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年代記 > 0562~0659 年代記 > 0598 隋의 고려 침공

598년 2월에 영양왕이 말갈 기병 1만 기를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하였다. 수나라는 수륙으로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육군은 장마와 전염병으로 시달리고 수군은 풍랑을 만나 배가 많이 파괴되었다. 그러던 중 영양왕이 사죄의 글을 보내오자 수나라는 9월에 군사를 되돌렸다.
 
-0109 漢의 조선 침공
-0109 漢의 조선 침공
17466 SHARED
 
-0109 漢의 조선 침공
누선장군 양복은 산동반도를 따라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넌 뒤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 이르렀고 좌장군 순체는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에서 출발하여 청천강을 건너 평양에 이르렀다.
21052 SHARED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550~0577 遼西郡
▐ 한나라 遼西군의 臨渝현은 서진때 遼西군의 양락현으로 합쳐졌고 遼西군은 고제때 북평군으로 합쳐졌다. 따라서 598년 당시 난하 유역에는 遼西가 없었다.
834 SHARED
 
0581~0600 營州總管府
遼西郡(舊置營州 開皇初置總管府 大業初府廢) 요서군(옛 영주가 있던 곳이다. 581~600년초에 총관부를 설치했다.)
10300 SHARED
 
0598.02 隋書(636)
元率靺鞨之衆萬餘騎寇遼西 營州總管韋沖擊走之 高祖聞而大怒 命漢王諒為元帥 總水陸討之 下詔黜其爵位 원(영양왕)이 말갈의 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입하였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물리쳤다.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諒)을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의 작위를 삭탈하였다.
35828 SHARED COMMENT
 
0598.02 수서(636)
▐ 난하 유역에 있던 요서군은 577년 이전에 폐지되었고 581년 직후에 대릉하 유역에 영주총관부가 설치되었다가 605년 직후에 폐지되고 요서군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요서는 대릉하 유역으로 보아야 한다.
14944 SHARED
 
0598.06 三國史記(1145)
한왕 양의 군대가 임유관을 나왔는데 장마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계속되지 않아 군대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 전염병에 걸렸다. 주라후는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35830 SHARED COMMENT
 
0598.06 수서(636) 周羅睺
起遼東之役 徵為水軍總管 自東萊泛海 趣平壤城 遭風 船多飄沒 無功而還 요동에서 전쟁이 발생하자 수군총관으로 기용되어 동래에서 바다로 배를 띄워 평양성을 향하였으나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파손되어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3487 SHARED COMMENT
 
0598.09 수서(636)
時餽運不繼 六軍乏食 師出臨渝關 復遇疾疫 王師不振 及次遼水 元亦惶懼 遣使謝罪 上表稱 遼東糞土臣元 云云 上於是罷兵 待之如初 元亦歲遣朝貢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6군의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 군사가 임유관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왕사의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요수에 진주하자, 원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리는데,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원(遼東糞土臣元) 운운하였다. 고조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하였다.
35831 SHARED COMMENT
 
0598.09 조선상고사(1931)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서 나오니, 수의 문제가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喉)로 수군총관(水軍總 管)을 삼아서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17464 SHARED
 
0598.09 조선상고사(1931)
▐ 위충은 요서총관이 아니고 영주총관이며, 여기에 나오는 요서는 임유현이 있던 난하 유역의 요서군이 아니라 요하 서쪽 대릉하 유역을 말한다. 몇 년 후 이곳에 요서군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낙랑고려가 임유관을 나올 일은 없었다.
3485 SHARED COMMENT
 
0598.09 조선상고사(1931)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인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하니, 수의 군사는 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3486 SHARED COMMENT
 
0598.09 조선상고사(1931)
▐ 강이식이란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 수서에는 한왕 양이 군사를 이끌고 임유관을 나와 요하에 이르렀고 주라후는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을 향했다는데, 이는 뭍과 바다 양쪽으로 침공하는 중국의 전형적인 전쟁 방식으로, -109년에 있었던 한나라의 조선 침공이나 612년에 있었던 수나라의 고려 침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수서의 기록이 자연스럽고 역사적 사실이다.
17465 SHARED
 
0598.09 조선상고사(1931)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 죽은 자가 열에 아흡이었다.”고 하여 불가항력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이 많다.
3488 SHARED COMMENT
 
0598.09 조선상고사(1931)
▐ 수서가 춘추필법이라기보다 조선상고사가 역사소설인 듯하다. 사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르고 당시의 정황과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강이식이란 인물은 큰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국하고 수서 등의 중국 사서는 물론 삼국사기 등의 한국 사서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주국가를 세우려는 정신은 미군철수 자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매우 절실한 정신이다. 그러나 역사 왜곡을 통해 그 정신이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8489 SHARED
 
0605~0618 遼西郡
遼西郡(舊置營州 開皇初置總管府 大業初府廢) 요서군(옛 영주가 있던 곳이다. 581~600년초에 총관부를 설치했다가 605~618년초에 부를 폐지하였다.) ┆ 柳城(大業初 置遼西郡) 유성(605~618년초에 요서군을 설치하였다.)
10285 SHARED
 
0612 隋의 고려 침공
0612 隋의 고려 침공
21055 SHARED
 
0612 隋의 고려 침공
양제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는 한편, 좌익위대장군 내호아로 하여금 강남에서 배로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21054 SHA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