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057 新羅 六村 > 閼川 楊山村 → 梁部┆李 → 中興部 > 北川이 閼川으로 오인되는 과정

삼국사기(1145)는 선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신하들이 회의를 해서 조카를 옹립하려 했으나 閼川이 범람하는 바람에 京北에 사는 그가 건너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閼川이 월성의 북쪽을 동서로 흐르는 北川처럼 들리게 한다. 그런 착각은 삼국유사(1281)에서 나타나서 동국여지승람(1481)을 거쳐 알천제방수개기(1707)로 이어졌다. 그러나 兄山江처럼 북동으로 흐르면 그 동편에 있는 월성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이 강의 서편이 될 수 있다.
 
-0069 三國遺事(1281)
하나는 閼川 楊山村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曇嚴寺다. 마을 어른은 謁平이라 하여 처음에 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를 두어 이름을 及梁部라 하였는데 940년에 이름을 고쳐 中興部라 하였다. 波潛·東山·彼上·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9313#38409 SBLNGS CHLDRN 38409
 
-0069 三國遺事(1281)
▐ 高墟村 鄭氏의 시조는 兄山에 내려왔고, 大樹村 孫氏의 시조는 伊山에 내려왔으며, 珎支村 崔氏의 시조는 花山에 내려왔고, 加里村 裴氏의 시조는 明活山에 내려왔으며, 髙耶村 薛氏의 시조는 金剛山에 내려온 것을 볼 때, 楊山村 李氏의 시조가 내려왔다는 瓢嵓峯은 지금 瓢嵓으로 알려진 곳이 아닐 듯하다.
29313#38397 SBLNGS CHLDRN 38397
 
0160 三國史記(1145)
暴雨 閼川水溢 漂流人家 金城北門自毀 폭우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쳐 민가가 떠내려갔다.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 알천이 범람해서 금성 북문이 무너진 듯한 인상을 받기 쉬우나 自毀는 강물에 의하지 않고, 말 그대로, 저절로 무너졌다는 뜻이다.
29313#38390 SBLNGS CHLDRN 38390
 
0496 三國史記(1145)
大雨 閼川水漲 漂沒二百餘家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쳐 2백여 가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다. ▐ 금성 북문이 自毀한 것과 여기서 집이 漂沒한 것이 비교된다.
29313#38391 SBLNGS CHLDRN 38391
 
0785 三國史記(1145)
及宣徳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선덕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여러 신하들이 회의를 한 후에 왕의 집안 조카인 주원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周元宅於京北二十里 㑹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주원의 집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위치였는데, 마침 큰비가 와서 알천의 물이 넘쳐 주원이 건너 오지 못하였다.
29313#29315 SBLNGS CHLDRN 29315
 
0785 三國史記(1145)
▐ 兄山江은 북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兄山江의 동편에 있는 월성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은 兄山江의 서편이 될 수 있다. 그곳에서 월성에 가려면 兄山江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宅於京北, 閼川水漲 그리고 不得渡만 놓고 보면 마치 閼川이 京北을 동서로 흐르는 듯한 인상을 받기 쉽다.
29313#29322 SBLNGS CHLDRN 29322
 
0785 三國遺事(1281)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대답하기를 “請密祀北川神可矣 청컨대 은밀히 북천신에게 제사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자 이에 따랐다.
29313#29321 SBLNGS CHLDRN 29321
 
0785 三國遺事(1281)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어 장차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家在川北忽川漲不得渡 그의 집은 내의 북쪽에 있었는데 홀연히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 北川神에 제사지내고 나서 川漲이 있었기 때문에 川漲의 川은 北川이 된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을 이야기하며 閼川水漲이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北川은 閼川의 이칭이 된다.
29313#29314 SBLNGS CHLDRN 29314
 
1281 三國遺事
峧貞者嫉妬毛娘 多置酒飮毛娘 至醉潜舁去北川中舉石埋殺之 교정은 남모를 질투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많이 마시게 하고 취하게 되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29313#29320 SBLNGS CHLDRN 29320
 
1530 新增東國輿地勝覽
東川 一云北川 一云閼川 在府東五里 出楸嶺入堀淵 동천은 북천이라고도 하고 알천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추령에서 발원하여 굴연으로 흘러들어간다.
29313#38385 SBLNGS CHLDRN 38385
 
1707 閼川堤防修改記
1707 閼川堤防修改記
閼川西注 邑基東圮 서쪽으로 흐르는 알천 물살에 고을 동편 제방이 무너졌네. 高擁木石 奧自麗氏 나무와 돌로 높은 둑을 쌓았으니 고려 때부터라네. 今又脩改 歲維丁亥 올해 정해년에 다시 수리하여 고치었네. 因勢利導 水由古道 지형 따라 잡은 갈래 예전에 흐르던 대로 물길 터주었네. 磨峨記蹟 垂之千億 이 바위 면에 사실을 적어 영원토록 전하고자 하네.
29313#29310 SBLNGS CHLDRN 29310
 
1707 閼川堤防修改記
▐ 北川이 閼川이라는 잘못된 인식은 삼국유사(1281)에서 시작되어 동국여지승람(1481) 등을 거쳐 이때까지 이어졌다.
29313#29312 SBLNGS CHLDRN 2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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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1787 瓢巖誌序(1931⁻)
至健陵丁未 後孫集星宰永川 始刻而識之 而土居諸雲仍 因碑而閣而壇之 以妥芬苾之享焉
29313#38389 SBLNGS CHLDRN 38389
 
1787 瓢巖誌序(1931⁻)
월성 동북쪽에 표암이 있는데 이씨가 나온 곳이다. 그런데 그 사적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상나라와 주나라의 시조와 유사하다. 그러므로 2천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그 사적이 전해오는 것이 겨우 공사의 문적에 실려 있을 뿐이다. 1787년에 이르러 후손 집성이 영천 군수가 되어, 비로소 瓢巖이라는 두 글자를 바위에 새겨서 그 자취를 표시했는데, 월성에 사는 여러 후손들이 이어서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짓고 제단을 쌓아 시조에 대한 제향을 드렸다.
29313#38400 SBLNGS CHLDRN 38400
 
1856~1861 東輿圖
1856~1861 東輿圖
29313#28771 SBLNGS CHLDRN 28771
 
1931 慶州 李氏의 瓢巖崇慕와 宣揚事業 (2014)
후손들은 시조를 숭모하고 사적지를 보존하기 위해 친목계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 노력은 1922년 후손 14인이 발기하여 시작한 瓢巖齋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齋舍의 건립은 중간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지만 9년 만에 완성을 보았다.
29313#38395 SBLNGS CHLDRN 38395
 
慶州瓢巖
1806년에 유허비가 세워졌고 1925년에는 瓢巖齋가 건립된 뒤 매년 3월이면 중정에 향사를 하고 있다.
29313#28632 SBLNGS CHLDRN 28632
 
게눈바위
경주 시내에서 보면 게의 눈처럼 튀어나온 바위라고해서 이렇게 부른다. 게눈바위가 있는 영마루를 蟹目嶺이라고 하는데, 게눈바위가 있는 고갯마루라는 뜻이다. 우뚝 솟은 게눈바위 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알터를 머리가 큰 뱀이 감싸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예전에는 아이를 얻기 위해서 빌던 기자대라고도 불렀으니 오래전부터 기도신단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29313#38402 SBLNGS CHLDRN 38402
 
게눈바위
게눈바위
29313#38451 SBLNGS CHLDRN 38451
 
경주 남산 지도
29313#38401 SBLNGS CHLDRN 38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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