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년 2월에 영양왕이 말갈 기병 1만 기를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하였다. 수나라는 수륙으로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육군은 장마와 전염병으로 시달리고 수군은 풍랑을 만나 배가 많이 파괴되었다. 그러던 중 영양왕이 사죄의 글을 보내오자 수나라는 9월에 군사를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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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09 수서(636)
時餽運不繼 六軍乏食 師出臨渝關 復遇疾疫 王師不振 及次遼水 元亦惶懼 遣使謝罪 上表稱 遼東糞土臣元 云云 上於是罷兵 待之如初 元亦歲遣朝貢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6군의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 군사가 임유관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왕사의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요수에 진주하자, 원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리는데,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원(遼東糞土臣元) 운운하였다. 고조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하였다.
3484#3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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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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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09 조선상고사(1931)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인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하니, 수의 군사는 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3484#3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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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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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09 조선상고사(1931)
▐ 강이식이란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 수서에는 한왕 양이 군사를 이끌고 임유관을 나와 요하에 이르렀고 주라후는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을 향했다는데, 이는 뭍과 바다 양쪽으로 침공하는 중국의 전형적인 전쟁 방식으로, -109년에 있었던 한나라의 조선 침공이나 612년에 있었던 수나라의 고려 침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수서의 기록이 자연스럽고 역사적 사실이다.
3484#17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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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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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09 조선상고사(1931)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 죽은 자가 열에 아흡이었다.”고 하여 불가항력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이 많다.
3484#3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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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09 조선상고사(1931)
▐ 수서가 춘추필법이라기보다 조선상고사가 역사소설인 듯하다.
사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르고 당시의 정황과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강이식이란 인물은 큰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국하고 수서 등의 중국 사서는 물론 삼국사기 등의 한국 사서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주국가를 세우려는 정신은 미군철수 자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매우 절실한 정신이다.
그러나 역사 왜곡을 통해 그 정신이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3484#8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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