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가라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과 그 건너편의 평양을 빼앗아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때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죽령 북쪽 10군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돌궐의 침공을 막느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로부터도 유민을 송환당하는 등 고립에 처하자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를 느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신라가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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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544 ◾任那² 재건 시도
任那²의 㖨己呑, 南加羅 그리고 卓淳이 신라에 넘어가자, 왜는 529년에 모야신을 任那²에 파견하여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잠잠하다 흠명천황이 즉위 이듬해인 541년부터 다시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백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任那²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를 旱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545년 이후 지지부진하다 554년 이후에는 日本府와 旱岐가 기록에서 사라졌다.
8048#23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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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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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6 日本書紀(720)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中夫人이 세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麁群이었다. 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細群이었다. 박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8048#30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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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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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8.04 日本書紀(720)
백제는 중부 간솔 掠葉禮 등을 보내 “덕솔 宣文 등이 칙을 받들어 신의 나라에 이르러 ‘구원병은 때에 맞춰 파견할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은조를 받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馬津城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불러들여 정벌하기를 권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참으로 그럴 법한 일입니다.
8048#2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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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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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8.04 日本書紀(720)
천황은 조를 내려 “상주한 내용을 듣고 우려하는 바를 살펴보니 日本府와 安羅가 이웃의 어려움을 구하지 않은 것은 짐도 또한 괴롭다. 또 고구려에 몰래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짐이 명하였다면 보냈을 것이다. 명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맘대로 보낼 수 있겠는가. 任那와 함께 전에 명한 대로 힘을 합쳐서 북적을 막고 각각 봉토를 지켜라. 짐은 사람을 보내 安羅가 도망가 버린 공지를 채우도록 하겠다.”고 명하였다.
8048#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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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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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2 日本書紀(720)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본기에는 “3월 12일 신유에 일본의 사신 阿比多가 배 3척을 이끌고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조를 내려 “짐이 장덕 久貴와 고덕 馬進文 등이 올린 표의 뜻에 따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하나하나 교시하겠다. 이제 좀 더 자세히 대답하고자 사신을 보낸다.”고 명하였다. 거듭해서 조를 내려 “짐이 듣건대 북적은 강하고 포악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살 30구를 내리니 바라건대 한 곳을 방어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8048#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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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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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4.01 日本書紀(720)
백제에 있는 일본의 사자가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백제본기에는 4월 1일 경진에 日本 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한다.) 백제왕 성명이 사자에게 “임나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겠다. 延那斯와 麻都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칙에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고구려 노 6구를 바치고 별도로 사자에게 노 1구를 주었다. (모두 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노예이다.)
8048#8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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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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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4.01 ◾移那斯(延那斯)·麻都
542년 7월에 성왕은 임나의 移那斯와 麻都를 본거지로 보내달라는 표를 올렸다.┆543년 11월에 천황은 임나를 재건하면 移那斯와 麻都는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544년 3월에 성왕은 移那斯와 麻都를 비난하는 표를 다시 올렸으나 10월에 내려진 조서에는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549년 6월에 천황은 延那斯와 麻都가 고려와 내통했는지 조사하겠다고 말했다.┆550년 4월에 성왕은 延那斯와 麻都 문제는 천황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8048#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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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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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2 국사편찬위원회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보면 돌궐의 木汗可汗(553~572)이 遼海 이서까지 진출하여 契丹, 室韋, 庫莫奚 등 여러 종족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마찰을 빚은 바 있다. 또 新城과 白巖城에서 전투를 벌였고, 고구려·말갈과 돌궐의 利稽察 세력 간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수를 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돌궐과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8048#8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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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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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2 北史(659)
문선제는 박릉 최유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위나라 말에 흘러 들어간 백성들을 요구케 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成(양원왕)을 쳐 용상 밑으로 떨어 뜨렸다(拳擊成墜於床下). 成의 좌우는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유는 5천호를 돌려 받아 복명하였다.
▐ 최유의 허풍일 수 있겠으나 그만큼 고려는 북위로부터도 박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8048#8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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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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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2.05 日本書紀(720)
백제, 가라, 안라가 중부 덕솔 木刕今敦과 하내부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與新羅 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故謹求請救兵 先攻不意 軍之多少 隨天皇勅 고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日本府臣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라고 하였다.
8048#8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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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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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2.05 ◾
백제 성왕이 왜왕에게 한 『高麗與新羅 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고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를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는 말은 일본서기에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리자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고 기록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新羅取東北鄙置新州 신라가 동북 변경을 가져 신주를 설치했다.』라고 되어 있다.
8048#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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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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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06 日本書紀(720)
內臣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좋은 말 2필, 동선 2척, 활 50장, 화살 50구를 주었다. 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고 하고, 다른 칙을 내려 “의박사·역박사·력박사 등은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켜라. 또 복서 및 역본과 여러 가지 약물도 보내라”고 하였다.
▐ 백제는 552년 5월과 553년 1월에 거듭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었다.
8048#3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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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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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08 日本書紀(720) ⓵
백제가 상부 나솔 科野新羅와 하부 고덕 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였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狛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전군과 후군을 계속 파견하여 구원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8048#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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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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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08 日本書紀(720) ⓷
한편 的臣이 삼가 천칙을 받고 와서 신의 나라를 위무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태만하지 아니하고 정사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해외의 여러 蕃들은 모두 그의 선정을 칭송하여 영원히 해표의 여러 나라에 선정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도하는 바입니다. 이제 임나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황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임나를 다스리시길 엎드려 바랍니다.
8048#1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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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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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1 日本書紀(720)
백제가 중부의 木刕施德文次, 전부의 시덕 曰佐分屋 등을 筑紫에 보내 內臣과 佐伯連 등에게 묻기를 “덕솔 차주와 간솔 색돈 등이 지난 해 윤달 4일에 와서 ‘臣 등(內臣을 말한다)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약간이나마 들어 미리 군영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8048#3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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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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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2 日本書紀(720)
백제가 하부 간솔 장군 三貴와 상부 나솔 物部烏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덕솔 東城子莫古를 바쳐 전에 番을 섰던 나솔 東城子言을 교대하고 오경박사 왕류귀로 고덕 마정안을 대신하고 승 담혜 등 9인으로 승 도침 등 7인을 교대하였다. 따로 명령을 받들어 역박사 시덕 왕도량, 역박사 고덕 왕보손, 의박사 나솔 왕유릉타, 채약사 시덕 반량풍, 고덕 정유타, 악인 시덕 삼근, 계덕 기마차, 계덕 진노, 대덕 진타를 바쳤는데 모두 청에 따라 교대하였다
8048#3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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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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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7 三國史記(1145) 新羅 ✘
백제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8048#29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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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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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9 三國遺事(1281)
백제 병사가 珎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백제가 이것을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8048#24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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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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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12 日本書紀(720) ①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의 간솔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 明과 안라에 있는 왜신들, 임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은 아룁니다. 사라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有至臣 등을 보내 군사를 청해 사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有至臣을 보내시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 有至臣은 內臣이다.
8048#23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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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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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12 日本書紀(720) Ⓑ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 50명의 군사로 신라를 습격하려 했었다는 삼국사기(1145)의 설명은 어색하다.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가다가 습격을 받았다는 일본서기(720)의 설명이 자연스럽다.
8048#8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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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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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12 日本書紀(720) Ⓓ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智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8048#8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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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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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12 日本書紀(720) Ⓕ
여창은 포위에서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8048#8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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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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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12 日本書紀(720) Ⓖ
이로 인해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이 국조가 활로 포위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안교군”이라 이름하였다(안교는 우리 말로 くろじ라 한다).
이 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8048#8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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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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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12 ❰❰ 0554.07 「三國誤記」 新羅
백제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일본서기(720)의 기록에 맞춰 옮긴다.
8048#2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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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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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5.02 日本書紀(720)
백제 왕자 여창이 왕자 惠(威德王의 동생이다)를 보내어 “성명왕이 적에게 살해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5년에 신라에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아뢴 것이다.) 혜가 “천황의 덕에 의지하여 돌아가신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만약 불쌍히 여겨 병기를 많이 주신다면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신이 돌아갈지 머무를지는 오직 명에 따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8048#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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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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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5.02 ◾ 종합
관산성 전투에 관련된 기록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554.06 왜의 여자신이 지원군을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② 554.07 백제가 가라와 함께 관산성을 침공하자 신주의 김무력이 지원하였고 삼년산군이 성왕을 전사시키자 백제는 대패하였다.
③ 554.09 백제가 신라의 진성을 침공하였다.
④ 554.12 왜의 여자신이 함산성을 함락시켰으나 성왕이 전사하며 백제는 대패하였다.
⑤ 555.02 백제가 왕자 혜를 왜에 보내 성왕의 전사를 알렸다.
8048#29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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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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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6.01 日本書紀(720)
백제의 왕자 惠가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병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하게 상으로 물품을 많이 하사하여 여러 사람들이 찬탄하였다. 이때 阿倍臣·佐伯連·播磨直을 파견하여 축자국의 수군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도록 하였다. 별도로 筑紫火君(백제본기에는 축자군의 아들 火中君의 아우라고 한다)을 파견하여 용감한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彌弖까지 호위하도록 하고 뱃길의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8048#23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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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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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1 日本書紀(720)
다시 奴氐大舍를 보내 지난번의 조부를 바쳤다. 난파의 대군에서 여러 번국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장객 액전부련과 갈성직 등이 백제의 아래에 신라 사신을 세워 인도하였다. 대사는 화가 나서 돌아갔다. 穴門에 이르렀다. 이때 혈문관은 수리 중이었다. 대사가 “어떤 손님을 위해 짓는가?”라고 묻자, 공장 하내마사수압승이 거짓으로 “서방의 무례를 문책하러 보낼 사자가 머무를 숙소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신라는 阿羅 波斯山에 성을 쌓고 일본에 대비하였다.
8048#23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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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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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
돌궐 또한 한민족 고대사와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갖고 있다. 돌궐은 당과는 적대 관계였으나 고구려와는 우호·동맹 관계였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 역시 돌궐과는 우호 관계였다.
▐ 고려와 돌궐은 항상 우호 관계였던 것이 아니라 당나라 이전에는 적대 관계였다. 또 발해는 신라와 적대 관계였고 일본과 우호 관계였던 것으로 보아, 우호 관계와 종족적 친연성은 별개의 문제다.
8048#2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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