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6 松漠紀聞 → 龕福(감복) ┆ 1174~1244 九朝編年備要 ┆ 1194 三朝北盟會編 → 掯浦(긍포) ┆ 1202 建炎以來朝野雜記 → 指蒲(지포) ┆ 1208 建炎以來繫年要錄 → 堪布(감포) ┆ 1317 文獻通考 ┆ 1344 金史 → 函普(함보) ┆ 1451 高麗史 → 今俊·金克守(금준·김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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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 金史(1344)
皇統元年 所撰祖宗實錄成 凡三卷 進入 上焚香立受之 賞賚有差
1141년에 조종실록을 완성하였는데 3권이었다. (勗이) 입궐하여 올리니 (희종이) 향을 피워 일어서서 받은 뒤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 송막기문(1156)을 쓴 홍호는 1143년까지 금나라에 잡혀 있었으므로 그가 쓴 송막기문은 이 조종실록을 참고했을 수 있다.
5931#4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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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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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松漠紀聞(宋 洪皓)
女真酋長乃❶新羅人 號完顏氏 完顏猶漢言王也 女真以其練事 後隨以首領讓之 兄弟三人 一為熟女真酋長 號萬戶 其一適他國 完顏年六十餘 女真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即胡來也 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姪阿骨打之弟謚曰文烈者為子 其後楊哥生子闥辣 乃令文烈歸宗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 하였다.
완안은 중국말로 왕과 같다.
여진이 그가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므로 수령을 양보하고 따랐다.
5931#2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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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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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松漠紀聞(宋 洪皓)
▐ 송막기문은 저자가 금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그곳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그 정보는 금나라 황실이 제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금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이야기는 곧 금나라 황실의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반도는 신라에서 고려로 바뀐 지 200여년이나 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굳이 금나라 황실이 자신들의 조상을 신라인이라 하였다면, 금시조는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교체되기 전에 넘어간 것이 분명하다.
5931#25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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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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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松漠紀聞(宋 洪皓)
형제가 세 명인데 한 명은 숙여진의 추장이 되어 만호라 칭하였다.
또 한 사람은 타국으로 갔다.
완안이 60여 세였는데 여진 여자로써 처를 삼았는데 역시 60여 세였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장자가 곧 호래다.
이로부터 세 사람이 이었는데 양가 태사에 이르러 자식이 없어 그 조카 아골타의 동생이고 시호가 문열이란 자를 아들로 삼았다.
그 후 양가가 아들 달랄을 낳자 문열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였다.
▐ 금시조와 호래 사이에 4대가 빠져있다.
5931#4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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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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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 三朝北盟會編(南宋 徐夢莘) 2
60이 되도록 아내를 얻지 못하였다.
이때 이곳은 센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여 법이 없었다.
긍포가 나무를 쪼개 문서처럼 사용하고 사람들을 가르쳐 빚을 내어주고 이자를 받게 하였으며 열심히 들에 씨를 뿌리게 하여 마침내 부자가 되게 하였다.
만약 닭, 돼지, 개, 말을 훔치다가 걸리면 쇠고랑과 차꼬를 채워 형틀에 묶고 버드나무 가지로 때렸으며, 훔친 물건의 7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그러자 주변이 모두 복종하였으며 그를 신명이라 불렀다.
5931#14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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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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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 建炎以來繫年要錄
苗耀神麓記云 女真始祖堪布(감포) 出自❺新羅 奔至安春(안춘) 無所歸 遂依完顏 因而氏焉 後女真眾人結盟 推為首領
묘요신록기에는 여진의 시조가 감포인데 신라에서 도망나와 안춘에 이르렀으나 갈 곳이 없어 완안에 의탁하고 이로써 성씨를 삼았다고 되어 있다. 뒤에 여진인들이 수령으로 추대하였다.
▐ 신록기는 송막기문(1156)과 출처가 달라보이는데 이 신록기를 통해서도 금시조가 신라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5931#4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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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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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7 文獻通考(元 馬端臨)
又云其酋本❻新羅人號完顏氏猶漢言王也
또 그 추장은 원래 신라인인데 완안씨라 불렀다. 한자음으로 왕과 같다.
龕福(감복) - 訛魯(와로) - 洋海(양해) - 隨闊(수활) - 實魯(실로) - 胡來(호래)...
호래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核裏頗(핵리파)이고 둘째는 蒲刺束(포자속)이고 셋째는 楊割(양할)이다.
핵리파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吳刺東(오자속)이고 둘째는 阿骨打(아골타)이고 셋째는 吳乞買(오걸매)이고 넷째는 撒(살)이다.
5931#14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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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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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1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 兄阿古迺好佛 留高麗不肯從曰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顏部僕乾水之涯 保活里居耶懶
금시조는 이름이 함보인데 고려에서 나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형은 아고내인데 불교를 좋아해서 따라오지 않고 고려에 남으며 말하길 "후손들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니 나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우인 보활리만 데리고 왔다. 시조는 완안부 복간수 물가에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에 살았다.
5931#25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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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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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1
▐ 금태조와 그 후손의 생년은 다음과 같다. ┆ 1068 太祖 1096 宗堯 1123 世宗 1146 允恭 1163 宣宗 1198 哀宗 ┆ 금태조가 태어나고 그 5대손이 태어나기까지 130년으로 한 세대 평균은 26년이다. 이것을 금태조 손자의 9대조가 결혼하고 금태조가 태어나기까지에 적용하면 6×26=156년이고 1068년으로부터 156년 전은 912년이다. 신라는 935년에 망했다.
5931#2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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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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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1
▐ 금시조에 대해 송막기문(1156)부터 금사(1344) 이전까지 모든 기록에 신라인으로 기술되어 있다. 금사가 편찬될 때는 신라가 고려로 바뀐지 매우 오래 되었으므로 신라를 고려로 바꾸어 기술한 듯하다. 이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손자 묘지명에 그를 발해인으로 기록한 것과 유사하다.
고려 보장왕은 당나라로 귀화하여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지만 고려는 100여년 전에 사라졌고 당시 그 자리에는 발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5931#2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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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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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4
시조가 완안부에 이르러 오래 머물렀는데, 그곳 사람이 다른 부족 사람을 죽여 양 부족간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완안부 사람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이 부족간 원한을 풀어 서로 싸우지 않게 해 주면 부족에 사는 60된 노처녀를 짝지어 주고 부족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겠다고 하자, 시조가 응했다.
▐ 금시조는 3남매를 두었는데 60세 부인과 결혼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삼조북맹회편에 나오는 40세가 더 자연스럽다. 금시조의 나이와 혼동한 듯하다.
5931#1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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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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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5
시조가 가서 "사람을 죽인 일로 시작된 싸움이 끝이 없어 피해가 너무 크다. 싸움의 원인이 된 사람을 응징하고 재물로 보상을 받은 뒤 싸움을 멈추면 좋지 않겠는가?"고 하자 피해 집안에서 이에 응했다.
시조가 "말 10마리와 암소 10마리 그리고 황금 6량으로 보상하고 그 집안 사람 한 명을 데려가 피해를 당한 사람 집에서 부리게 하겠다. 삼가 약속 드린다"고 했다.
5931#1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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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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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6
여진의 풍속에 사람을 죽일 경우 말과 소 30마리로 갚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의 약속대로 보상이 이루어지자 부족 사람들이 믿고 따르며 푸른 소 한 마리를 사례하고 60세 신부와의 혼인도 허락하였다.
시조는 이 푸른 소를 혼례품으로 받아 들이며 자산을 획득하였다.
후에 두 아들이 나자 장자는 오로라 부르고 차자는 알로라 불렀으며 딸 하나는 주사판이라 불렀다.
드디어 시조가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5931#1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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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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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8
"우리 먼 조상은 삼형제였는데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 황제(금태조)의 조상이 여진에 들어갈 때 우리 조상은 고려에 남았다가 요동으로 이주하였다. 우리와 황제 모두 3인의 조상으로부터 나왔다."
시조의 형 아고내는 고려에 있었는데, 호십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고내의 후손을 자처하기 위한 것이다.
▐ 호십문은 1118년에 죽었으므로 이 이야기의 채록은 그 이전이다.
5931#1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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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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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三國誤記」 金史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新羅來 年已六十餘矣 금시조는 이름이 함보인데 신라에서 나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 금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나라에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송막기문(1156)에 신라인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는 신라가 고려로 바뀐 지 200여년 후의 시점에서 금나라가 자신들의 시조를 신라인으로 인식하였다는 뜻이다. 이후 원나라가 금사(1344)를 편찬할 때까지 200여년간 모든 사서에서 신라인으로 기록했다.
5931#7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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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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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1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옛날 우리 평주의 승려 금준이 여진으로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의 선조이다.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娶女眞女 生子曰古乙太師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갔다.
▐ 특별한 신분이 아니었던 금시조의 행적이 반도의 기록에 남아 있었을 리 없으니 고려사의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5931#1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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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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