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史書 > 0289 三國志(晉 陳壽) > 沃沮
 
0289 三國志 01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濵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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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1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호수는 5천호인데 대군장은 없으며 읍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가 있다. 그들의 말은 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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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2
漢初 燕亡人衞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한나라 초에 연의 망명객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면서 옥저는 모두 복속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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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3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為四郡 以沃沮城為玄菟郡 -109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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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4
後為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為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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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4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의 고부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불내성에 치소를 두어 별도로 영동 7현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에 옥저도 모두 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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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5
漢光武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為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為侯國 夷狄更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 皆濊民作之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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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5
30년에 변경의 군을 줄였는데 도위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현에 있던 우두머리로 모두 현후를 삼으니 불내·화려·옥저 등의 제 현은 전부 후국이 되었다. 이들 이적들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후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조·주박 등의 제조를 두었는데 예인이 모두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들은 스스로를 삼로라 일컬으니 그것은 옛 현국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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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6
國小 迫於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為使者 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為婢妾 遇之如奴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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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6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맥·포·어·염·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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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7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宜五糓 善田種 人性質直彊勇 少牛馬 便持矛步戰 食飲居處 衣服禮節 有似句麗 동옥저의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보전을 잘한다. 음식·주거·의복·예절은 구려와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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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8
魏畧曰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為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위략: 그 나라의 혼인하는 풍속은 여자의 나이가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집에서는 맞이하여 장성하도록 길러 아내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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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9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舉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為數 又有瓦䥶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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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09
그들은 장사를 지낼 적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며 한쪽 머리를 열어 놓아 문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을 하되 겨우 형체가 덮일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한다. 온 집식구를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로써 모양을 새긴다. 또 질솥에 쌀을 담아서 곽의 문 곁에다 엮어 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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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10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할 때 구려의 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옥저의 읍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급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궁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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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11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恒在山巖深穴中為守備 冬月氷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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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11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읍루와 접해 있다. 읍루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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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12
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問其耆老 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 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國人衣 其兩袖長三丈 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通 不食而死 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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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289 三國志 12
왕기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궁을 추격해서 동쪽 경계의 끝까지 갔다.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또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어느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일을 바람부는 대로 표류해서 동쪽으로 흘러가 한 섬에 도착 하였다. 그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말을 서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습속은 해마다 7월이면 동녀를 구하여 바다에 집어넣는다.”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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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12
이어 “바다 가운데에 어떤 나라가 있는데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고 하였다. 또 “바다 가운데에 떠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시체는 마치 중국 사람 같고 입은 옷의 두 소매 길이는 3장이었다. 또 난파되어 밀려온 배 한척을 잡았는데 그 배에 있는 사람의 목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 생포하여 함께 말을 해 보았으나 서로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라고 하였다.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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