魯 次曰斡魯 一女曰注思板 遂為完顏部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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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6
여진의 풍속에 사람을 죽일 경우 말과 소 30마리로 갚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의 약속대로 보상이 이루어지자 부족 사람들이 믿고 따르며 푸른 소 한 마리를 사례하고 60세 신부와의 혼인도 허락하였다. 시조는 이 푸른 소를 혼례품으로 받아 들이며 자산을 획득하였다. 후에 두 아들이 나자 장자는 오로라 부르고 차자는 알로라 불렀으며 딸 하나는 주사판이라 불렀다. 드디어 시조가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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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7
天會十四年 追謚景元皇帝 廟號始祖 皇統四年 號其藏曰光陵 五年 增謚始祖懿憲景元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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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8
吾遠祖兄弟三人 同出高麗 今大聖皇帝之祖入女直 吾祖留高麗 自高麗歸于遼 吾與皇帝皆三祖之後 皇帝受命即大位 遼之敗亡有征 吾豈能為永昌之臣哉 始祖兄阿古乃留高麗中 胡十門自言如此 蓋自謂阿古乃之後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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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8
"우리 먼 조상은 삼형제였는데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 황제(금태조)의 조상이 여진에 들어갈 때 우리 조상은 고려에 남았다가 요동으로 이주하였다. 우리와 황제 모두 3인의 조상으로부터 나왔다." 시조의 형 아고내는 고려에 있었는데, 호십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고내의 후손을 자처하기 위한 것이다. ▐ 호십문은 1118년에 죽었으므로 이 이야기의 채록은 그 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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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三國誤記」 金史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新羅來 年已六十餘矣 금시조는 이름이 함보인데 신라에서 나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 금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나라에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송막기문(1156)에 처음 나타나 여러 기록으로 이어지는데, 금사(1344) 이전까지는 모두 신라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는 금나라가 자신들의 시조를 신라인으로 인식하였다는 뜻이다. 원나라가 금사를 편찬할 때는 신라가 고려로 바뀐 지 오래되었으므로 금시조를 고려인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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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1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옛날 우리 평주의 승려 금준이 여진으로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의 선조이다.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娶女眞女 生子曰古乙太師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갔다. ▐ 특별한 신분이 아니었던 금시조의 행적이 반도의 기록에 남아 있었을 리 없으니 고려사의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14653 SHARED
 
금시조가 신라인인 이유
❶ 금시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송막기문인데 반도에서 신라가 고려로 교체되어 사라지고 난 뒤 200여년이 지난 1156년에 편찬되었다. 그런 송막기문이 반도에서 온 옛 사람을 굳이 신라인이라 한 것을 보면 그가 반도를 떠난 시기는 신라 때가 틀림없다. ❷ 금사(1344) 이전의 기록에는 송막기문과 출처가 달라보이는 기록까지 모두 신라인이라 되어 있다. ❸ 금사에서부터 금시조가 고려에서 왔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때는 반도가 고려로 불리게 된 지 4 ...
14681 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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