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3. 왜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 (2) 왜와 신라 및 가라

신라는 왜의 설화에 등장하고 가라의 설화는 왜의 설화와 닮은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및 가라와 왜는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라가 왜와 우호적이었던 데 반해 신라는 왜와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일본서기(720) 新羅國
소잔오존의 하는 짓이 매우 버릇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그 벌로 많은 재물을 바치게 하고 마침내 쫓아 내었다. 이 때 소잔오존은 그의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가 증시무리란 곳에 살았다. 말하기를 “이 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하고는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출운국 파천 가에 있는 조상봉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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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720) 韓地
처음에 오십맹신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나무의 종자를 많이 가지고 왔다. 그러나 한지(韓地)에는 심지 않고 모두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축자로부터 대팔주국 안에 심어 푸른 산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오십맹신을 일컬어 공이 있는 신이라 하는데, 기이국에 모셔진 대신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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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720) 韓鄕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잔오존이 “한향(韓鄕)의 섬에는 금은이 있다. 만약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으면 (한국으로 건너갈 수 없으니) 좋지 않다”하고는 수염을 뽑아 뿌리니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서 뿌리니 이것이 전나무가 되었고 꽁무니의 털은 비자나무가 되었으며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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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720) 韓鋤劍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잔오존이 기도전원과 결혼하고자 하여 청하니 각마유와 수마유가 “바라건대 먼저 저 뱀을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 결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 뱀은 머리에 각각 소나무가 나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산이 있어 매우 무섭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를 죽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소잔오존이 꾀를 내어 독한 술을 빚어서 그에게 먹였다. 뱀이 취하여 잠이 들자 소잔오존이 뱀을 한서검(韓鋤劍)으로 머리와 배를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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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출운으로
소잔오존은 신라국(新羅國)에서 바다를 건너 출운으로 갔고 그의 이야기에는 한지(韓地), 한향(韓鄕) , 한서검(韓鋤劍) 등 한국과 관련된 말이 많이 나온다. 또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상이 항상 어둡게 되었다(六合之內常闇)'는 부분은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日月無光)'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연오랑과 세오녀도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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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8¦천일창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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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8 일본서기(720) 阿羅斯等
임나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였다. 아마도 선황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아울러 붉은 비단 1백 필을 주어 임나왕(任那王)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아 이것을 빼앗아버렸다. 양국의 원한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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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8 일본서기(720) 阿羅斯等 1
어간성 천황의 시대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있어 배를 타고 와서 월국(越國)의 사반포(笥飯浦)에 정박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을 각록(角鹿)이라 이름하였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의부가라국왕(意富加羅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이고 다른 이름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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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8 일본서기(720) 阿羅斯等 2
혈문(穴門)에 도착했을 때에 그 나라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였다. 나에게 ‘나는 곧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 또 다른 왕은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틀림없이 왕이 아님을 알고 즉시 다시 돌아왔다. 길을 알지 못해서 섬과 포구에 계속 머물렀다. 북해로부터 돌아와 출운국(出雲國)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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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8 일본서기(720) 阿羅斯等 3
이때 천황이 죽었다. 그대로 머물러 활목천황을 섬겨 3년이 경과하였다. 천황이 듣고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의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러고 싶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아라사등을 불러 “네가 길을 헤매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황을 만나고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너의 본국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 즉시 너의 국명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에 돌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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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8 일본서기(720) 阿羅斯等 4
그 국호를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아라사등은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 나라의 군부(郡府)에 보관하여 두었다. 신라인이 그것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와서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망하게 된 시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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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7? 고사기(712) 天之日矛
옛날에 천지일모라는 신라 왕자가 건너왔다. 그 신라에 아구라는 늪(ぬま)이 있었다. 그 늪 가에서 한 여자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햇빛이 무지개처럼 빛나며 그 여자의 몸을 비추었다. 한 남자가 이것을 이상히 여겨 그 여자를 계속 엿보았다. 그 여자는 그때 임신을 했는데, 나중에 붉은 옥을 낳았다. 엿보던 그 남자가 애원하여 그 옥을 얻고는 항상 허리에 차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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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7? 고사기(712) 天之日矛
그리고 그녀는 阿加流比売(あかるひめ)신이 되어 난파의 比売許曽(ひめこそ)신사에 모셔졌다. 천지일모가 처가 도망갔다는 얘기를 듣고 쫓아 건너와 난파에 이르려 했으나 신이 막아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다지마국(多遲摩國)으로 돌아가 정착하고 다지마 오미의 딸 전진견과 결혼하였다. 息長帶比賣命(신공황후)는 그 먼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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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7 일본서기(720) 天日槍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건너왔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 한 개, 족고옥 한 개, 제록록의 적석옥 한 개, 출석의 소도 한 구, 출석의 창 한 자루, 일경 한 면, 웅신리 한 구 등 모두 일곱 개의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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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7 일본서기(720) 天日槍
처음에 천일창이 배를 타고 파마국(播磨國)에 정박하여 육속읍(宍粟邑)에 있었다. 이때 천황이 삼륜군(三輪君) 의 선조 대우주(大友主) 와 왜직(倭直)의 선조 장미시(長尾市)를 파마에 보내어 천일창에게 “그대는 누구인가? 또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이 “저는 신라국의 왕자입니다. 그러나 일본국에 성황(聖皇)이 계시다는 것을 듣고 저의 나라를 아우 지고(知古)에게 주고 귀화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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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7 일본서기(720) 天日槍
그래서 천일창은 도도하(菟道河)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북쪽으로 들어가 근강국(近江國)의 오명읍(吾名邑)에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근강에서 약협국(若狹國)을 거쳐 서쪽의 단마국에 이르러 거처할 곳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근강국의 경촌(鏡村) 골짜기 옹기장이는 천일창을 따라온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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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7 신라에서 단마로
천일창의 이동 경로는 신라-파마-근강-약협-단마이고 아라사등의 이동 경로는 가라-혈문-출운-사반포다. 천지일모의 최종 정착지는 다지마로 천일창의 최종 정착지인 단마와 동일한 곳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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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0 삼국사기(1145)
호공(瓠公)을 마한에 보내 예를 갖추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을 알 수 없다.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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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수로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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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유사(1281) 龜旨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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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유사(1281) 龜旨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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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고사기(712)
하늘이 축자 일향 고천수의 구사포류다기(くじふるたけ)에 내려왔다. 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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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고사기(712)
故爾詔天津日子番能邇邇藝命而、離天之石位、押分天之八重多那此二字以音雲而、伊都能知和岐知和岐弖自伊以下十字以音、於天浮橋、宇岐士摩理、蘇理多多斯弖自宇以下十一字亦以音、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自久以下六字以音。故爾、天忍日命・天津久米命、二人、取負天之石靫、取佩頭椎之大刀、取持天之波士弓、手挾天之眞鹿兒矢、立御前而仕奉。 故其天忍日命此者大伴連等之祖・天津久米命此者久米直等之祖也、於是詔之「此地者、向韓國眞來通、笠紗之御前而、朝日之直刺國、夕日之日照國也。故、此地甚吉地。」詔而、於底津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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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일본서기(720) 高千穗峯
이때 고황산이 신성한 이불로 황손 천진언을 덮어서 내려 보냈다. 황손은 천반좌를 떠나 또 하늘의 팔중 구름을 헤치고 그 위세로 길을 헤치고 나가 일향의 습(襲)의 고천수봉에 강림하였다. 그리고 황손이 나아가는 모습은 신비한 이상(二上)산의 천부교(天浮橋)로부터 내려와 떠있는 섬의 둔치가 있는 평지에 서서, 불모의 땅인 공국(空國)의 구릉으로부터 좋은 나라를 찾아나서 오전 장옥의 입협 해변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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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일본서기(720) 高千穗峯
그 땅에 한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를 사승국이라 하였다. 황손이 “나라가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여기에 나라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황손이 나아가 머물렀다. --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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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남가라에서 일향으로
고대 문화는 대체로 반도에서 열도로 흘러갔다. 따라서 구지봉 설화가 건너가 고천수봉 설화가 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것은 일본 천황가가 남가라 유민에서 나왔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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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탈해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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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삼국사기(1145)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7년에는 등용해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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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삼국유사(1281)
탈해치질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왕(南解王) 때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나는 본시 용성국(한편 正明國 혹은 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혹 花廈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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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출운 또는 단파에서 신라로
탈해가 태어났다고 하는 시기는 기원 전후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의 대화를 잘 알지 못했고 왜국은 축자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국의 동북쪽 1천여 리는 출운쯤에 해당된다. 신라와 출운의 교류는 여러 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출운보다 더 동쪽에 있는 단파의 가능성도 있다. 다파나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편, 탈해 이야기에 등장하는 호공도 왜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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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9 일본서기(720)
군경에게 “짐이 듣건대 신라의 왕자 천일창이 처음 왔을 때 가지고 온 보물이 지금 단마에 있다고 들었다. 그때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 신보로 되었다. 짐은 그 보물을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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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8 해와 달이 빛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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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8 삼국유사(1281) 日月無光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日官)이 나아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였다.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降在我國 今去日本故致斯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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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8? 일본서기(720) 六合之內常闇
천조대신이 신성한 건물에서 베틀로 신의(神衣)를 짜고 있을 때는 얼룩말 가죽을 벗겨 지붕 위의 기와를 뜯고 던져 넣었다. 이 때문에 천조대신은 깜짝 놀라 베틀에 몸이 닿아 상처를 입었다. 이 일로 크게 노하여 천석굴에 들어가 돌문을 닫고 숨어 버렸다. 이로 인해 세상은 항상 어둡게 되었고 밤낮이 바뀌는 것도 알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天照大神 乃入于天石窟 閉磐戸而幽居焉 故六合之內常闇而不知晝夜之相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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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3(323) 일본서기(720)
新羅人이 朝貢하였다. 따라서 이 役事에 동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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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9(329) 일본서기(720)
新羅가 朝貢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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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5(365) 일본서기(720)
新羅가 朝貢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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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5(365) 일본서기(720)
竹葉瀨의 아우인 田道를 보내면서 詔를 내려, “만약 신라가 대항하거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라”고 하고, 날랜 병사를 주었다. 병사를 풀어 수백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4邑의 백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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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4(414) 일본서기(720)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뛰어난 醫員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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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4(414) 일본서기(720)
醫員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천황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천황이 기뻐하여 의원에게 후한 상을 주어서 자기 나라에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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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3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昔日本は三韓と同種也と云事のありし、かの書をば、桓武の御代にやきすてられしなり。 옛날 일본은 삼한과 같은 민족이라고 전해내려오나 그 책을 환무천황(781~806)시대에 불태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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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과 대선릉고분
위의 왼쪽 쌍분이 황남대총이고 아래 제일 큰 전방후원분이 대선릉고분이다. 황남대총은 350~450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대선릉고분은 인덕 천황(433~519)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 길이가 120m와 525m로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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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가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주장
천황가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주장은 다시 그 뿌리에 따라 신라유래설, 임나유래설, 부여유래설 등으로 나뉘어진다. 1890년 성야항(星野恒 ほしの ひさし)은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연구한 후 일본 천황가의 선조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라왕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신라왕은 먼저 시마네 지방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나갔고 동쪽으로 정벌(神武東征)에 나서 마침내 일본열도를 모두 정복하고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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