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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우익인사나 경찰관들이 타살됐다. 거리 곳곳에는 경찰관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대구공회당 앞에서는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주듯이 쌀을 나누어 주었다.
 
대구인민봉기
10·1 사건이 터졌다. 대낮 경찰서 앞에서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광경을 지켜봤다. 누가 행인을 가리키며 “저놈이 형사!”라고 외치면 그만이었다. 행인이 형사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군중은 설움에 북받친 듯 저항했다. 경북 영천에는 조선인민공화국 깃발이 사흘이나 휘날리지 않았던가. 구미나 왜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살던 경북 칠곡의 왜관경찰서장이 군중에게 맞아 죽는 일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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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인민봉기
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우익인사나 경찰관들이 타살됐다. 거리 곳곳에는 경찰관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대구공회당 앞에서는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주듯이 쌀을 나누어 주었다. 미군들은 사진촬영만 할 뿐 폭동을 진압할 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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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전 대구의 분위기
좌우이념 갈등으로 혼란이 빚어졌을 당시, 적지 않은 학생들 사이에서 김일성대학을 선망하고 북한을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성 국가인양 착각하는 풍조가 일었다. 남한에는 친일파(親日派) 고등계 형사들이 미군정(美軍政)에 의지했다거나, 지주(地主)들이 살기 위해 한민당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부(富)가 불의(不義)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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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시 대구의 분위기
대구대(지금의 영남대)에 입학, 대학 3학년 때 6·25를 맞았다. 좌익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나를 찾아와 “내일이나 모레면 김일성 장군의 부대가 오지 않느냐”고 말해 깜짝 놀랐다. 심지어 나에게 “혁명가가 되자”, “김일성 대학에 진학하자”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좌익 성향의 학교 선생님들조차 학생 간부였던 나를 지목하며 좌익활동을 부추겼다. 그 선생님들은 나중에 월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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