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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 > 0475~0561 ❹ 百濟의 南下 |
高麗의 침공을 받아 百濟는 한강 유역을 잃고 금강 유역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倭의 도움을 받아 任那의 섬진강 유역과 영신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이후 新羅와 함께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하류와 상류를 나눠가졌으나 高麗와 新羅가 손을 잡자 포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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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⁵ 0196~0230 三國誤記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請救 尼師今使王孫㮈音 率近郡及六部軍徃救 遂敗八國兵 포상의 여덟 나라가 함께 아라국을 치기로 하자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니 드디어 여덟 나라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 물계자는 나해 이사금 시기의 인물이라고 되어 있고 나해 이사금의 재위기간은 196년에서 230년까지로 되어 있다.
30688#30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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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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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⁵ 0196~0230 三國誤記
後三年 骨浦·㭍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3년 뒤에 골포·칠포·고사포 세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갈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구하고 세 나라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물계자는 수십여 명의 목을 베었으나 그 공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또 얻은 바가 없었다.┆포상8국이 남가야를 침공한 시기가 509년이라면 이 사건은 3년 후인 512년의 일이 된다.
30688#30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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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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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 0529.03 多沙津 분쟁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압산신을 통해 가라의 多沙津을 청하자 왜는 이를 주었다. 이에 가라왕은 왜를 원망하며 신라와 우호를 맺고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여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나 의관 문제로 갈등이 생기자 신라는 왕녀를 돌려달라 요청하였다.
가라는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으며 자식이 있는데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신라는 지나는 길에 刀伽, 古跛, 布那牟羅 세 성을 함락시키고 북쪽 변경의 다섯 성도 쳤다.
30688#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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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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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0530 近江毛野臣
527년에 왜는 근강모야신으로 하여금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에 나아가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축자국조 반정이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529년 왜는 다시 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 530년 임나의 사신이 왜에 와서 모야신의 폭정을 폭로하였다. 왜는 목협자를 보내 모야신을 불렀다. 모야신은 가는 도중 대마도에서 병이 나서 죽었다.
30688#24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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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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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544 ◾任那² 재건 시도
任那²의 㖨己呑, 南加羅 그리고 卓淳이 신라에 넘어가자, 왜는 529년에 모야신을 任那²에 파견하여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잠잠하다 흠명천황이 즉위 이듬해인 541년부터 다시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백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任那²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를 旱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545년 이후 지지부진하다 554년 이후에는 日本府와 旱岐가 기록에서 사라졌다.
30688#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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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4 한강 유역과 관산성
백제는 가라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과 그 건너편의 평양을 빼앗아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때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죽령 북쪽 10군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돌궐의 침공을 막느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로부터도 유민을 송환당하는 등 고립에 처하자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를 느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신라가 주웠다.
30688#8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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